<강은미 문학카페> 9 김훈 「칼의 노래」

   

오랜만에 파군봉을 다녀왔다. 야트막한 산을 오르는데도 소나무 사이에 질끈 동여맨 줄에 의지하면서 혹여 넘어질까 전전긍긍한다. 마음이 급할수록 걸음은 더디어 그동안 몸을 아낀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고나 할까. 소나무 숲 우거진 야트막한 산 아래 마을과 집이 오밀조밀 보이고, 저 멀리 바다는 아무 일이 고요하고 아득하다. 그 옛날 삼별초군 최후의 전투지였던 파군봉, 가려진 솔숲 너머로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명월포에서 칼날을 휘두르며 전진해오던 여몽연합군의 뱃머리가 보일 듯도 하다.

실제로 1273년 4월 28일, 삼별초군을 정벌하기 위한 여몽연합군 1만여 명이 도해작전을 감행, 새벽녘에 제주도 북안에 닿았다고 한다. 삼별초군도 고려군도 아님에도 내 무의식은 이미 약자의 편에 진입, 풀숲에 숨죽인 병사의 심정이 되었다.

명월포에서 함덕포에서 좌우  협공으로 밀려오는 적의 무리를 무찔러야 한다는 압박감을 지닌 일개 병사의 마음으로 산 아래를 보니 난공불락의 요새가 위태롭기 그지없다. 말발굽 소리에 귀가 눌렸는지 이슬에 젖은 자주괴불주머니가 부러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다. 아무 죄 지은 바 없이 섬을 통째로 내놓아야했던 이곳 민초들의 마음도 저러했으리라.
 
책장에 꽂혀진 김훈의 「칼의 노래」를 다시 꺼내보았다. 아마도 오전 산행의 여운이 먼 바다에 배 하나 띄우고 죽음도 삶도 예측할 수 없는 불안에 몸서리치던 한 운명을 떠올렸던 것 같다. 들춰보니 책 한 권이 온통 피로 물들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숨이 막히는 첫 문장이다.

김훈의 「칼의 노래」는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 참전 기록이다. 백의종군한 후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까지, 6년간의 기나긴 전투를 사실을 바탕으로 소설화한 작품이다. 절대 약세인 군기를 극복해가며 왜군과의 지리멸렬한 싸움을 치르는 과정에서 어머니와 아들 면의 사망소식이 전해져왔다.

또한 권력의 암투는 계속되었고, 임금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면서도 어린아이처럼 칭얼대는 요지를 보내왔다. 지원병으로 조선에 들어온 명군은 옴짝달싹하지 않고 백성들이 보낸 곡식과 고기와 술로 배를 채웠다. 백성들은 기근과 전염병에 시달렸고, 살아남은 자들은 수군의 이동에 따라 보따리를 싸야했다. 고기잡이를 나왔다가 밭일을 나왔다가 적의 방패막이로 끌려가는 남자들도 수두룩하였다. 적의 함대에서 칼을 맞고 쓰러지는 군사들이 조선말로 비명을 질렀다고 하는 사실은 이 전쟁이 얼마나 비극적이었나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더욱 기가 막힌 건 "바다는 전투의 흔적을 신속히 지웠다"는 것이다. 꽃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면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섬들이 노을이 깔린 이부자리 속으로 들어가면, 통제공 이순신의 몸에서는 고단한 냄새가 났다. 말할 수 없는 적의가, 외로움이 산더미처럼 파도처럼 밀려오곤 하였다. 그건 죽어도 승산 없는 싸움의 무의미함 때문이었다.

이 싸움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뒤늦게야 싸움에 합세해서 철수하는 왜군의 허공에다 총포 몇 알 쏘아대는 시늉만 하는 명군의 속셈에 조정은 속수무책으로 머리를 조아렸고, 내 바다에서 내 죽음의 주인마저 될 수 없는 식민의 설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결국 전쟁은 노량에서 끝이 났다. 철수하는 적선 200여 척이 격침되고, 50여 척이 도주하였다고 한다. 어린 면의 젖 냄새와 고향의 새벽안개 냄새와 임금의 기침소리가 그의 죽음과 함께 출렁거렸다. 무의미한 장난처럼 끝나버린 전쟁의 끝, 징징징 칼의 울음이 들리는 듯하였다. 1598년 11월 19일, 그의 나이 쉰 넷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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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에 여러 포구에서 이겼을 때, 매번 적병의 숫자를 장계에 써 보낸 것이 오 년이 지난 정유년에 조정에서 문제가 되었다. 전공을 허위로 보고해서 임금을 기만하고 조정을 능멸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죽어야 할 죄목의 하나였다. 그날 견내량 싸움을 끝내고 한산 통제영으로 돌아와 장계를 쓸 때, 나는 그 숫자가 어느 날 나를 죽이게 되리라는 예감에 몸을 떨었다. 그날 밤 나는 종사관을 물리치고 밤새도록 장계를 썼다. 한산 통제영에서 장계를 쓰던 임진년의 여름밤은 달이 밝았다. 나는 내 무인된 운명을 깊이 시름하였다. 한 자루의 칼과 더불어 나는 포위되었고 세상의 덫에 걸려 있었지만 이 세상의 칼로 이 세상의 보이지 않는 덫을 칠 수 없었다. 한산 통제영에서 그리고 여러 포구와 수영에서 나는 자주 식은땀을 흘렸고, 때때로 가엾고 안쓰러워서 칼을 버리고 싶었다. (중략) 내 생물학적 목숨의 끝장이 두려웠다기보다는 죽어서 더 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 되는 운명이 두려웠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것은 결국 같은 말일 것이었다. 나는 고쳐 쓴다. 나는 내 생물학적 목숨의 끝장이 두려웠다. 이러한 세상에서 죽어 없어져서, 캄캄한 바다 밑 뻘밭에 묻혀있을 때 내 백골의 허망을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세상에서, 삶은 늘 죽음을 거스르고 죽음을 가로지르는 방식으로만 가능했다. 내어줄 것은 목숨뿐이었으므로 나는 목숨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영웅 이순신을 보지 않았다. 차라리 처절한 외로움에 몸서리치는 운명의 소유자, 사실적 개연성을 지닌 허구적 인물 이순신을 보았다고나 할까"생물적 죽음이 두려웠다기보다는 죽어서 더 이상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 된 운명이 두려운" 인간 이순신, 베어도 베어낼 수 없는 명분 없는 전쟁이 갖는 허무함, 그 무의미함과의 싸움을 고통스러워했던 소설 속 그. 그는 나라의 장래를 짊어진 명장이기 이전에 아들이었고, 아버지였고, 남편이었고, 한 여자의 남자였다.

죽지 않으면 삶도 없고, 죽어도 삶이 없는 이 난감한 풍랑의 바다에서 그는 현재를 충실히 기록하려 애쓰면서도 목젖이 흔들리는 감정을 어찌할 수 없었으리라. 그 감정을 잠재우려 파도소리를 들으며 칼을 갈고 먹을 갈았을 것이다. 울음과 언어로만 전쟁을 수행하는 임금과, 제 배를 채우러 찾아든 명군은 그에게 또 다른 적이었으며 유일한 아군인 격군들과 가족과 백성들은 죽음의 실체로서 그의 눈앞에서 살이 문드러지고, 목이 잘려나갔다. 그 죽음마저도 개별적 죽음으로만 쳐다볼 수밖에 없는 자신을 몸서리치게 원망하였으니 그의 혼인들 온전할 수 있었으랴.

420여 년 전의 일이다. 우리가 영웅이라 부르는 한 인간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배운다. 또한 과거로부터 현재를 자각하게 되고, 미래를 예측해보게 된다. 내 바다에서 내가 주인이 될 수 없었던 전쟁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나라를 위해 죽음도 아깝지 않겠다던 한 인물이 죽음으로도 얻을 수 없는 삶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느꼈던 절망감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전쟁이 끝난 바다는 철따라 꽃이 피어나고 있다. 무숫잎이 시퍼렇게 솟아올랐다가도 햇살이 수면 위로 쏟아지는 대낮에는 섬양지꽃이 물이랑마다 만발하다. 그 바다에 풍덩 빠져서 수초에 몸이 감기는 감미로움, 그것은 생각만 해도 평화, 그 자체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정체모를 배 한 척이 육중하게 돌아다닌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것이 설령 이 바다를 지킬 평화선이라 해도 왠지 불안하다. 섬사람들이 노란 깃발을 세우고, 붉은 찬송가를 부르는 날이 잦아졌다. 내 바다에서 노를 젓지 못하리라는 예감이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다. 임진년 그 해에 해남, 강진, 장흥, 보성, 승주, 고흥의 백성들이 가을걷이를 하지 못한 채 보따리를 쌌듯, 오늘 우리도 노잣돈 없이 올레 밖을 나서야 할지 모른다. 사람 없는 마을마다 새떼들이 창궐하여 노을 속으로 날아가는 그림을 먼 훗날 역사책에서 보아야 할지 모른다. 그런 날은 제발… 오지 않으리라. 여기, 사람이 살고 있다. /강은미

 

 
▲ 시인 강은미.

 시인이자 글쓰기 강사인 강은미씨는 2010년 <현대시학>에서 ‘자벌레 보폭’ 외 4편으로 등단했습니다. 현재 제주대학교 창의력 글쓰기 지도자 과정 강의를 비롯해 NIE 전문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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