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곡의 신 자청비. <그림=홍진숙>

<김정숙의 제주신화> 18 자청비이야기②

문도령을 찾아 나선 길

그러나 박은 익어 가도 문도령은 돌아올 줄을 몰랐다. 답답한 자청비는 이웃집에 놀러갔다 와서는 공연히 심술을 부렸다.

“어머니, 옆집엔 마른 장작, 젖은 장작 겹겹이 쌓여 가는데, 우리 집 종 정수남이는 밥이나 처먹고 반찬이나 축내고 도대체 뭘 하는 것입니까?”

문도령한테서 소식 한 자 없으니 자기에게 심술을 내는 것이라 생각한 눈치 빠른 종, 정수남이가 능글거리며 말했다.

“아가씨, 쇠 아홉 마리 말 아홉 마리 준비해 주시면 산에 가서 십년 쓸 나무와 아가씨 시름 달랠 진달래꽃도 한 아름 해오겠습니다.”

정수남이는 산에 올라 잠만 자면서, 소 아홉, 말 아홉을 다 잡아먹고 내려왔다. 그리고는 삼천궁녀들과 놀고 있는 문도령을 구경하다 보니 쇠 아홉 마리, 말 아홉 마리 다 도망가 버렸다고 문도령 핑계를 대었다.

문도령이 절세미인들과 놀고 있더라는 말을 듣는 순간 자청비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문도령을 본 거기가 어디냐? 내가 가면 볼 수 있을 거냐?”
“아가씬 걸어 못 갑니다. 말 타고 가야 합니다.”
“그래, 말 준비하마.”
“점심도 단단히 준비하고 가야 합니다.”
“그래 네가 시키는 대로 다 하마.”  
“제가, 가는 길, 올 때를 잘 알아 두었습니다. 모레 사‧오시에 또 오겠다고 합디다.”


자청비를 겁탈하려는 정수남과 그녀의 지혜

자청비는 정수남이를 따라 점심을 차리고 굴미굴산에 올라갔다. 정수남이는 말이 날뛸지도 모르니 우선은 자기가 타야 한다고 하면서 자청비에게 짐을 짊어지게 하고는, 가시덤불만 이리 저리 끌고 다니며 온 산을 두루 헤매게 했다.
험한 숲 속을 한나절동안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헤맨 자청비는 목이 빠짝 말랐다.
“어디 물 있는데 좀 가르쳐다오.”
 
정수남이는 물이 먹고 싶다는 자청비에게, 이 물은 개구리 오줌 갈긴 물이라 먹지 못하고, 저 물은 지렁이 기어간 물이라 먹지 못한다 막으면서 점점 깊은 숲 속으로 데려갔다.
이윽고 어느 개울에 다다르자 정수남이는 옷을 활활 벗어던지고는 물가에 엎디어 물을 벌컥벌컥 마셔대면서 자청비에게 말했다.
 
“아가씨, 이 물은 예사 물이 아닙니다. 총각 죽은 물이니, 귀신 들지 않으려면 나처럼 깨끗한 몸으로, 옷도 다 벗고, 손발은 적시지 말고 거꾸로 엎디어 먹어야합니다.” 
목이 탈대로 탄 자청비는 할 수 없이 옷을 홀딱 벗고 엎디어 물을 먹었다.
정수남은 자청비의 옷을 높은 가지 위에, 여기 저기 휙휙 던져버렸다.
물을 다 먹은 자청비가 옷을 입으려 하니 옷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문도령에 대한 그리움으로 한층 야위어진 자청비의 벗은 몸을 보자 정수남이는 더 노골적으로 능글거렸다.
자청비는 정수남이에게 속았음을 알고, 꾀로 달랠 수밖에 없었다.
“정수남아 어서 내 옷을 가져다 다오.”
“아가씨, 옷 가져다주면 나한테 뭘 주겠소? 이리 옵서, 그 야들야들한 손이나 한번 잡아보게.”
“내 손목을 잡느니 내 방에 가면 금봉채가 있단다. 그게 훨씬 야들야들 하단다.”
“아가씨, 이리 옵서, 그 뽀얀 젖가슴이나 쪼금만 만져 보게.”
“내 젖을 만지느니 방에 은당병이 있단다. 그게 더 뽀얗고 곱단다.”
“아가씨, 이리 옵서, 달코롬한 입이나 한번 맞춰보게.”
“내 방에 가면 꿀단지가 있단다. 그게 훨씬 달단다.”
“아가씨, 이리 옵서, 나랑 한 번 같이 누워보게.”

▲ 오곡의 신 자청비. <그림=홍진숙>

다섯 구멍을 막으면 두 구멍을 빼고 - 그녀의 성의식

밤은 깊어가고, 더 이상은 몸은 몸대로 욕을 보고, 목숨도 죽게 생겼다 싶은 자청비가 말했다.
“그래, 오늘 밤 꽉 껴안고, 긴긴 밤 짧디 짧게 보내보자. 움막이나 짓고 자자.”

정수남은 야수처럼 할딱거리면서 움막을 지어갔다.
“정수남아, 움막에 구멍이 너무 뻥뻥 뚫여 있구나. 하늘이 보는데 어찌 벌거벗고 정을 통하겠느냐. 바깥에 나가서 숭숭 뚫린 구멍을 잘 막아라.”
정수남이는 바깥에서 열심히 구멍을 막기 시작했다.

정수남이가 밖에서 다섯 구멍을 막으면 자청비는 안에서 두 개를 빼고, 세 개를 막으면 두 개를 빼며 시간을 벌었다.

이것도 막아라, 저것도 막아라 하다 보니 먼동이 트고 날이 밝았다. 자청비는 지치고 악에 뻗쳐 살기등등한 정수남이를 달랬다.
“정수남아 너무 고생했다. 화만 내지 말고 이리 와서 은결 같은 내 허벅지에 누워라. 머리에 이나 잡아주마.”
정수남은 자청비의 옥같이 하얀 허벅지에 누웠다. 자청비가, 가늘고 흰 손으로 머리를 이리저리 헤집으며 이를 잡으니, 밤새도록 뛰어다닌 정수남이는 소르르 눈을 감고 드르렁 코를 골았다. 자청비는 이때다 하고, 청미래덩굴을 꺾어 왼쪽 귀에서 찌르고 오른쪽 귀로 빼내고, 오른쪽 귀로 찔러 왼쪽 귀로 빼내니 정수남이는 바들랑바들랑 거리다가 구름산에 얼음 녹듯 죽어버렸다.


머슴을 죽인 자청비, 머슴처럼 일하다

자청비는 말을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부모님께 종을 죽인 사연을 이야기했다.
“집안 망할 일이로구나. 하루 콩 석 섬 가는 힘 좋은 머슴을 죽이다니 당장 정수남이를 살려내라.”

부모님은 독설을 퍼부으며 넓은 밭에 좁쌀 씨를 닷 말 닷 되 뿌려 놓고, 그 좁쌀 씨를 하나 남김없이 주워 오라 했다. 눈에 진물이 나도록 좁쌀 씨를 찾았으나 딱 한 알만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여기 저기 기웃거려도 보이지 않아 단념을 하고 밭담을 넘는데 개미 한 마리가 그 좁쌀 한 알을 물고 바지런히 기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말 모른 벌레지만 정말 야속하구나.” 중얼거리던 자청비는 좁씨를 빼앗으며 개미허리를 발로 지끈 밟아주었다.
그때 난 법으로 개미허리는 홀쭉하고 가느다란 법이다. <계속> /김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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