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따로 또 같이’ 가꿔야 하는 공동체
가족, ‘따로 또 같이’ 가꿔야 하는 공동체
  • 강은미 (-)
  • 승인 2012.05.04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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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로 더해지는 초록빛 가로수길. 5월임을 느끼게 해준다. ⓒ강은미

<강은미의 문학카페> 10 우르스 비트머의 <어머니의 연인>, <아버지의 책>

▲ 날로 더해지는 초록빛 가로수길. 5월임을 느끼게 해준다. ⓒ강은미

5월이다. 바람은 온화해졌고, 살가워진 바람을 타고 민들레 홑씨들이 나풀나풀 날아다니고 있는 풍경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들도 어느 곳엔가 뿌리를 내려 민들레 가족 일가를 이룰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일 모레는 어린이날, 그리고 어버이날이 돌아온다. 서로 잊고 살다가도 이즈음이면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을 마련하느라고 마음이 부산스럽기도 하다.

특별히 어버이날이라 정해서 그런 연중행사를 하는 자체가 사실 조금 쑥스럽기도 하고, 한편 씁쓸하기도 하다. 가족이란 것이 아무 때나 보고 싶으면 볼 수 있어야 하고, 그 어떤 관계보다 진실과 사랑으로 맺어진 돈독한 우정의 관계여야 하는데 실상은 의무감처럼 무슨 날을 정해서 형식적인 의식을 치르게 되니 말이다.

가족이라고 해서 저절로 이해와 소통이 되고, 사랑의 감정이 싹트는 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가족은 그야말로 결혼과 혈연으로 맺어진 공동체라는 상징적 의미가 강하다. 정신적, 정서적 공동체라는 의미보다 물리적 공동체라는 의미가 강하다는 점에서는 많은 갈등을 야기할 수 있는 잠재적 위험을 갖고 있다.

무조건적 애정이 영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건 신 이외의 대상에게 적용 불가능하다. 즉 가족도 진정한 의미의 정신적, 정서적 공동체를 이루고 싶다면 많은 대화와 경험의 확대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개인을 경쟁의 구도로 몰아넣으면서 정신적 여유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아 가고 있다. 그러면서 행복한 가족을 만들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끊임없이 주입하는 모순된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게 사실이다.

스위스 최고의 작가 우르스 비트머의 자전적 소설, 『어머니의 연인』, 『아버지의 책』을 한꺼번에 내리 다 읽었다. 유명 작가의 가족은 어떠하였는지 궁금하기도 하였고, 나이 예순이 넘어서야 부모로부터 받은 고통을 편안하게 얘기할 수 있었다는 작가의 말이 두 권의 책에 대한 흥미를 자극하기도 하였다. 우르스 비트머는 스위스 바젤 출신의 소설가로 『푸른 사이먼』, 『정상의 개들』 등 정치성 짙으면서 사회비판적인 작품을 세상에 내놓아 호평을 받은바 있고, 베르톨트 브레히트 상 등 영예로운 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어머니의 연인』,『아버지의 책』에서 작가는 아버지 아닌 다른 남자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어머니, 책과 작품 활동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던 이상주의자, 아버지의 일생을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면서 담담하게 재구성해낸 소설이다. 각각의 낱권만 봤을 때는 알아차리지 못할 가족사를 전체적인 구도 속에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정말 의미 있는 독서 경험이었다.

“오늘 내 어머니의 연인이 죽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어머니의 연인』은 평생 아버지 아닌 다른 남자를 지독하게 사랑했던 어머니의 이야기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고아가 된 어머니는 에트빈이라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 야망으로 가득 찬 가난한 청년을 사랑한다. 에트빈의 연주회 일원이 되어 어머니는 물심양면으로 봉사하고 헌신하고 사랑한다. 하지만 에트빈은 한마디 변명도 없이 돈 많은 여자와 결혼하고 만다. 에트빈이 결혼하고 한 달 후 어머니 클라라도 아버지 카를을 만나 결혼한다. 

아버지 카를과 결혼한 어머니 클라라는 여느 주부처럼 사랑 많고 온순하고 가정적인 현모양처인 듯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 속에는 해결되지 않은 옛사랑이 괴물처럼 꿈틀댔고, 온 몸의 세포 구석구석에 잃어버린 이름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에트빈, 에트빈, 에트빈……. 새들도, 물소리도, 바람도 에트빈을 노래했다.

아이를 낳았다. 기뻐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기쁜 감정을 불러오지는 못했다. 남편과의 사랑도 처음에는 열정적인 듯하였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알 수 없는 우울이 그녀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일부러라도 즐거움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정원 가꾸는 일에 거의 미친 듯이 몰입하기도 하고, 아이를 돌보고, 남편을 내조하는 일, 손님을 초대하고 맛있는 음식을 내놓는 일에도 정성을 기울여본다.

하지만 그녀에게 계속되는 것은 살갗에 박힌 에트빈에 대한 환상이며, 죽음에 대한 몽상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자신이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있는 대로 다 떠올린 후 그것을 반복하곤 했다. 광에 있는 쥐약 마시기, 부엌칼로 동맥 자르기, 알약을 한꺼번에 삼키고 남은 위스키를 다 마신 후 눈이 내리는 바깥으로 나가서 호두나무 아래 눕기, 끓는 물 속에 눕기, 호수에 들어가 이번에는 멈추지 않고 돌도 내려놓지 않기 등등 생각만 해도 끔찍한 몽상이었다. 물론 아이도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멀쩡한 반미치광이처럼. 그 사실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한 가족이 같이 살면서도 말이다. 결국 어머니가 여든 한 살이 된 해, 그녀는 한 호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자발적 죽음이었다.

그럼, 아버지는 어떠하였을까. 아버지는 평범한 남자였다. 여느 남학생들처럼 여학생을 쫓아다니고, 그러다 차이기도 하고. 하지만 아버지의 가족에게는 아주 의미 있는 풍습이 있었다. 그것은 태어나자마자 관 하나를 선물로 받는다는 것이며 백서 한 권을 평생 채워야 한다는 의무이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작가의 아버지도 백서 한 권을 선물로 받고, 받은 그날부터 매일 그곳에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죽기 전에는 아무도 그 백서를 볼 수 없다. 그야말로 평생 비밀 자서전 한 권을 완성하고 죽어야 한다는 얘기다.

아버지는 꽤 성실히 백서를 완성해 나갔다.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부터 상처받은 이야기까지. 어머니와의 결혼은 우연을 인연이라 의미부여하면서 꽤 행복하게 시작하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이상적인 욕망이 많은 남자였다. 한때는 공산주의자였고, 그 당시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만나서 음악과 미술, 문학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를 좋아했다. 교사가 된 후, 학생들에게 그림책을 가지고 마음껏 상상하기 수업을 하였다가 공산주의적 이념을 주입하려고 했다면서 해고통지를 받기도 하였다. 술을 늦게까지 마시는 날도 꽤 있었다.

그때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다투었다. 돈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교사를 하면서 벌어들이는 수입은 집세 정도 낼 수 있는 벌이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현실에 맞지 않은 소비를 하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가끔씩 아내와 아이를 위해 선물도 사오고, 꽃다발도 사올 줄 아는 낭만주의자였다.

하지만 아내는 그런 선물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가 사다 준 앨범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아버지의 소비 품목은 주로 책과 앨범, 술, 꽃다발, 장난감 사기 등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카를을 현실감 없는 남자라 생각했다. 같이 있는 시간이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가 죽는 날도 작가와 어머니는 “오늘은 나가지 말라.”고 부탁하는 아버지의 말을 거절하고 공연을 보러 나갔다. 그렇게 아버지는 죽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아버지가 남긴 백서를 통해 작가가 확인한 사실이다. 

 작품 속 책갈피...

           
   

아버지는 타자기를 한 대 가지고 있었는데, 오른손 검지 하나만을 이용하여 굉장히 빠른 속도로 타자를 쳤다. 그는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반드시 펜대와 수정액을 손에 들고 검은 가죽 책에 무언가를 썼다. 여행 중이든 새벽까지 계속된 파티가 끝나고 난 후이든 마찬가지였다. 그 책은 2절판 크기로 원래는 빈 노트였는데 그동안 그의 글로 거의 다 채워졌다. 그는 50년 전부터 이 책에 글을 써왔다. 그 일은 일종의 사명과도 같았다.

(중략)

내가 딱 한 번 그게 무슨 내용을 적고 있는지를 물었던 적이 있다. “내 인생의 책이란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방에 들어가면 아버지는 “사탕 하나 먹어라.”라고 말하곤 했다. 단것을 한참 좋아할 나이가 지난 지 오래인데도 그는 항상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 나는 책상의 맨 아래 서랍을 열고 커다란 유리그릇에서 딸기 사탕이나 레몬 사탕을 꺼냈다. 아버지는 계속 무언가를 쓰면서 나를 바라봤다.

한 작가의 자서전적 가족사를 소설로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는 이런 가족사가 자신에게 알지 못하는 상처가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최선을 다해 산 사람이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착한 여자였다. 그런데 왜 작가는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 것일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두 남녀는 가족을 이뤄 살았지만 진실로 서로를 잘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숨겨진 사랑을 알지 못했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이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서로는 늘 빗나갔다.

어머니는 순수와 교양으로 화장을 한 채 우울과 몽상으로 평생을 스스로 갈구었고, 아버지는 대책 없는 낙관성과 과도한 이상에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늘 비난과 몰이해에 시달려야 했다. 그 사이에서 아들인 우르스 비트머는 진득한 애착을 형성하지 못하고 늘 방황과 우울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 정서 위에 유머와 위트가 흘러넘치는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는 것은 아버지의 대책 없는 긍정성도 물려받은 것 같다. 또한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최고의 선물, 그것은 책과 음악앨범, 그리고 사람이었다. 어머니도, 작가도 모르는 많은 예술인들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장례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축제 같았다. 생전의 모습 그대로 그의 장례식도 유쾌한 의식으로 치러졌다. 물론 갚아야 할 청구서도 있었다.

작가는 예순이 넘어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한 개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불길한 기운이 감돌 때는 당연히 자식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원망하게 된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늘 곁에 있는 사람이고, 아버지는 늘 밖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성숙한 인간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것은 가족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한국사회의 정서로는 가족 구성원을 한 개인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아직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자를 타자로 인식할 때 존중감이 생긴다. 가족은 소유물도 아니며 내 안위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노예도 아니다. 희생을 강요하는 건 일종의 폭력이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 할지라도 한 개인으로서 존중하고, 함께하려고 할 때 가족은 사랑과 꿈의 공동체가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면 굳이 어버이날이기 때문에 챙겨야 한다는 부담감 또는 의무감 같은 것도 사라질 것이다. 어버이날이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만날 수 있으며, 언제든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게 가족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최고의 사랑은 우정이라는 니체의 말을 생각한다. /강은미

 
▲ 시인 강은미.

 시인이자 글쓰기 강사인 강은미씨는 2010년 <현대시학>에서 ‘자벌레 보폭’ 외 4편으로 등단했습니다. 현재 제주대학교 창의력 글쓰기 지도자 과정 강의를 비롯해 NIE 전문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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