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미의 문학카페 > 11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며느리에게나 보낸다는 봄 햇살이 제법 따갑다. 멀리서 바라보는 5월의 바다는 옥쟁반에 은어 떼를 풀어 논 것처럼 사운대며 반짝거린다. 바다에 은어 떼가 살리는 없지만 바다로 부서지며 수면을 비집고 들어가는 햇살은 과연 숙련된 요리사의 회 뜨는 솜씨와 흡사하다. 이런 날 세상사 다 잊고 한나절 바위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바다나 바라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벌겋게 달아오르는 낯빛 아래로 검게 번지는 기미 따윈 나중에 고민할 일이고…….

올해 초의 다짐 중 하나는 내 책꽂이에 꽂힌 오래된 책을 다시 한 번 읽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외도를 하고 말았다. 오래된 책이 있음에도 신간 도서를 하나 구입하게 되었는데, 영어 원본을 덤으로 준다는 꼬임에 그만 넘어가고 말았다. 그 책이 바로 「노인과 바다」다. 학창 시절에 누구나 한 번쯤은 원본으로 된 책을 읽어보겠노라고 시도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번역본보다 원본을 읽었을 때 그 감동이 배가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아직도 생각나는 빨간 표지의 영어로 된 '왕자와 거지', 아마도 시사영어사에서 나온 책이라고 기억하는데, 대체로 이야기는 'Once upon a time~'로 시작하지 않았을까. 그냥 웃자고 하는 얘기다.

「노인과 바다」는 1952년에 헤밍웨이가 발표한 중편 소설이다. 헤밍웨이는 이 작품을 2백 번이나 고치는 심혈을 기울였다고 하는데, 그로 인해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받는 영광을 안는다. 이야기는 그야말로 건조하다. 84일 간이나 고기를 못 잡은 늙은 어부가 거대한 물고기를 사투 끝에 잡았으나 돌아오는 도중에 상어 떼를 만나 항구에 닿았을 때 고기는 뼈만 남아 있었다는 내용으로 요약될 수 있다.

산티아고 노인은 84일 만에 큰 고기(청새치)를 겨우 잡았다. 노인이 물고기를 끌고 가는 것인지, 물고기가 노인의 배를 끌고 가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물고기의 크기는 거대했다. 둘은 친구이기도 하고 적이기도 하고, 서로의 계획을 은밀히 공유하며 물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친구도 생존 앞에서는 적이 될 수밖에 없는 법, "물고기야, 넌 어쨌든 죽어야 하는 운명이야. 그렇다고 나까지 죽여야 하겠냐?"라고 말하는 노인의 표정에는 동지를 배신할 수밖에 없는 미안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84일 만에 처음 얻은 행운인데, 네가 좀 봐주라. 너도 그동안 많이 죽였잖냐?'는 노인의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먹고 먹히는 중첩된 모순들로 일렁이는 바다는 그 누구에게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제 뱃머리를 돌려 집으로 돌아가면 참으로 오랜만에 따뜻한 저녁을 먹을 수 있을 텐데……. 사방이 적이다. 물고기의 피 냄새를 따라 추격해오는 상어 떼, 줄과 칼, 키를 빼앗기고도 싸움은 끝나지 않고, 700kg이나 되는 육중한 물고기가 너덜너덜할 때까지 고투는 이어졌다. 간신히 배가 포구에 닿았을 때는 5.5m의 뼈대만 남은 물고기와 입안에서 구린내가 나는 노인이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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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사람이 매일 달을 죽이려고 애써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노인은 생각했다. 달은 도망쳐 버리고 말겠지. 그것도 그렇지만 만약 사람이 매일 태양을 죽이려고 애써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태어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지. 노인은 생각했다. 그러다가 노인은 먹은 게 아무것도 없는 그 커다란 물고기가 불쌍해졌다. 그렇지만 이런 연민에도 물고기를 죽이겠다는 결심은 약해지지 않았다. 놈을 잡으면 몇 사람이나 먹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사람들이 놈을 먹을 만한 자격이 있을까? 없지. 물론 없고말고. 놈의 행동거지와 대단한 위엄을 생각할 때 놈을 먹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중략)

노인은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기슭 꼭대기에 이르러 그는 넘어졌다. 돛대를 어깨에 걸쳐놓은 채 그는 얼마 동안 누워 있었다. 다시 일어나려고 해봤자 너무 힘들었다. 돛대를 어깨에 걸친 채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길을 바라보았다. 고양이 한 마리가 뭔가 일이 있는 듯 길 저편에서 바삐 지나갔고 노인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길을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He started to clibm again and at the top he fell and lay for some time with the mast across time across his shoulder. He tried to get up. But it was too difficult and he sat there with the mast on his shoulder and looked at the road. A cat passed on the far side going about its business and the old man watched it. Then he just watched the road.

내 기억으로는 이렇게 지루한 책이 없었다. 평론가 김윤식 교수의 표현대로라면 "고전은 지루하기가 무지막지해서 이 책 한 권만 읽고 다시는 안 읽을래." 하고 마음먹게 된다는 그런 책들의 대표작처럼 읽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다시 읽으니 이처럼 '담담한 아름다움'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왜 작가가 2백번이나 고쳤는지 이제야 알겠다. 어쩌면 '산다는 것이 망망대해에 혼자 버려져서 끝내는 뼈만 남은 물고기를 끌어안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의 문장에도 뼈가 다 발라진 채 푸른 눈빛만 살아있다.

"나는 인간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또 얼마나 견뎌 낼 수 있는지 놈에게 보여주고 말겠어." 노인은 그렇게 자주 되뇌었다. 가진 건 늙은 육신과 배 한 척뿐이지만 그는 바다를 거느렸고, 물고기 떼와 동지가 되었다가, 적이 되었다가, 그러며 지냈다. 84일 동안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는 바다에 나갔고, 흔들리는 파도에 몸을 누인 채 별을 헤고, 양키스 야구단 스코어를 궁금해 하고, 날아가는 새의 궁둥이에 휘파람을 불어주고, 그렇게 농담반 진담반 생을 즐길 따름이었다. 그밖에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싶다. 그는 진정한 '호모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다행스러운 일은 그에게 진정한 우정을 아는 마놀린이라는 어린 친구가 하나 있었다. "제가 살아있는 한 할아버지가 끼니를 거르고 고기 잡는 일은 없을 거예요." 이 얼마나 가슴 먹먹해지는 사랑의 표현인가. 이런 친구 하나 있다면 인생은 살만하지 않겠는가.

노인이 긴 항해를 끝내고 돌아와 오두막에 누워 있을 때, 소년은 매일처럼 들러 노인의 두 손을 보고 울기 시작했다. 오두막을 나와 커피를 가지러 가면서도 내내 울었다. 사람들이 오두막을 들여다보겠노라고 했을 때, "고단하게 자고 있는 할아버지를 깨우지 마세요."라며 또 울었다. "나는 운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노인이 힘없이 말할 때, "운은 내가 가져올게요."라고 소년은 씩씩하게 말했다. 집을 나와 신문과 약을 구하러 길을 내려가면서도 소년은 다시 또 울었다. 독자인 나도 반질반질 닳은 산호암 길을 따라 내려가는 소년을 좇아 울었다.

나는 이런 우정을 본 적이 없다. 나이 차를 불문하고, 가족이 대신할 수 없는 깊은 신뢰와 믿음, 사랑을 그들은 보여주었다. 인생의 긴 항해 끝에 지친 몸으로 돌아와 "보고 싶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이, 그것이 나는 최고의 우정이며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헤밍웨이는 어쩌면 그 말을 하고 싶었지 않았을까. 숱한 사고와 숱한 염문 속에 생을 파란만장하게 살았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을까. 그런 사람 하나 만나려고 우리는 생을 돌고 돌며 뼈만 남은 채 돌아오는 건 아닌지. 햇살 아래 고양이 한 마리 꾸물거리며 지나가고 있다. 길 위에 고양이의 눈빛이 푸르게 부서진다.

 
▲ 시인 강은미.

 시인이자 글쓰기 강사인 강은미씨는 2010년 <현대시학>에서 ‘자벌레 보폭’ 외 4편으로 등단했습니다. 현재 제주대학교 창의력 글쓰기 지도자 과정 강의를 비롯해 NIE 전문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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