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욱의 지질기행> 14 기후변동의 기록을 간직한 하논 습지퇴적층

▲ 하논분화구

여름의 문턱이다. 자연이 왕성한 생명력을 과시하기 시작하여 대지는 온통 초록으로 뒤덮였다. 살아 불끈 거리는 생명들을 통해 곡식을 생산해야할 농민들은 이시기가 가장 분주하다.

비가 갠 뒤에 하논을 찾았다. 하논 분화구는 서귀포 호근동과 서홍동 경계에 분포하는데, 분화구의 직경이 1,000~1,150m, 분화구의 깊이가 최대 90m에 이르러 제주도내에 분포하는 분화구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분화구 습지를 논으로 개척한 곳

자연은 일찍이 물과 불을 빚아 서귀포 해안 가까운 곳에 이처럼 거대한 분화구를 만들었다.그리고 오랜 세월에 거치는 동안 이 거대한 분화구는 바닥이 판판한 습지로 변했는데, 사람들이 습지를 개척하니 농사를 짓을 수 있었다. 지금도 분화구의 바닥 습지에는 논농사가 이뤄지고 있고, 분화구 안쪽 사면에는 귤나무를 심어서 재배한다.

▲ 하논 바닥이다. 최근에 농민이 모내기를 하기 위한 준비를 마친 것으로 보인다.
▲ 하논 분화구 안쪽 사면에는 작은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주 보이는 사찰은 봉림사이다.

'일강정'이란 말이 있듯이, 과거 제주에 논이 있는 마을로는 강정을 제일로 쳤다. 그런데 하논 분화구는 강정마을보다도 더 일찍 논농사가 이뤄진 곳이다. 현재 하논은 제주도에서 논농사가 이루어지는 곳으로는 유일하다. 그 때문인지 논을 찾는 두루미, 백로들은 다 하논 분화구로 모여 든 듯, 분화구 안이 온통 하얀 새들로 가득하다. 다양한 습지 식물들이 초록을 뽐내는 들녘에 하얀 백로가 날개 짓을 하고, 그 너머에 봉림사라는 사찰이 자리 잡은 장면이란, 그 자체로 한 폭의 동양화다.

제주의 토지는 대부분 투수성이 높은 다공질 현무암위에 형성되었다. 흙이 물을 가두지 못하기 때문에 농사가 어려워 주민들은 늘 기근에 노출되었다. 그런데, 일찍이 거대한 분화구 안에 논을 만들고 쌀을 생산했다니, 제주섬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하논에 대한 기록은 1485년(성종 10년)에 발간된 <신동국여지승람>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당시 삼매양악(지금의 삼매봉)에 대해 기록하기를 '봉우리 안에 텅 비고 넓은 논이 있으며 그 크기가 수십 경(1경은 약 3천 평)에 이른다. 큰못(大池)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리고 1653년 이원진 목사가 펴낸 <탐라지>에는 하논을 '조연(藻淵)'이라고 부르며 '빈조(개구리밥)가 많기 때문에 조연이라 부르는데, 게가 있다. 나중에 동쪽을 뚫어서 물을 빼고 논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었다.

▲ 분화구 안쪽에서 지하수가 솟아나니 사람들은 논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하논분화구 안쪽에는 H자 모양의 수로를 따라 물이 흐른다. 왼쪽 오름은 삼매봉, 오른쪽에 보이는 오름은 보롬이오름이다.

▲ 분화구 안쪽 사면의 일부는 과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하논'은 '하다(많다 혹은 크다)'라는 고어와 '논'의 합성어로, '큰 논'이란 의미다. 1899년에 정의현의 토지를 조사한 문헌에서 호근대답(好近 大沓)이라는 명칭이 나오는데, 대답(對沓, )이 '하논'을 한자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제주에는 물영아리오름, 물장오리오름, 물찻오름 등 분화구 안에 물이 고여 습지를 이루는 화산체들이 여럿 있다. 하논의 옛 이름이 큰못(大池) 혹은 조연(藻淵)이었던 것을 보면, 이 분화구도 내부에 물이 고인 천연습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하논 분화구는 다른 분화구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바닥이 판판했다. 게다가 군데군데에서 끊임없이 지하수가 솟아났다. 지하수 덕분에 하논 분화구 안에서 사람들은 벼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이 분화구 중에서도 가장 많은 물이 솟는 샘은 분화구의 동북부에 있는데, 주민들은 이 샘을 '몰망수'라고 부른다. 이곳에서 농사를 짓는 주민들은 원형의 분화구 안에 H자 형의 수로를 만들어 필요한 물을 공급받는다.

하논 화산체는 약 40m 두께의 화구륜(분화구 테두리)으로 둘러싸여 있고, 분화구의 바닥은 화산체 밖의 평지보다도 낮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분화구 중앙에 보롬이오름 등 소규모 오름이 자리 잡고 있어서, 이중화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한편, 분화구 바닥에는 약 14m에 이르는 두터운 퇴적층이 존재하는데, 이 퇴적층이 신생대의 식생변화와 아울러 기후변화의 추이를 설명해주는 자료를 제공한다.

수성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분화구, 기후변동 역사 기록해 

하논 화산체가 화산활동을 시작한 것은 약 55,000년 전으로, 당시 이 일대는 해수면 보다 약 100m 정도 높은 내륙이었다. 화산활동 초기에는 마그마가 분출할 때 지하수와 접촉하며 대규모 수성분출이 이뤄졌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화산재와 스코리아가 분출한 후 주변에 쌓여 응회암으로 된 화구륜을 만들었다. 그리고 화구륜 혹은 그 밖의 원인이 지하수가 화구 안쪽으로 들어오는 것을 차단했다. 그러자 수성화산활동은 멈추고, 대신 용암분출로 이어졌는데 분화구내에 자리 잡은 보롬이오름은 용암분출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화산체 내부에 또 다른 화산체가 들어있기 때문에 '이중화산' 구조를 띠는 것이다.

▲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모습.
▲ 하논 습지의 퇴적층에는 기후변동 과정을 시시하는 증거가 남아 있다.

한편, 화산활동이 종결되자 서귀포층에 의해 떠받쳐진 지하수가 분화구 안에서 솟아나면서 분화구내에는 물이 고이기 시작했고, 화구호 안에 다양한 생물이 서식하면서 습지 생태계가 형성되었다. 학자들은 습지가 형성된 것은 약 10,000년 전 쯤이라고 추정한다. 습지생태계가 오랜 세월 유지된 결과, 유기물 퇴적층이 두텁게 쌓였다.

하논 퇴적층의 8m 하부 구간에서는 주로 초기 화산활동과 화구륜의 붕괴 과정에서 퇴적된 모래나 화산암 등이 주로 발견되는 반면에, 8m 상부에서는 유기물질이 풍부한 세립질 퇴적물이 주로 나타난다.

지난 2004년에 전남대 정철환 교수 등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하논 습지퇴적층에서는 깊이 2m를 경계로 상하부 시료에서 뚜렷한 차이가 나타났다. 2m 상부의 시료에서는 고란초과, 측백과, 주목과 등 따뜻하고 습윤한 기후를 좋아하는 식물의 꽃가루가 많이 발견된 반면에, 2m 하부에서는 국화과를 포함한 초본식물들이 점유율이 크게 증가했다. 이 초본물들이 한랭 건조한 기후에서 잘 자란다는 것을 감안하면, 약 12,000년 전에 진행된 빙하기에서 간빙기로의 기후변동이 이 퇴적층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장태욱

 
   
장태욱 시민기자는 1969년 남원읍 위미리에서 출생했다. 서귀고등학교를 거쳐 한국해양대학교 항해학과에 입학해  ‘사상의 은사’ 리영희 선생의 42년 후배가 됐다.  1992년 졸업 후 항해사 생활을 참 재미나게 했다. 인도네시아 낙후된 섬에서 의사 흉내를 내며 원주민들 치료해준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러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제주대학교 의예과 입학해 수료했다. 의지가 박약한 탓에 의사되기는 포기했다.  그 후 입시학원에서 아이들과 열심히 씨름하다 2005년에 <오마이뉴스>와 <제주의소리>에 시민기자로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2010년에 바람이 부는 망장포로 귀촌해 귤을 재배하며 지내다 갑자기 제주도 지질에 꽂혀 지질기행을 기획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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