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서거 3주기 기념토론...고희범 "특별법 제정에 한나라당이 단초"

 

▲ 2003년 10월 제주를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이 4.3과 관련해 과거 국가권력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DB>

서울에서 민주인사들이 분위기를 잡고, 한나라당이 단초를 제공하고, 김대중 대통령이 획기적 전기를 마련했으며, 노무현 대통령이 방점을 찍었다.

한국 현대사 최대 비극. 제주4.3특별법 제정과 그 이후의 과정을 고희범 전 한겨레신문 사장(제주포럼C 대표)은 이렇게 정리했다. 고 전 사장은 1997년 4월1일 서울 종로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출범한 '제주4.3 제50주년 기념사업 추진 범국민위원회' 공동대표를 지냈다.

본격적인 4.3특별법 제정 운동의 시작을 알린 범국민위원회는 2년 뒤인 1999년 '제주4.3 진상규명 명예회복 추진 범국민위원회'로 이름을 바꿨다.      

고 전 사장은 19일 오후 4.3평화공원 기념관에서 열린 노무현대통령 3주기 추모 학술토론회('제주4.3특별법과 사과, 그리고 위령제')에서 '4.3특별법 제정 및 위원회 구성 과정의 역할과 갈등'이란 주제 발표를 통해 특별법안을 먼저 발의한 것은 한나라당이었다고 회고했다.

1999년 11월18일 제주출신 변정일 의원이 동료의원 113명의 서명을 받아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는 것이다. 여당인 국민회의는 하루 전 4.3특별위원회 구성 결의안을 제출하는데 머물렀다. 

 

   

19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가 국회에 특위를 설치해 특별법을 제정하고, 명예회복과 보상을 통한 4.3문제 해결을 공약했지만 당 차원의 움직임은 오히려 한나라당보다 더뎠다.

고 전 사장은 이를 한참 잘못된 대응으로 규정했다. 이듬해(2000년) 봄 총선을 앞두고 이념논쟁의 선거구도로 가면 국민회의 쪽에 불리하다는 자체 분석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결국 4.3문제는 일단 국회 특위 구성으로 시간을 벌고, 총선 후 특별법 제정 여부를 판단한다는 전략이었다고 고 전 사장은 소개했다.

하지만 이미 국회에는 1996년 제주출신 변정일, 양정규, 현경대 의원의 주도로 여야 의원 151명이 발의한 4.3특위 구성 결의안이 계류돼 있었다. 국민회의가 그동안 이 결의안을 방치해온 셈이었다.

국민회의 내부의 이런 기류를 돌려세운 건 김대중 대통령의 지시. 청와대의 강력한 지시가 떨어지자 추미애 의원이 초안을 마련하고, 임채정 정책위 의장실이 중심이 돼 법안을 만들어 1999년 12월1일 국회에 제출했다.

국민회의 법안은 4.3의 기점을 1947년 3월1일로 잡았지만, 한나라당 법안은 1948년 4월3일이었다. 또 국민회의 안에는 한나라당 안에 없던 4.3평화인권재단 설립과 정부의 지원근거가 담겼다.

반면 국민회의 안은 한나라당 안에 있는 국가추념일 제정과 부당한 유죄판결을 받은 자에 대한 재심 규정이 없는 등 둘 다 일정한 한계를 지녔다.

특히 한나라당 안은 4.3의 정의를 '1948년 4월3일을 기점으로 제주도 전역에서 발생한 소요사태 및 그 진압과정을 말한다'고 규정해 논란의 불씨를 남겼지만, 특별법 제정에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한 점은 분명하다는게 고 전 사장의 평가다.   

이후 법 제정 과정에서도 갈등이 빚어졌지만 1999년 12월16일 제주4.3특별법은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했다. 2000년 1월11일에는 청와대에서 역사적인 법안 서명식이 열렸다. 각계 인사를 초청해 공개적인 서명식을 가진 김대중 대통령은 떨리는 목소리로 "제주4.3특별법은 인권이 그 어느 가치보다 우선되는 사회, 도도

히 흐르는 민주화의 도정에 금자탑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진상조사보고서는 2003년 10월 채택됐다.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에 의해 4.3을 재평가한 최초의 과거사 진상조사보고서였다. 보고서는 '국가공권력에 의해 피해를 입은 희생자와 그 유족을 위로하고 적절한 명예회복 조치를 취할 것'을 정부에 권고했다.

이에따라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10월 제주도를 방문해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 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정부 수립 이후 정부 차원의 첫 공식사과였다.

노 대통령은 2006년 4.3추모제에도 참석했다. 그때 다시한번 국가권력의 잘못을 사과했다.

고 전 사장은 "제주4.3에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떼낼 수 없는 분들"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4.3진상규명 요구를 공개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나, 제주의 각종 선거에서 공약으로 빠지지 않았던 것은 김대중 대통령 덕분이라고 했다. '4.3=빨갱이'라는 생각이 지배했던 1987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는 정적들의 공격무기가 될 줄 뻔히 알면서도 그 불온(?)한 공약을 했다.

고 전 사장은 특별법 제정과 정부의 진상조사보고서 작성, 대통령의 사과가 있고 난 뒤에도 역사를 되돌리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계속됐다고 비교적 최근의 일을 떠올렸다.

그는 "우리에게 4.3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고 스스로 묻고는 "과거사를 규명하고자 한 것은 단순히 잘잘못을 가리자는 것이 아니었다. 좌우를 떠나 4.3의 진상을 규명함으로써 과거를 기억하고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4.3은 영예가 됐든, 권력이 됐든 다른 목적에 이용돼선

안된다. 4.3의 역사, 진상규명의 역사를 욕되게 하는 것이어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또 "오로지 4.3은 전 세계를 향해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선포하는 살아있는 목소리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주의소리>

<김성진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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