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주의 경제칼럼> 유로존의 바람직한 진화(進化)

주위에서는 뭐라고 말하던 스페인의 라호이 총리는 이번의 초대형 구제금융 협상을 스페인의 승리로 치부하려 한다. 앞서 구제금융을 받았던 아일랜드 포르투갈 그리스 3국의 경우와는 달리 자국의 살림살이에 대한 외부간섭을 받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비율(정부부채/GDP) 면에서 스페인은 이들 세 나라는 물론 영국이나, 프랑스, 심지어 독일보다도 양호하다. 문제는 은행이다. 6월 8일 IMF가 공개한 '스페인 금융시스템 안정성 평가보고서'는 최대한 불리한 환경을 가정해 스페인 은행들이 필요로 하는 금액을 371억유로로 추산했다.

즉 스페인 경제가 금년과 내년에 걸쳐 합계 5.7%의 마이너스 성장을 하며 집값도 24% 더 하락한다고 보았을 때 국제금융감독기구인 바젤 위원회의 '바젤 III' 기준(다른 나라들은 2018년 이후에 준수하면 되는 기준)에 부합하는 적정 자본비율을 맞추려면 그만큼 자본금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정권-금융 유착이 스페인 저축은행 부실 키워

그런데도 1000억유로라는 금액이 이야기되고 있는 이유는 필요 이상의 충분한 무기를 가지고 있음을 시장에 보여 주어 불안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2007년까지 건설과 부동산은 스페인을 먹여 살리는 효자 중의 효자였다. 국내총생산의 16%, 전국 고용의 12%를 이 부문이 짊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독일 일간지 디 벨트(Die Welt)는 "이런 추세라면 스페인의 일인당 국민소득이 2011년에 독일을 따라잡을 것"이라는 성급한 보도를 내기도 했다.

부동산 버블의 붕괴가 더 큰 파국을 부른 배경에는 스페인의 정금유착(政金癒着)이 있었다. 스페인의 저축은행들은 대부분 지방정부에 의해 설립, 운영되어 왔는데 초기에는 지역주민들의 저축을 장려한다는 설립목적에 부응하면서 영업범위도 해당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유로존에 가입한 이후는 낮은 금리로 풍부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되자 정작 설립목적인 저축은 외면하고 대형 부동산 사업을 지원하는 창구역할을 도맡게 되었다.

거기에다 국회의원 등 많은 정치인들이 개인적으로 주택건설업에 투자하거나 투기목적으로 10여 채의 주택을 소유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고 이에 필요한 자금을 은행으로부터 차입하는 등 정치와 금융의 이해관계가 서로 유착되었다. 부실은행들에 대한 구조조정은 작은 부실은행들을 통합하여 큰 부실은행을 만드는 것이 고작이었다.

스페인 사태는 유럽 여러 나라가 단일통화 채택 후 10여년이 지나면서 봉착한 하나의 진화과정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이상적으로는 통화연합의 자연스러운 다음 단계는 재정연합일 터이나 이는 개별국가의 입장에서는 재정주권의 포기를 의미한다. 이에는 국민적 저항이 따른다. 따라서 그 중간 단계가 은행연합으로서 각국 주요 은행 감독권을 중앙기구에 양도하는 것이다.

스페인은 이번 구제금융 자금을 정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스페인 은행에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 대신 스페인 은행에 대한 감독주권을 유럽집행원회 산하의 통합기구에 이양하는 것을 제안했다. 유럽집행위원회는 2018년을 목표 시점으로 은행연합(Banking Union)을 창설할 것을 이달 말 유럽정상회의에 제안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되면 대형은행 부실시 유럽안정기구(ESM)가 해당국 정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뛰어들 수 있게 된다.

은행연합 창설을 준비하는 유로존

▲ 김국주 前 제주은행장. ⓒ제주의소리

은행연합 다음으로 재정연합까지 이루게 되면 '유로본드'(유로존 모든 회원국의 연대보증 하에 채권을 발행하여 회원국들의 필요에 충당하자는 것. 이 때 각 회원국들은 자국 재정 감독권을 재정연합 기구에 양도)의 논리적 타당성이 자리잡을 것이다. 유로존의 진화가 거기에까지 미칠지 아니면 그 이전에 중도 하차할지 누구도 예단하지 못하는 가운데 글로벌경제에 드리운 조울증(躁鬱症)은 나날이 심해지는 양상이다.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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