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제주한라윈드앙상블 지휘자 김승택

1935년 일본 오사카 출생. 식량마저 통제되던 일제강점기 말, 오사카 쓰루하시 역에서 야쿠자의 보호(?)를 받으면서 빵을 팔던 대담한 소년. 그는 우마상(牛馬商)을 하던 부모님처럼 상인이 되려고 했으나 오현중ㆍ고등학교, 서울대 부설 중등교원양성소를 졸업한 후 음악교사가 되었다. 그는 17년간 몸담았던 교직을 떠난 후 자영업을 하다가 코카콜라 영업이사 등을 거쳐 시민밴드 한라윈드앙상블 음악감독 겸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한라윈드 로고를 만들고, 20년간 음악감독 겸 지휘자로 오늘의 한라윈드를 있게 한 사람. 제주 음악계의 원로인 그를 만났다.

▲ 1954년 오현고 음악관에서 열린 '오돌독' 작곡 발표회.

▲ 음악과의 인연은?

오현고등학교 2학년 때(1952년)이던 9월 21일, 개교기념일(9월 25일)에 출품할 그림을 오현단에서 그리고 있는데, 고봉식 선생님이 불러서 가보니 미국 군인(길버트)이 와서 플라스틱 신호나팔 4개를 가지고 왔대. 플라스틱이 뭔 줄 모를 때. 안 불어봤으니 소리가 나야지, 그걸로 끝인 줄 알았지. 그런데 일주일에 한 번 길버트 씨가 학교에 와서 밴드 활동을 도왔어. 그때는 악기 하나에 2~3명이 돌아가면서 불었지. 난 클라리넷 파트였는데, 4명이 악기 하나를 놓고 매일 돌아가면서 불었어. 그때 연습했던 곡들이 초보자들이 부는 행진곡, 에튀드가 11번까지 있는 간단한 곡 악보집을 갖고 와서 연습했지.

▲ 오현고 밴드 하면 진주 개천예술제와 인연을 빼놓을 수 없을 텐데요.
그 해 오현고 밴드가 창단되고 1년 뒤 개천예술제에 참가했는데, 당시 이름이 영남예술제였지. 영남예술제는 음력으로 10월 3일 개천절에 열렸는데, 11월에 진주 가니 막 춥데. 남강가에 살얼음도 끼고 아침엔 서리도 내렸지. 학생 시절부터 개천예술제에 15번 참가했어. 모두 최우수상.
길버트 씨가 악기와 악보를 갖다 주었지만, 실제로 실력을 연마토록 해서 수준을 높여준 이는 제1훈련소 박은제 이등상사. 박 상사는 전남 무안 사람이고, 그때 제1훈련소 군악대장이 강봉원 대위인데 이 사람이 진주 출신이라. 강 대위는 일본 중앙대학 출신 음대에서 피아노 전공한 사람인데, 진주에서 열리는 영남예술제 콩쿠르에 참가하라는 거라. 강 대위가 박 상사를 제주시에 파견해서 밴드를 연습시켰어. 훈련소에서 빌악보를 빌려 연습한 곡은  ‘페르시안 마켓’. 클라리넷 파트가 힘든 곡이지. 그레이드 3 되겠나, 나머지는 2. 보통 관악곡 수준을 말할 때 별 넷은 어려운 거, 심포닉 밴드 수준. 3개는 콘서트 밴드, 2개면 일반 밴드, 하나는 초보. 당시 통행금지가 있을 땐데 밤새면서 음악관에서 연습했어.
그때 처음 스코어를 만들었네. 보통 파트보 만들고 스코어로 만들어. 그 일을 지금도 하고 있어.

▲ 음대에 간 것도 밴드 활동 때문인가요?
고3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재수를 안 할 수가 없었어. 재수하면서도 오현고 음악관에 가서 연습을 시켰네. 그때도 영남예술제 갔거든, 연주곡 ‘경기병’ 연습시키고 지휘도 했어.

그때는 다른 생각 안 나고 음악을 전공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어. 서울에서 고재식, 클라리넷 불었던 친구가 연락이 왔어. 서울대학교 음대 부설 중등교원양성소가 있는데, 문교부에서 전국에 음악교사가 모자라서 양성하는 코스다, 국비가 있어 실제 자기 부담은 얼마 되지 않는다, 신흥대학(지금 경희대학교) 등록금이 1만 환일 때, 서울 음대 중등교원양성소는 3천1백 환이다, 졸업 후 6년간 근무해야 한다고. 오케이 했지.

당시 서울에서 제주도 오는 것 교통비 실비만 2천1백 환 정도 들 때니. 서울 교통비 편도에 1천 환만 보태면 등록금이 됐지. 그때는 서울에서 야간 호남선 10시40분 기차 타면 아침 7시에 목포 도착했어. 오후 4시 목포 배 떠나고, 만일 배가 떠나지 못하면, 하룻밤 거기서 자야 했지. 숙박비 없으니까 ‘조천할망네’ 갔지. 조천할망네 집은 제주도지사부터 나까지 제주 사람들의 목포 경유지. 할망 집이 동산에 있었는데, 물도 긷고 장작도 패고, 서울서 올 때 신입생들 데려다주고 조천하숙집에 알선도 해주고. 나는 (숙박비) 공짜. 돈 있는 사람들은 아침 9시에 떠나는 태극호 타고 서울 가고, 돈 없는 사람들은 야간열차 타고 가고.

오현고는 단과대학별로 1명씩 합격했어. 당시 서울법대는 3명이나 합격했어.

▲ 오현고 밴드부원 시절 김승택.

▲ 당시 제주에서 서울대 가는 사람이 많았나요.

▲ 대학 생활하면서도 오현고 밴드 지도했나요?
56년 대학에 들어간, 그 해 서울대 개교 10주년 전국 콩쿠르에 오현고 참가하기로 했는데, 방학 때 연습시키고 개학 하니까 서울에 올라와 있는데 편지가 왔어. “예산 없어 참가 못 하게 한다”고. 고3이었던 강경수 사장이. 화딱지가 나서 이렇게 좋은 기회, 왜냐하면 대학 은사인 이재옥 교수가 심사위원이고 전국 음악 콩쿠르 관악 부문(그때는 취주악) 직접 기획하고, 지정곡도 정한 분이고, 그래서 콩쿠르 요강 발표하니까 당장 찾아갔지.

이 교수한테 찾아가서 나 제주도 출신이다, 오현고등학교 이번에 참가하려고 한다, 지정곡이 뭐냐, ‘핀란디아’다, 악보 어디서 구하느냐, ‘대동상고’에 가면 구할 수 있다는 거라. 비 오는 날 대동상고에 갔는데 도로 포장이 안 돼서 신발이 막 범벅되고…. 하여튼 악보 갖다가 밤새 사보해서 그것을 보내 줬지. 이 교수가 레코드도 사서 보내 주라고 해서, 종로 입구에 있는 신신백화점에 가서 ‘핀란디아’ LP 음반 사서 보냈지.

그런데 얼마 후 제주에서 편지가 왔는데, 박박 소리만 나서 도무지 연습할 수 없다는 거라. LP판 돌릴 수 있는 전축이 없어서 SP판으로 하니까 앞이 전부 긁혀버린 거지. 그래서 소리가 안 난 거. 방학 때 내려와서 LP판 들을 수 있는 전축 갖고 있는 사람을 찾아갔지. 지방병무청장 원모 대령. 그 사람 집이 오현고 앞 법원장 관사랑 붙어 있었는데 거기에 가보니 포터블, LP 돌릴 수 있는 거 있대, 거기서 처음 들어봤네. 지정곡이 ‘핀란디아’니 자유곡은 ‘에그몬드’ 정도는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연습시켰지. 한라윈드에 와서 두 곡을 연주하면서 감회가 새로웠어.

참, 거기에도 에피소드가 있어. 경연 날이 9월 며칠이었는데 갑자기 대회에 못 온다는 연락이 온거라. 어머니가 대학입학 선물로 사준 파카61 만년필을 클래스메이트 여학생한테 팔아서 제주에 내려왔지. “무슨 소리냐, 이렇게 준비까지 됐는데, 안 보낼 거냐.” 결국 오현고 밴드를 데리고 서울로 가서 수송초등학교에 짐을 풀었어. 학교에서 잠자고 연습하고. 이 교수가 그 때 악보에 지휘법, 포인트가 되는 부분, 강조할 부분, 전부 적어 줬지. 그 악보가 지금도 오현고에 있어.

그때 준우승했는데, 이유는 간단했어. 우리에겐 팀파니가 없었다고. 그래도 이사장 황순하 씨가 좋아가지고 “이젠 어깨 펴서 다녀야겠다”며 다독여 주면서 대학 졸업하면 모교로 돌아오라고 했지.

▲ 대학 졸업할 때 되면 진로를 고민하게 되는데요.
이 교수는 경성전기 회사 밴드를 지도하고 있었는데, 자기가 못 나갈 땐 나 보고 대신 가서 연습시키라고 했지. 거기는 악보를 많이 갖고 있었어. 악보 사보도 하고, 이 교수가 악보 고치라고 메모해 주면 악보를 고쳐 줬어. 그렇게 하니까, 졸업할 때쯤 “너 제주에 내려가지 말고 대전공고에 가 있으면 내가 서울로 불러 줄 테니 경희대학에 편입하라.” 그때 경희대에 들어갔으면 1회 졸업생이 됐겠지.

▲ 교편은 오현고에서 시작했겠네요?
졸업 직전 12월부터 오현고 8회 졸업생을 가르쳤다고. 1957년에 들어가서 1961년 3월 결혼했지. 5․16혁명 나던 해. 그 후 중문중학교, 제주여고 갔다가 다시 오현고에 가서 사직 당했어. 오현고만 15년, 그러니 교사생활 17년.

▲ 음악 수업은 어떻게 진행했나요?
그때 인문고에서 음악시간은 변두리 과목. 그렇지만 동요라도 작곡시키려고 수업시간에 애를 썼지. 음악시간을 이론이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회에 나가 일생 동안 영향을 줄 수 있도록 만들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감상교육에 치중했다고. 제대로 된 곡 같은 것은 시간이 없어 못 했지만, 고전파부터 낭만파까지 중요한 작곡자의 대표적 소품 위주로 알 만한 곡을 중심으로 가르쳤네.
오현고 그만두니 김황수 교장이 중문중학교에 밴드를 만들어 달라 하더라고. 그래서 가보니 악기 12개가 있는데, 십수 년 지나도록 한 번도 수리 안 하고 치워 버렸지. 악기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어서 내가 이 악기로는 죽어버린 토스카니니가 살아나도 연주단체 만들 수 없다고 했지. 악기 고쳐 달라고 했더니 예산이 없다고 해서 자연히 밴드 활동은 못 했지.
중문중에 있는데 제주여고 이경수 교장이 오라고 해서 갔는데 여고엔 당시 밴드 없었어. 김평진 이사장이 직접 악기를 사 주겠다고 약속했었어.

▲ 1953년 7월 오현고 길버트음악관 낙성 후 기념사진.

▲ 다른 학교에서도 밴드 지도했나요?

▲ 밴드 하면 응원할 때 역할이 컸는데요.
나는 학교 때문에 밴드가 있는 거다, 불지 않을 때는 안 불지만 불어야 할 때는 온 힘을 다해 불어라. 응원할 때도 마찬가지. 경기 시작하면 절대 쉬지 않아. 상대 쪽에서 응원할 틈을 안 줬어. 산악부 학생에게 작은 칠판에 경기속보판을 만들어서 알려주게 했어. 그래서 전 경기를 실시간으로 알 수 있게 말이지. 경기할 때도 경기를 보지 말고 나를 보라고 했지. 몇 년 전 광양로터리 지나가는데 졸업생이 “선생님, ○회 졸업생입니다. 저 응원가 106회 불렀습니다.” 오고 다닐 때 응원가 100번 부른 것은 다반사.

여고 있을 때는 신성여고가 굉장히 의식을 많이 했지. 응원 연습하면 신고 교장 선생님이 와서 지켜볼 정도. 경기 이틀 전, 수업하지 않고 전 학생들에게 파라솔 가져 오라고 했지. 파라솔로 기를 죽여 놨지. 응원 종류별로 18가지, 변형 30여 가지나 했어.

▲ 교사로서 보람도 있었을 텐데 왜 그만두었나요?
오현고는 두 번 다 사정이 있었어. 자세히 말하기 곤란하지만, 교사로서 학교에 남아 있을수 없는 상황이 됐어. 서른아홉인가, 학교 정리했지. 그만둔 다음날 바로 다른 학교에서 오라는 연락을 받았어. 하지만 두 번 같은 경험하지 않겠다고 생각해서 자영업을 시작했지.

▲ 바로 코카콜라에서 일했나요?
아니, 음료 대리점도 하고 토산품점도 2년 하고, 그때 나도 고생했지만, 집사람도 고생했지. 그때 안전한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장사를 시작했지. 제대로 하려면 세일즈맨이 뭔지 알아야 할 거 아니. 그때 코카콜라 세일즈맨이 최고라고 해서 시험 보고 정식 직원으로 입사했어. 막 코카콜라가 알려지기 시작할 때. 코카콜라에서 9년 일하고 정년퇴직한 후 신진교통에 기획실장으로 들어갔지. 코카콜라의 제도를 신진교통에 정착시켜 달라고 해서 갔는데, 기름밥 먹는 사람한테 적용할 수가 없대. 13개월 근무했나.

▲ 산악부 활동도 하셨죠?
38선 이남에 제일 높은 산이 제주도에 있는데, 제주도 학교에 산악부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오현고 교사 시절 산악부를 창립했지. 서울법대와 자매결연해서 서울 인수봉, 설악산 등에서 함께 암벽등반했어.

▲ 그렇게 여유가 됐나요?
그땐 정말 부지런했어. 다른 선생님의 배 이상. 음악선생으로서 밴드, 산악부 활동, 청소년적십자활동 등. 내가 가는 학교는 항상 청소년 적십자활동 1등 했어. 오현고엔 적십자 예산이 있는데 제주여고에는 그런 예산이 없대. 예산 확보하기 위해 점심시간에 빵 장사 했어. ‘칠성통’에 빵집과 계약해서 매일 점심시간에 빵 팔았지. 그 수익금으로 적십자 활동했지. 신문도 한 달에 한 번 발간하고, 파월장병 가족 돕기 ‘꽃과 인형의 초대’ 행사도 다방에서 하고, 정말 부지런했지.

▲ 못 말리게 부지런해서 미움도 많이 받았겠는데요.
중문중에서 월급 받을 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대. 학교에 갔다 오면 할 일이 없어. 대신 중문중 1년 동안 도서관에 있는 책 80%를 읽었지. 거기서도 청소년 적십자 활동을 했지. 당시 학생들이 봉천수 마시고 있어서 석유통 6개 들어가는 리어카에 물통 싣고 매일 아침 중문 천제연에서 물 실어 와서 학생들에게 먹였어.  샘물 먹으니 얼마나 좋아. 중문중 앞이 중문초등학교였는데 거기 아이들이 손톱도 길고 때도 있고. 한 번은 학교에 말 안 하고 점심시간에 운동장에서 아이들 목욕시키고 옷 깁고 손톱 깎아 주고 하는데 난리가 났어. 선생이 이거 무슨 짓이냐고, 되레 교장한테 욕만 들었지.
문화방송 음악 감상 프로 진행했어. 일주일에 한 시간, 라디오 ‘일요명곡순례’. 코카콜라 다닐 때여서 이 방에 잘 오지 못했지. 그런데 일요일엔 모두 내 시간. 아침 8시부터 방송 듣고, 녹음하고. 꼼짝 않고 이 방에서 지내니 상당히 기분 났었는데.

▲ 1953년 11월 진주공원에서 열린 영남예술제에서 연주 중인 오현고 밴드.

▲ 자영업하면서도 음악은 계속했죠?

▲ 한라윈드 창단 소식은 언제 들었나.
양세훈 사장(한라윈드 초대 단장)이 왔어. 신진교통 다닐 때. 양 사장이 전화 연락도 없이 집에 찾아와서 “이렇게 그만두려 하느냐? 뭔가 해야 될 거 아니냐?” 그렇게 해서 이상철 선생과 연결해 주었어. 내가 그때 양 사장한테 물었지. “악기도 사야 할 건데 어떻게 할 거냐, 학교 악기, 악보 빌릴 거면 아예 하지 말라. 국가가 지원해도 될지 말지 한 일인데 개인이 할 수 있겠느냐”고. 그 후 양 단장이 나를 모시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오현고 음악관에 오라고 해서 나갔어. 그 걸로 한라윈드와 인연이 시작되었지. 양 단장이 준 1천만 원으로 악기랑 악보 사면서 창단 준비했지.

▲ 창단 연주회는 어떻게 했나요?
1993년 3월 발기하고, 5월 창단 연주회 했어. 1992년 한글 로고를 신진교통에서 내가 만들었으니까, 말 나온 지 얼마 안 됐지. 연습은 오현고 음악관, 그때부터 매주 2회 연습했어. 부족한 악기는 오현고에서 빌리고. 그런데 창단 연주회는 단원이 확보되지 않아 어렵게 했어. 멤버 80%가 오현고 출신. 창단일을 5월 1일로 정했는데, 발기인들이 반대했지만, 아직도 첫 연주일이 창단일이였어야 했다고 생각해.

▲ 연습실 문제로 고생 많으셨죠?
오현고 음악관에서 화북공단 창고, 제주종합경기장 수영장, 지금 코리아극장까지 참 많이 옮겨 다녔어. 창단 연주 후 오현고에서 나와서 화북공단에 300평짜리 창고로 옮겼는데, 소리도 좋고 분위기도 좋았어. 악기 보관에 대한 책임을 질 사람이 없어 불안해서 안 되더라, 그래서 몇 개월 하다 옮긴 것이 종합경기장 수영장 3층. 고민수 제주시장이 배려해 준 거지. 그곳에서도 몇 개월. 다음해 전국체육대회를 제주에서 하면서 수영장을 리모델링해야 된다고 해서 쫓겨났지. 수영장 천장이 오죽 높아? 1층 높이가 3층은 돼. 악기를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옮기는 것 정말 힘들대. 그렇게 하면서 오현고 출신이 걸러지기 시작하대. 오현고 출신 80%는 실은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특정 그룹이 주축이 되면 다른 그룹이 죽어버리니까, 절대 조직을 만드는 데 좋은 방법이 아니지.

그 다음 신제주 중국요리점 만리홍 건물로 갔어. 연습실이 지하 2층 주차장. 장마 오면 물이 들어서 밤중에 가봐야 했지만, 갈 때가 없어 몇 년 했는데, 단원이 고발해 버렸지. 주차장에서 연습하고 있다고, 72시간 내 철수하라는 거라. 갈 때가 있어야지. 내가 그때 AVIS 렌터카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을 때여서 그 사무실로 악기를 옮겼지. 연습은 시민회관. 문예회관 소극장 돌아다니며 하고. 시민회관에서는 관리인이 두 단체를 대관해서 한쪽에선 배드민턴 치고, 다른 쪽에서는 연습하는 해프닝도 있었어. 난방해도 손이 시려 연습하기 힘들었는데, 오현고 졸업생이 그 일을 알고 신진교통에 연습하도록 해 줬지.
불만 있는 사람은 다 그만뒀어. 한라윈드 거쳐 간 단원만 300여 명. 지금 활동하는 단원은 20~50대 대학생부터 일반인까지 이름 있는 단원은 42명이고, 실제론 38명. 주 2회 연습, 저녁 7시30분에 연습 시작한 것은 실제 연주회 시간에 맞춘 거지. 연간 한라윈드 연습일은 120일. 일본 사람도 우리 연습일수 보고 놀라지.

▲ 1993년 5월 1일 열린 한라윈드앙상블 창단연주회.

▲ 주 2회 연습, 식비 단원 부담, 교류 연주회 시 여행경비 연주자 부담 등등 운영 시스템이 여느 단체와 다릅니다.

▲ 음악인들은 프로 단체를 선망하는데요.
우리나라 관악밴드 가운데 프로 단체는 얼마 안 돼. 일본도 마찬가지야. 시민 밴드 1만 개 중 전문 밴드는 열 손가락에 꼽혀. 연주활동으로 생계유지가 돼야 프로로 인정돼. 그렇게 보면 우리나라엔 프로 단체 하나도 없어. 대학에서 음악 전공하면 프로로 알고들 있어. 잘못된 거지.

▲ 지휘봉을 오래 잡을 줄 알았나요?
내가 나이가 있기 때문에 유사시를 대비해서 외부에서 영입하려고 노력했어. 제주에서 지휘할 사람을 전공자를 물색해서 단원들이 두 사람을 만났는데, 내가 월급 받고 하는 줄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 나는 연주수당 주고 식사비 주면 한라윈드는 지금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해.

▲ 한라윈드 수입원은?
문예진흥기금, 찾아가는 음악회 등 행사비 출연료 모은 것. 공연 후 단원들에게 주고 나머지 회수해서 모으지. 이 돈으로 교류 연주회 하는 거지만. 내년 일본에 일곱 번째 가는데, 내년엔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다음해가 문제야. 2년에 한 번 일본 연주회 가는 재원, 지금까지 연습실 세를 안 냈기 때문에 가능했거든. 창단 초기엔 신라호텔 등에서 행사도 했는데, 지금은 별로 없어. 숙박만 해결해 주면 공짜로 무대 서는 뮤지션이 많거든.

▲ 상반기에 연습실을 구 코리아극장으로 또 옮겼죠?
신진교통에서 더는 연습할 상황이 되지 않아 올해 2월부터 구 코리아극장에서 연습하고 있는데, 좀 힘드네. 극장 행사로 세 번이나 연습을 못 했어. 연습 리듬이 깨져 버렸지. 태풍이 불어도 연습했고, 지금은 안하지만 심지어 명절에도 했었는데. 아마추어는 연습이 곧 실력 쌓는 길이야. 한라윈드는 일주일에 2회 4시간 충실히 연습해서, 그러면 총 22회 연습해서 정기 연주회를 했는데, 이번엔 제대로 못 했어.

▲ 공동의 연습공간은 어떨까요?
일본은 동사무소 문화교실에 연습공간이 대, 중, 소로 최소한 3개로 분류돼 있어. 대, 중, 소 3곳에 전부 피아노가 있어. 일본에서는 단체들이 트럭을 구입해, 트럭에 악기를 보관해.

▲ 월 회비 받는 것은 검토해 보셨나요?
회비를 받으려면 목적이 뚜렷해야 해. 정기 회비 내면 어디에 쓸 거냐, 목적 없이 돈을 걷지 말라, 회비는 잘못 거두면 돈도 사람도 단체도 잃는다는 게 나의 지론인데, 5월 초 연습실 대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원들에게서 월 회비 1만 원을 받기로 결정했어. 

▲ 내년이 창단 20년인데, 행사 준비는?
20주년 창단 연주회, 기념 회지 발간할 건데, 재작년부터 준비했어. 창작곡 1곡 위촉해서 연주하고, 일본 단체와 교류 연주회 하려고 하는데, 작곡자는 아직 결정 안 됐어. 회지에는 단원들 여행기, 연주회 후일담, 현재 활동 중인 단원 프로필, 한라윈드 기록 실으려고, 분량은 250쪽. 일본 관악단체 중 가장 오래된 오사카시 음악단도 80주년 기념 회지에 연주 프로그램을 다 싣지 못했는데, 우리는 다 갖고 있어.

▲ 악보는 어떻게 구하나요?
일본 지휘자가 집에 와서 악보 보고 놀라대. 한라윈드가 갖고 있는 악보가 500곡 이상이지, 정리된 것만. 정리 안 된 것도 200곡쯤 될 거라. 일본 민간단체도 악보 갖추고 정리된 곳이 드물다고 하더라고. 한라윈드 악보는 원본을 산 것보다 기증받은 게 훨씬 많아. 기증받은 악보는 일본지휘자클럽, 정년퇴직한 사람들 모임을 통해 부탁해 구입했지. 교류 중인 일본 단체로부터 입수한 것도 꽤 돼. 원래 악보는 하나인데, 여러 단체로부터 악보를 받다 보니 한 곡에 3종류의 악보가 있기도 해. 일본 제자들에게서도 도움을 받았어. 10년간 여섯 사람이 1년에 10만 엔을 모아 줬어. 단원들도 계좌를 만들었지. 한 계좌에 1만 원, 일본에서도 하는데 우리도 뭔가 해야 하지 않겠냐고 해서 시작했는데, 한 달에 6만 원씩 모아. 악보를 구입할 땐 구입선을 기록해 둬. 그래야 어떻게 악보를 입수했는지 알지.

▲ 민간단체 치고는 유난히 외부 단체와 교류가 많은데.
내년까지 다 이뤄진다면 일본 일곱 번 가고 9개 도시에서 연주하게 되는 거지. 국내에서는 익산 청주 대구 대전 부산 등과 교류했는데, 몇 번 교류한 단체도 있지만 대부분 교류 후 단체가 없어져 버렸어. 우리가 다음 갈 명분이 없으니 교류는 그 걸로 끝인 거지. 우리나라엔 지휘자와 단체 이름만 있지 단원 없는 단체가 많아.
한라윈드 만들 때부터 외국과 교류를 먼저 생각했어. 악단 계획이 없으면 단체 메리트가 없어서 모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 단원들 한라윈드에 들어오면 2년에 한 번 일본 연주 여행을 해. ‘아티스트’ 예우를 받고 여행하는 것은 제주도 민간단체가 한 번 하기도 힘든데, 2년에 한 번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지. 또 여행경비를 외부에서 지원받는 것이 아니라 단체 스스로 돈을 모으고 단원들이 회비를 만들어서 갔다 오는 거지. 처음부터 거지근성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어. 처음 일본 갈 때도 회비 내면 안 가겠다는 사람이 3명 있었다고. 그때 내가 한 소리. “나도 회비 낸다, 내가 공짜로 가는 것이 아니다.”

▲ 한라윈드 활동에 도움 준 분은?
그동안 은인 두 사람을 만났어. 일본 관악작곡가 기츠 기요시(木津 淸ㆍ1927년생) 씨와 악기 수리상 후쿠나가 가즈오(福永  一雄ㆍ1948년생)씨. 기츠 씨는 92년 만난 후 한라윈드 기증악보의 절반을 구입해줬고, 일본 내 관악정보를 주었어. 20년 친구지. 후쿠나가 씨는 관서지방에서 가장 큰 악기점을 운영하고 있는데, 노후한 악기를 수고비 없이 11년째 수리해 주고 있어. 후쿠나가 사장, 1년에 한 번 제주에 오는데, 숙박비를 한 번도 공금으로 쓴 적 없어. 그것은 일본에서 한라윈드를 도와주기 위해 악기를 수리하러 자기 경비로 오기도 하는데, 나는 보기만 하는 거라. 공금으로 해도 될 만한 일이지만, 그렇게 했으면 한라윈드와 인연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

후쿠나가 씨와 극적으로 만났지. 제주국제관악제 악기 수리하러 왔는데, 알프레드 리드 지휘하는 날이었지. 가서 보니까 악기 수리 코너가 2개인데, 후쿠나가 씨가 수리하는 데는 사람이 몰려 있고, 한국 사람이 수리하는 데는 텅텅 비어 있는 거라. 해군 군악대 군인이 수리하러 왔는데, 소통이 안 돼. 얼굴도 안 보고 통역해 줬지. 후쿠나가 씨 악기 수리하는 것 보고 악기 클리닉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 알게 됐지. 악기 수리하고 해변공연장에 가기로 돼 있었는데 한라윈드 연습장에 가 보자는 거라. 악기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강의나 듣자고 했는데, 만리홍 건물 지하에 와서 악기만 수리해 주고 갔어. 그것을 인연으로 매년 와서 악기를 고쳐 주고 있지.

▲ 음악을 안 했다면.
음악을 전공하고 음악교사 하면서도 언젠가 장사를 생각했어. 월급쟁이는 죽지도 않고 잘 살지도 못할 만큼 월급 받거든. 그래서 교사 그만두게 되니까 장사를 해봤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과 상당히 다르더라고. 코카콜라 들어간 것도 그것 때문이었지.

어머니가 상인이고, 자유당 시절 우마상 반출증 유일하게 받은 여자라. 글은 몰랐지만. 소 실을 때 화주가 몇 사람 같이 가는데, 항구에 내릴 때 캄캄할 때 있어. 옷감이 없으니까 속치마 찢어서 소뿔에 다 묶어서 소를 확인했어. 목포역에 가서 화물칸을 누가 확보하느냐가 관건인데 제일 먼저 소 싣고 간 사람이라. 내 결혼식 후 바로 저녁에 소 싣고 육지로 장사 갔지. 부지런만 하면 상인이 되는 줄 알았는데, 해보니 그 것으로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어.
 
▲ 교직에 계속 있었던 이유는
이제 생각해보니 내 적성은 교직. 교사 해보니 가르치는 것이 적성에 맞아. 어쩌면 음악적 소양보다도 단체를 만들고 이끄는 걸 좋아했는지 몰라. 청소년 적십자 활동 우수 교사로 뽑히기도 했어.

▲ 노후를 한라윈드랑 보낸 셈이네요.
그만두는 날을 언제 둘 거냐, 명예롭게 퇴진하고 싶어, 구질구질 않게. 지금도 고등학교 밴드 새로 생긴 데, 물든지 않은 곳 하고 싶은 생각. 이제 하면 굉장히 잘할 것 같아.

▲ 지금 명퇴 상황이 됩니까?
제일 걱정이 20여 년간 기록해 온 연습일지. 그만두면 출석 기록이 안 돼요. 출석부를 써야 단원 파악하고 파트별로 누가 왔는지 알 수 있지. (그가 보여준 출석부에는 연습일 출석, 10분 지각, 지각, 조퇴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12일 내년 20주년 행사 때문에 일본에 가버리면 화요일 연습하는데 그날은 지각, 조퇴 한 사람도 없을 거야(웃음).

▲ 단원들에게 희망 사항이 있다면?
첫째도 연습에 나오라, 둘째도, 셋째도 연습에 나오라. 사람이 나와야 싸우더라도 일을 하지. 제주말로 싸우멍 튿으멍 20년. 나오지 않으니 샅바를 못 잡아.

그는 5월 12~16일 내년 창단 20주년 행사 때문에 일본에 갔다. 일본 출장 때문에 오현고 졸업생의 사은회도 취소했다. 원래 6월에 가려고 했는데, 내년 제주에 올 단체가 12일 정기 연주회여서 올 수 있느냐 해서 가게 된 것이다.

내년 3월에는 일본 교토외국어대학교서고등학교OB&OG취주악단이 제주에 오고, 내년 5월에는 일본에서 콩고밴드와 연주한다. 외부에 손 벌리지 않고 무대를 만들고, 1주일에 두 번 가장 먼저 연습실에 가 있는 사람.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지하 서재를 직장으로 여기고 다음 연주회를 준비하는 사람. 그가 있어 시민밴드 한라윈드앙상블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김오순 문화예술재단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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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제주문화예술재단 기관지 '삶과 문화' 2012 여름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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