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땅 '샤저우', 헐값에 팔려갔던 중국 고문서들
모래의 땅 '샤저우', 헐값에 팔려갔던 중국 고문서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둔황에서 룸메이트였던 다이스케. ⓒ양기혁
탕구트 지역. ⓒ양기혁
도넛같이 기름에 튀긴 빵인데, 속은 호떡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했다. ⓒ양기혁
둔황의 이슬람 사원. ⓒ양기혁
시장에서 구두 닦는 여인들. 한국에서는 남자들이 하는 일이지만 여기선 모두 중년 여인들이 하고 있었다. ⓒ양기혁

<양기혁의 중국횡단기> 11 하마터면 여행 접고 돌아갈 뻔 했던 위기

안락한 호텔 침대에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잠이 깨어, 밖으로 나가 보니 이미 날이 밝았다. 아침 공기는 약간 한기를 느낄 정도로 서늘한데, 어제의 모래폭풍은 신기루였던 것처럼 잦아들어 조용하고, 봄바람이 가볍게 스쳐 지나간다. 채 7시도 되지 않았는데 어린 학생들은 자전거를 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등교 길을 재촉한다.

화장실 세면대에서 얼굴과 머리에 대충 물을 묻혀 씻고, 방으로 돌아왔는데 다이스케는 이불 속에 누운 채 기척이 없다. 그는 관광지를 돌아보는 데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낯선 사람들이 사는 낯선 곳으로 흘러가서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 속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허기를 느껴 아침식사로 어제 산 컵라면에 먹다 남긴 김치와 참치 샐러드를 같이 먹으니 한결 낫다. 남은 음식도 정리됐고, 이제 나갈 준비를 해야 했다. 옷을 갈아입고, 꺼내놓은 짐들을 다시 배낭 속에 정리하여 넣는데 문득 어제 막고굴에서 산 책《敦煌》을 택시 뒷자리에 놓고 내린 것이 생각났다. 택시기사 뤄더홍이 준 명함을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어서 호텔 데스크에서 그에게 연락할 수 있었다.

다이스케의 사진을 찍고 싶은데, 그는 여전히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어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연주할 때의 그 쓸쓸한 모습을 찍었어야 했는데. 아쉬웠지만 이불 속에 있는 사람을 찍을 수도 없기에 할 수 없이 침대에 기대어 놓은 우쿨렐레 사진이라도 찍 으려고 하는데 그가 부스스 일어난다.

“Do you mind…? I want…take your picture.”
“Sure!”

 

▲ 둔황에서 룸메이트였던 다이스케. ⓒ양기혁

어설프게 그의 사진을 찍고 싶다는 표현을 했는데, 여행지에서 서로가 사진을 찍는 일이 당연하고 익숙한 일이라는 것처럼 그는 선선히 침대 위에 앉아 우쿨렐레를 잡고 포즈를 취한다. 막 일어나 부스스한 모습의 다이스케를 찍고 나자 그는 자기도 사진을 찍고 싶다면서 나와 어깨동무를 하고 손을 내밀어 그의 카메라에 두 사람의 얼굴을 담았다. 그와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다. 악수를 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Good luck to you!”
“Have a nice trip.”

방을 나와 호텔 데스크로 가니 여직원이 비닐봉지에 든 책《敦煌을 건네준다. 방 카드키를 반납하고 보증금을 돌려받고 호텔을 나왔다. 벌써 10시가 넘은 시간이다. 우선 은행에 가서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지를 알아봐야 했다.

가이드북에 나온 둔황 시내 약도에 외환전문은행인 중국은행이 시청 근처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은행까지 천천히 걸어가서 개인상담이 가능한 창구에 앉아 있는 여직원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환한 미소로 반겨주었다. 한국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지 묻자 그녀는 옆의 남자 직원과 상의하더니 창구에서 한국신용카드를 직접 취급할 수는 없고, 옆의 ATM(현금자동 입출금기계)을 이용하라고 한다. 다시 내가 갖고 있는 한국 돈을 바꿀 수 있는지 묻자 미국 달러만 교환되고 다른 외국화폐는 안 된다고 한다.

나는 좀 실망스러웠다. 어제 길거리에 설치된 ATM기계에서 시도했었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오늘도 안 될 거라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할수 없이 창구 옆에 설치된 ATM기계로 가서 지갑에 있는 카드 세 장을 꺼냈다. 그중에서 전면 한쪽에 VISA 글씨가 선명한 카드를 기계에 집어넣고 지시대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기다리고 있으니 사용불가하다는 판정을 받고 카드는 기계 밖으로 밀려나온다. 두 번째 카드는 MasterCard가 찍힌 카드인데 역시 불가하다고 판정을 받고 쫓겨나듯이 나온다.

마지막이다. 이것마저 사용되지 않으면 남은 여행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세 번째 카드를 기계에 집어넣고 비밀번호를 누르고 기다리는데, 잠시 후 찍찍거리는 기계음이 나더니 커다란 입을 벌리고, 붉은색 중국돈 100원짜리 다섯 장을 뱉어낸다. 살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시 한 번 비행기표를 사고 남을 정도로 여유 있게 현금을 인출했다. 기쁜 마음에 옆 창구의 여직원에게 카드를 흔들어 보이며 한마디 던졌다.
“I got cash.”

은행을 나와서 다시 조금 떨어져 있는 중국민항 사무소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사용이 가능했던 카드는 유스호스텔 회원 신청을 해서 회원증을 받았을 때 뒷면에 유스호스텔 제휴카드라고 쓰여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래서 내가 가진 그 카드도 해외 사용이 가능하게 됐던 것은 아닐까.

▲ 탕구트 지역. ⓒ양기혁

중국민항 사무소에서 우루무치에서 청뚜 가는 비행기표를 사고 나니 이제 여행이 순조롭게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 중국민항 바로 옆에는 둔황박물관이 있어서 안으로 들어갔는데 박물관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신관으로 이전을 위하여 유물을 이미 포장한 상태라서 정상 개관을 할 수 없음을 양해바랍니다.’라 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발길을 돌려 길 건너편의‘沙州市場’으로 갔다. 어제 다이스케와 함께 왔던 야시장이다. 어제는 늦은 밤이라서 식당들만 문을 열었는데 오늘은 옷가게와 잡화점, 식료품점들이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 여느 시장과 비슷했다.

 

▲ 시장에서 구두 닦는 여인들. 한국에서는 남자들이 하는 일이지만 여기선 모두 중년 여인들이 하고 있었다. ⓒ양기혁

 

▲ 도넛같이 기름에 튀긴 빵인데, 속은 호떡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했다. ⓒ양기혁

모래의 땅이라는‘샤저우(沙州)’는 둔황을 가리키는 별칭이다. 13세기 쿠빌라이 칸이 다스리던 원나라를 방문한 베네치아인 마르코폴 로의《동방견문록》에는 사초우(Saciou)라는 지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탕구트 지방에 대하여 우리는 1개월여의 사막여정을 마친 후 마침내‘사초우’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이곳은 대칸의 지배를 받는 곳이며 탕구트(Tanguth)지방이라 불린다. 주민들은 대부분 우상을 숭배하지만 네스토리우스 파의 기독교도와 사라센도 일부 있다. … 주민들은 주로 농사를 지으며 밀 생산량이 많다. 도시 곳곳에 사원이 있는데 그 안에 여러 종류의 우상을 받든다. 그들은 이런 우상을 매우 정성스럽게 대하고 제사 때는 항상 가축을 올린다.”
《( 동방견문록》배진영편역, 서해문집, 80쪽)

탕구트 지방이라는 것은 한때 탕구트족이 이 지역을 점령하여 지배했기 때문에 붙여졌는데 탕구트족은 10세기 이전 중국 북서부로 이전한 티베트계 유목민으로 세력이 강력해진 11세기 초 하서지방을 점령하고 서하(西夏)왕국을 세워 1227년 칭기즈 칸의 몽골족에 멸망하기까지 200여 년간 깐수성, 산시성 지역을 지배했다.

한동안 중원은 여진족의 금(金)나라, 금나라에 의하여 남쪽으로 밀려난 송(宋), 그리고 티베트계인 탕구트족의 서하왕국이 정립하기도 했다. 세력이 강성했던 초기인 1036년 하서 동쪽지역을 정복한 후 사주귀의군(歸義郡)으로 쳐들어와 과주, 사주, 감주의 3주를 정복했는데, 이때에 돈황의 수많은 경전과 문서들이 막고굴의 장경동(藏經洞)에 숨겨져 굴을 밀봉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천년의 세월이 흐른 뒤 20세기 초 퇴역군인으로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왕원록이라는 인물이 막고굴의 석굴에서 道士를 자처하며 지내다가 한 석굴(16호)의 안쪽 벽이 이상한 것을 알고 벽을 뜯어보니 고문서와 경전들이 그 안쪽 또 다른 석굴(17호 석굴)에 가득히 쌓인 채 보관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약 5만여 점에 달하는 고문서와 불화 등은 당시 발견한 왕도사 자신이나 변방의 관리들이 그 문헌들의 가치와 소중함을 몰라 방치되고 있었다.

20세기 초 청나라 세력의 약화로 말미암아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서역지방은 지리적 공백지대로 남아 있었는데 왕도사가 발견한 고문서들은 이 지역을 탐험하던 열강의 탐험대들에게 헐값으로 팔려가 지금은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약 1만 점, 프랑스 국민도서관에 5천여 점, 상트페테르부르그 박물관에 1만 점, 일본에 1천 점, 그리고 북경에 1만 점 등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장경동의 문서들은 대부분 한문으로 된 문서들이지만 그 외에도 티베트어, 산스크리트어, 소그드어, 호탄어, 쿠차어, 투르크어로 된 문서들과 소수의 고대 이란어인 팔라비어, 아랍어, 서하어, 몽골어 등의 문서들이 있으며, 문서의 성격으로는 대부분 불교의 경전과 불교문헌들이지만, 그 외로도 시경(詩經), 상서(尙書), 주역(周易), 예기(禮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곡량전(穀梁傳), 논어(論語), 효경(孝經)등과 노자, 장자, 문자, 포박자와 같은 제자류의 문서, 다수의 도교 경전들, 당대에 금지되어 탄압을 받았던 삼계교(三階敎)의 경전, 마니교 경전, 조로아스터교, 네스토리우스파 경교(景敎)의 경전들이 있다.

 

▲ 둔황의 이슬람 사원. ⓒ양기혁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펠리오가 프랑스로 가져간 문서 가운데 사라져버린 것으로 알려졌던 8세기 신라인 혜초(慧超)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다. 그것의 사본 일부가 발견되어 광동 지방에서 배를 타고 천축으로 갔다가 중앙아시아를 통하여 신장지역으로 돌아온 구법기행의 일부가 전해지게 된 것이다. /양기혁

   
필자 양기혁은 1958년 서귀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 상경해 도시 생활을 시작했다. 중앙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나서 서울에서 바쁘게 살다 중년에 접어들고서 고향으로 돌아올 결심을 했다. 제주시에서 귀농 생활을 즐기다 우연치 않게 방송통신대 중문과에 입학해 중국어를 공부했다. 이왕 공부한 김에 중국 횡단 여행을 다녀와 <노자가 서쪽으로간 까닭은?>이라는 책을 냈다. 노자는 어쩌면, 필자 자신인지도 모른다고 소개했다.

<제주의소리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0 / 400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순 추천순 이 기사에 달린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