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서역(西域)땅에서 딸의 흔적을 만나다
머나먼 서역(西域)땅에서 딸의 흔적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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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무치 기차역,‘ 우루무치’라는 도시 이름이 위구르어와 한자로 같이 쓰여 있다. ⓒ양기혁
번화한 우루무치 중심가의 고층빌딩들. ⓒ양기혁
마이티엔 유스호스텔 내부. ⓒ양기혁
딸과 같은 이름의 꼬마 손님이 유스호스텔 벽에 남기고 간 낙서. ⓒ양기혁
마이티엔 유스호스텔 로비 벽의 여행객 낙서들. ⓒ양기혁

<양기혁의 중국횡단기> 13 흉노의 땅 서역(西域) 우르무치에서

새벽 한 시. 기차에 오르자 바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는데, 감기 몸살이 심해지는지 밤새 잠을 자는지 마는지도 모르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아침을 맞았다. 어제 목이 따갑게 아프더니 이제는 코가 막히는 것이 감기 증세가 완연했다.

뿌옇게 흐린 창밖을 보니 유전지대인지 황량한 벌판에 거대한 석유 굴착 장비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다. 허리를 굽혔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장비들은 기차가 한참을 달릴 동안에도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는 석유화학공장들도 군데군데 보였다.

그리고는 또다시 황토흙과 검은 모래가 섞인 사막, 이따금 붉은 색을 띤 황토고원이 나타나기도 하고 그러다 거대한 호수가 보였다. 옆에 있던 노인에게 물었다.

“나비엔 나거스브스 후(저 쪽에 보이는 것이 호 수입니까)?”
노인은“후, 후”하며 호수가 맞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푸른 초원과 양떼 무리들이 군데군데 보이는 것이 우루무치가 가까워오는 느낌이다. 12시가 다 되어서 우루무치에 도착했다.

▲ 우루무치 기차역,‘ 우루무치’라는 도시 이름이 위구르어와 한자로 같이 쓰여 있다. ⓒ양기혁

우루무치는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 생각했던 종착지이면서 반환점이기도 했다. 깐수성 둔황은 하서의 끝이고 그 서쪽 신장위구르 지역은 서역(西域)으로 알려진 땅이다.

역사적으로 이곳은 투르크계 종족인 월지(月支, 혹은 月氏)와 흉노(匈奴)의 땅이었다. 몽골 초원에서 알타이산맥과 천산산맥에 이르는 드넓은 불모의 땅에서 한나라에 위협을 가하고 있던 흉노의 세력은 한무제로 하여금 장건(張騫)을 보내 서역의 루트를 개척하게 했고 이후 남흉노는 일부 중국에 귀순하여 동화되어갔으나 북흉노는 서쪽으로 진출하여 카스피해의 북부를 지나 러시아의 볼가강 유역에 자리 잡았고 훈족(Huns)으로 알려진 일부는 5세기경 로마제국의 국경이었던 도나우 강까지 진출하여 로마의 멸망을 재촉하기도 했다.

6세기 초 당나라 때는 역시 투르크와 그 발음이 유사하고 흉노의 후손이라고도 하는 돌궐족이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고, 비천한 농민 출신의 떠돌이 행각승 주원장(朱元璋)이 농민반란의 수장이 되어 명나라를 세우고, 원나라의 몽골족을 북쪽 초원으로 몰아내고 난 뒤에는‘오이라트’라는 이름의 서몽골족이 이슬람교를 믿는 위구르인들이 다수인이 땅을 통치하고 있었다.

17세기 말 만주족의 청나라 2대 황제인 강희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신식 대포를 동원하여 유목민족의 기병을 제압하고, 이 땅을 청나라 영토에 편입하여‘새로운 영토’라는 의미로‘신강(新疆)’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기차역을 나와서 본 우루무치는 막연히 변방 오지로 낙후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과 달리 상당히 번화하고 현대화된 대도시였다. 우선 점심을 먹고 나서 어떻게 움직일지 생각해보기로 하고 적당한 식당을 찾았다. 어제 아침 둔황의 호텔에서 컵라면을 먹고 나서 점심은 당허에서 캔맥주 두 개, 어제 저녁과 오늘 아침은 단팥빵 하나씩이 한 끼 식사였다. 점심은 제대로 된 맛있는 식사를 하고 싶었다. 역 앞의 수많은 식당 중에서 실패하지 않을 곳을 고르기가 만만치 않다.

▲ 번화한 우루무치 중심가의 고층빌딩들. ⓒ양기혁

위험부담 없이 패스트푸드 체인점을 선택했다. 식당 내부는 깨끗하고 손님이 많지 않아서 천천히 식사하고 잠시 시간을 갖기에도 좋았다. 음식은 소고기 덮밥 같은 것을 시켰는데 입에 잘 맞아서 남김 없이 깨끗이 먹었다. 뱃속이 든든해졌다.

식사를 끝내고 가이드북을 꺼내서 우루무치 내의 숙소와 관광투어를 살펴보고 나서 관광투어 여행사들이 몰려 있다고 하는 인민공원 근처 마이티엔유스호스텔로 가기로 결정했다. 시 중심가이고, 기차역에서 거리가 멀지 않은 것 같아서 택시를 타기로 하고 식당을 나왔다.

생수를 사기 위해서 가게로 들어가 생수병을 들고 계산대로 가니, 직원이“이콰이 우.”라고 한다. 5원 지폐를 주고 거스름 돈 3.5원을 받았다. 나는 1원을 더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1원을 돌려주었는데 직원은 다시 “이콰이 우.”라고 말하며 1원을 도로 내민다. 그제서야 나는 한국의 ‘이’와 중국의‘이’를 잠시 착각했음을 알았다. 중국의‘이’는 한국의 ‘일’이고, 한국의 ‘이’는 중국에서 ‘얼(二)’ 혹은 ‘량’으로 쓰는데, 잠깐 헷갈렸던 것 같다.

가게를 나와 택시 타는 곳을 찾다 보니 둔황시장과 류위엔 역 앞에서 봤던 구두 닦는 여인들이 여기 역 앞에도 여럿 눈에 띄었다. 큰길 모퉁이에 나가서 택시를 잡으려고 하는데 택시들이 멈춰 서질 않는다. “런민꽁위엔 베이먼”

지나가는 택시에 손을 흔들며 외치는데 택시기사들은 슬쩍 쳐다보고는 그냥 지나가버린다. 얼마 후 나는 바로 옆에 ‘공안(公安)’이 서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택시들은 대부분 무허가 택시들인지 공안이 서 있는 옆으로는 오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공안에게서 좀 멀리 떨어져서 빈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배낭을 뒷좌석 안쪽으로 밀어 놓고 올라타서“런민꽁위엔 베이먼.”하고, 택시기사의 뒤통수에다 외쳤다. 기사는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택시를 출발시켰다.

차창 밖을 내다보며 한참을 가다 보니 택시 미터기가 보이지 않았다. 가격흥정도 하지 않았는데 괜찮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기도 했다. 아까 지나가던 택시 중에 가는 곳을 말하자 “얼스콰이.”라고 말하고는 공안을 보고 그냥 지나갔던 택시가 생각나서 그 정도 금액으로 하자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얼마 후 택시는 공원 앞에 도착하였고, 택시기사에게 물었다.
“둬샤오치엔?” “얼스콰이(이십 원).”
기사가 요금을 말하자 돈을 꺼내 지불하고 안도하며 택시에서 내릴 수 있었다.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대로 공원 입구 옆에는 우루무치 인근 관광 투어를 하는 여행사가 있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천산천지(天山天池)와 남산목장(南山牧場) 투어를 하고 싶다고 얘기하자 젊은 청년이 오늘 투어는 끝났고 내일 투어를 예약하라고 한다.

그리고 남산은 풀이 많이 자라는 여름에만 관광을 하고 풀이 자라지 않는 요즘은 투어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내일 천지 가는 1일 투어만 예약하고 나왔다. 투어요금은 140원(천지 입장료 포함).결국 우루무치에 천지를 보러온 셈이 됐다. 그런데 백두산 천지와 이름이 똑같은데, 어떻게 다른 걸까.

길 건너 반대편 쪽에 있는 유스호스텔로 향했다. 지하보도를 지나 조금 걸어가자 교차로가 있는 번화가의 한 백화점 옆 골목에 유스호스텔 간판이 눈에 띄었다. 칭따오나 시안의 유스호스텔과 달리 별다른 특색이 없어 보이는 낡은 건물이었다. 아래층의 이슬람 식당을 지나 이층으로 계단을 올라가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입구 문 옆 데스크에 한 여자가 앉아 있고 로비 겸 카페는 사람이 없어 조용했다.

▲ 마이티엔 유스호스텔 내부. ⓒ양기혁

아직은 관광 비수기라 그런지 빈방도 많았다. 1인실부터 8인실까지 다양하게 구색을 갖춰 놓고 있는데 도미토리이기는 하지만 여럿이 북적대지 않는 4인실에 묵기로 하고, 방값 이틀치 하루 60원씩 120원과 보증금 100원을 지불하고 방열쇠를 받았다.

그런데 내가 묵을 방을 결정하고 요금을 치르는 동안 여행객들이 낙서해놓은 벽을 바라보다 깜짝놀랐다. “진영이 왔다감!”하고 한글로 써놓고 귀여운 여자아이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머나먼 이곳 우루무치의 낡고 초라한 유스호스텔의 벽에서 내 딸 진영이가 마치 나를 반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림을 가리키며 앞의 여자에게 물었다.

“니 칸더동마(뭐라고 쓰여 있는지 아십니까)?”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자 내가 다시 말했다.
“쩌스 워더뉘알(이것이 내 딸입니다).”
“스마(그렇습니까)?”
그녀는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좀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 마이티엔 유스호스텔 로비 벽의 여행객 낙서들. ⓒ양기혁

 

▲ 딸과 같은 이름의 꼬마 손님이 유스호스텔 벽에 남기고 간 낙서. ⓒ양기혁

‘진영이 왔다감’위에 영어로‘Park Jin Young’이라고 쓰여 있어서 양진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내 딸을 만난 것 같은 반가움을 느끼며 어두운 복도를 지나 내 방으로 갔다.

삐걱거리는 나무문을 겨우 열고 방으로 들어가니 아무도 없는 빈방에 일인용 나무침대 두
개와 벽에 붙여서 이층으로 된 철제침대가 하나 놓여 있는데, 나에게 배정된 침대는 철제침대의 아래 칸이었다.

나무침대 위에는 주인이 있는 듯 작은 가방들이 놓여 있고, 문 옆에는 자전거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배낭을 내려놓고, 침대 위에 드러누워 있으니 창밖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처럼 끊임없이 재잘대는 소리가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창밖 바로 옆이 소학교였다. 들려오는 아이들의 소리를 자장가삼아 잠깐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감기가 점점 심해지는 듯 기침에 콧물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방 안에 화장실과 샤워를 할 수 있는 세면대가 있어서 샤워도 하고 속옷과 양말 등 밀린 빨래를 하고 나서 밖으로 나왔다.투어예약을 했던 여행사와 공원을 지나 조금 걸어갔는데 고층건물 이 즐비하게 늘어선 번화가가 나왔다. 엄청난 규모의 호텔과 쇼핑몰 등이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며 들어서 있었고, 그 옆으로 더 크고 더 화려하게 경쟁이라도 하듯이 새 건물들이 지어지고 있었다.

빌딩과 인파 속 에서 난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지도를 보면서 그렸던 우루무치는 이런 게 아니었을 텐데…. 사막과 고원, 그리고 이따금 나타나는 푸른 초원과 양떼들. 흉노와 돌궐의 후손인 목동들.‘ 우루무치’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이미지와 달리 우루무치 한복판 즐비한 고층건물과 수많은 인파 속에서 내가 그리던 우루무치가 허망하게도 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양기혁

   
필자 양기혁은 1958년 서귀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 상경해 도시 생활을 시작했다. 중앙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나서 서울에서 바쁘게 살다 중년에 접어들고서 고향으로 돌아올 결심을 했다. 제주시에서 귀농 생활을 즐기다 우연치 않게 방송통신대 중문과에 입학해 중국어를 공부했다. 이왕 공부한 김에 중국 횡단 여행을 다녀와 <노자가 서쪽으로간 까닭은?>이라는 책을 냈다. 노자는 어쩌면, 필자 자신인지도 모른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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