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후 칼럼] 한-일 협정, 정책 윤리를 바탕으로 추진해야

우리 사회의 공론장에 또 하나의 폭탄이 터졌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황혼녘에 ‘대못박기’ 하다가 뇌관을 잘못 건드린 꼴이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발행하는 <환구시보>는 ‘한-일 군사정보협정이 벌집을 건드렸다’는 제목의 기사를 쓰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 공론장에 떨어진 대표적인 폭탄으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포함한 한미 FTA, 민간인 사찰, 4대강 사업, 용산 참사, 미디어법 강행처리, 제주해군기지 건설, 내곡동 사저 건립 계획 등을 들 수 있다. 강한 법치 확립과 도덕적으로 완벽함을 주장하는 정권에서 말이다.

이번 사태는 정부가 한-일 정보보호협정을 얼렁뚱땅 밀어붙이려다 발생했다. 남북관계와 미·중 간 견제 등 동북아시아 안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예민한 문제를 경솔하게 다루어 화를 자초한 것이다. 잔혹한 식민 통치, 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 역사 왜곡, 독도 영유권 갈등 때문에 한ㆍ일 간 신뢰도는 상례적으로 낮은 수준이다. 더구나 최근 일본 정부는 헌법을 재해석해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인정하는 방안의 검토에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라는 내용이 담긴 협정을 졸속 처리하려 할 때 여론이 폭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일 정보보호협정 처리 과정을 살펴보면 국정 난맥상이 드러난다. 언론보도로 들통나지 않았더라면 정부는 4월 23일 협정 가서명부터 6월 29일 협정 서명식까지 모든 절차를 국민에게 알리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는 29일 협정 서명을 전격 보류한 후 밀실처리에 대한 책임을 물어 실무진을 인책했으나 전형적인 ‘꼬리자르기’라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머리는 숨겼지만 꼬리는 숨기지 못했다는 장두노미(藏頭露尾) 모양새다.

국무회의 즉석안건으로 밀실처리, ‘군사’ 용어의 생략과 대통령 부재중 기습 처리, 은폐와 거짓말, 여론수렴 생략과 정보 비공개 등은 비윤리적인 정책 처리의 극치였다. 밀실행정을 좋아하는 공직자들의 본성이 여실히 드러났다. 밀실처리가 밝혀진 뒤 청와대, 외교부, 국방부가 책임을 떠넘기며 허둥대는 등 막장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국회와 국민에게 협정 내용을 소상히 공개하고 설명해서 오해가 없도록 조치하라”는 대통령 지시에 대해서는 ‘유체이탈’ 화법이라는 말도 나왔다. 시기적으로 부적절했고, 절차상으로 무책임했으며, 협정 내용이 미칠 파장을 철저히 무시했다.

민주주의에서 비윤리적 정책추진은 개인·사회·국가적으로 막대한 폐해를 초래한다. 정보를 은폐하려는 행태는 국민의 생존, 인권 뿐만 아니라 국가 안보와 경제 등을 위협할 수 있다. 정책의 영향력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꼼수’에 의존하고 여론을 무시한 정책 처리는 정부를 위기에 몰아넣고 국민적 신뢰를 떨어뜨려 국정 운영 기반을 흔들기도 한다. 이번 사태 이후 ‘식물정부 본격화’라는 말이 나온 이유다. 즉석안건 처리처럼 일방적이고 독선적 정책 추진은 낭비적인 사회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정부가 협정 서명을 강행했다면 ‘촛불’ 사태로 점화될 가능성도 있었다. 가장 치명적인 해악은 민주주의를 퇴보시켜 공동체를 파괴시킨다는 점이다.

정부 정책이 윤리를 바탕으로 추진될 때 국민의 이해와 지지를 얻어 공공의 이익을 실현할 수 있다. 정책 추진 과정에서 국민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절차와 수단을 무시하면 정책 실패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윤리는 정책의 성패를 좌우하는 당위론적 과제다. 독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담론적 윤리 기준은 결과보다는 절차의 합리성에 있다’고 강조한다. 윤리적 정책 과정은 정부가 의도한 결과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공중이 자유롭게 참여하고 토론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동의와 합의를 얻어내는 데 중점을 둔다. 모든 일은 숨김없이 공개되고 논의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급선무다. 정부에 반대하는 공중의 참여와 의견을 존중하고, 자유로운 의견 교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 권영후 전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장. ⓒ제주의소리

이번 사태의 저변에는 ‘국민에게 결과적으로 이익을 주는 정책은 비윤리적 처리도 정당하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소통과 윤리의 정언명령(定言命令)을 무시한 법치 만능에 빠진 결과다. 한-일 정보보호협정은 그 중요도 때문에 윤리적 기준이 강조 될  수밖에 없다. 현 시점에서 한-일 안보협력이 필요하다면 추진 방향과 전략에 대해 민주적 절차에 따른 공론화와 철저한 검증, 여론 수렴과 국민의 참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공직자들은 비윤리적인 정책 추진의 유혹을 경계하고, 윤리적일 때 최고 수준의 공익을 실현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권영후 전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장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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