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에 무릎 꿇지 않은 도시의 산책자 '구보'
자본에 무릎 꿇지 않은 도시의 산책자 '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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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미의 문학카페> 17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국지성 소나기로 지열이 잠시 누그러진 거리를 타박타박 걷다 공원 벤치 위에 털썩 앉아본다. 이런 여유가 얼마만인가. 옷이 젖는 것도 아랑곳없이 신발을 벗은 채 벤치 위로 다리를 세우고 앉아 본격적인 방관자의 자세를 취해본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의 발걸음은 보폭을 가늠하기엔 너무 빠르고, 감정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낯빛들. 어쩌다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흘낏 내 눈을 의심하는 눈빛이나 어쩌다 히죽히죽 웃는 사람도 보인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어폰을 귀에 꽂았거나 핸드폰에 정신을 쏟고 있는 사람들이다.

 건너편 버스정류장의 풍경은 무심하거나 들떠있거나 지루하다. 의자에 앉은 할머니 한 분은 양산을 만지작거리고 있고, 그 옆 중년의 남자는 뒤에서 히히덕거리며 어깨를 나란히 한 남녀를 힐끔힐끔 쳐다본다. 적잖이 못마땅한 모양이다. 버스정류장에 기대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젊은 여성은 한사코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도시의 방관자가 되어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탐색하는 이런 재미는 차를 버리고 다니는 하루가 주는 선물이다. 마치 샤르트르가 「구토」에서 그려내는 거리의 풍경인 듯 관찰자의 시선을 가져보는 것도 일상의 또 다른 재미구나 생각한다.

 내친김에 서점에 들러 책 한 권을 사고 왔다. 박태원의 단편선,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다. 아마도 샤르트르의 소설「구토」를 떠올리면서 무의식간 ‘구보’가 생각났던 모양이다. 의식의 고리는 이렇듯 작은 단서들 간의 연결 또는 결합임을 또한 실감한다.

박태원은 원래 시인이었으며, 한국 소설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모더니즘 작가로 손꼽는다. 그는 김기림, 이상, 이태준, 정지용 등과 함께 구인회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1950년 이태준과 함께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천변풍경> <골목 안> 등과 같은 세태소설과 주인공의 내면 의식을 그대로 담아 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등이 있다.

박태원의 소설은 1920~30년대 사실주의적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형식을 취한다. 리얼리즘문학이 식민지 조국의 현실과 민중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데 집착했다면 모더니즘 문학은 그 반대편에 있었다. 즉 1920~30년대 급작스럽게 밀려드는 근대의 양식과 전통의 이념이 뒤섞이면서 설 자리를 잃어가거나 찾지 못하는 근대의 개인이나 세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소설은 형식적 실험성이 두드러지며 제임스 조이스, 재즈카페, 레인코트, 현대의학사전, 전차, 모데로노로지오 등과 같은 모던의 코드들이 유감없이 등장한다.
 
소설가 구보는 아무런 목적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나날을 보낸다. 스물여섯 살인데 장가를 가지 않았으며 가족으로는 어머니와 조카, 형수뿐이다. 구보 씨가 부양해야하는 가족이다. 어머니는 아들이 무엇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또 동경엘 건너가 공부하고 온 내 아들이, 구하여도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으면서도 별 타박은 하지 않는다.

구보는 집을 나와 천변 길을 따라 광교를 향하여 걸어간다. 한낮의 거리에서 격렬한 두통을 느낀 구보는 무조건 전차를 탔다가 1년 전 소개받았던 여성을 우연히 본다. 소개받은 후로 연락을 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지내는 자신을 자학하기도 하다, 조선은행 앞에서 내려 장곡천정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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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독은 그곳에 있었다. 구보가 한옆에 끼어 앉을 수도 없게끔 사람들은 그곳에 빽빽하게 모여 있어도, 그들의 누구에게서도 인간본래의 온정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네들은 거의 옆의 사람에게 한마디 말을 건네는 일도 없이, 오직 자기네들 사무에 바빴고, 그리고 간혹 말을 건네도, 자기네가 타고 갈 열차의 시각이나 그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네들의 동료가 아닌 사람에게 그네들은 변소에 다녀올 동안의 그네들 짐을 부탁하는 일조차 없었다. 남을 결코 믿지 않는 그네들의 눈을 보기에 딱하고 또 가엾었다.


(중략)

구보는 펜을 잡았다. 무지는 노는 계집들에게 있어서, 혹은,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나 아닐까. 그들이 총명할 때, 그들에게는 괴로움과 아픔과 쓰라림과…… 그 온갖 것이 더하고, 불행은 갑자기 나타나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말게다. 순간, 순간에 그들이 맛볼 수 있는 기쁨을, 다행함을, 비록 그것이 얼마나 값없는 물건이더라도, 그들은 무지라야 비로소 가질 수 있다…… 마치 그것이 무슨 진리나 되는 듯이, 구보는 노트에 초하고, 그리고 계집이 권하는 술을 사양 안했다.

(중략)

구보는 비로소 그를 돌아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밤에 또 만납시다. 그러나 구보는 잠깐 주저하고, 내일, 내일부터, 내 집에 있겠소, 창작하겠소-.

“좋은 소설을 쓰시오.”

벗은 진정으로 말하고, 그리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 참말 좋은 소설을 쓰리라. 번 드는* 순사가 모멸을 가져 그를 훑어보았어도, 그는 거의 그것에서 불쾌를 느끼는 일도 없이, 오직 그 생각에 조그만 한 개의 행복을 갖는다.

*번 드는 일 : 숙직이나 당직 근무 서는 일     

 

다방에 들어가 가배차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다 일어서서 골동품점을 경영하는 친구를 찾아간다. 친구는 방금 나갔다는 점원의 얘기를 듣는다. 할 수 없이 다시 걷는다. 그러다 금전적으로 출세한 친구를 만나 다방으로 끌려간다. 출세한 친구의 옆에는 예쁜 여자가 앉아있었다. 그 여자를 보며 ‘분명 황금과 육체를 바꿨을 것이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다시 조선은행 앞에까지 간 구보는 친구를 만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논하는 등 담화를 나누다가 친구가 급한 약속이 있어 잠시 헤어졌다 다시 만난다. 다시 만난 둘은 대창옥에서 식사를 하고, 과거 연애하였던 여성에 관하여 생각한다.

다시 친구와 술집에 간 구보는 술집 여종업원을 보면서 상념에 젖는다. 어느 날, 상복을 입은 여성이 ‘여급 대모집’이라고 적힌 광고를 보다가 자신의 나이를 한탄하며 돌아서던 장면이다. 구보는 생각한다. ‘여기 이 여자들과 그 아낙네 중 누가 더 행복할까?’ 새벽 2시,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차와 술과 여자, 거리의 풍경을 실컷 구경하며 만감이 교차하던 구보는 ‘생활인으로서 좋은 소설을 쓰리라’ 다짐하면서 집으로 향한다.

어찌 보면 시시껄렁한 이야기다. 소설 쓰는 청년이 하루 종일 거리를 헤매다 술 마시고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무슨 모더니즘 소설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겠는가 싶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몇몇의 낯선 어휘를 제외하면 이 소설의 배경은 ‘2000년대’ 라고 해도 믿겠다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가까운 과거의 소설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근대의 풍경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다.

모더니즘은 원래 현실을 추상화한다는 개념에서 나왔다. 리얼리즘 문학은 현실 세계를 재현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면, 모더니즘 문학은 인간의 정서를 중시 여기면서 언어 자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또한 모더니즘은 근대 산업 사회에서의 개인이 느끼는 상실감과 소외감을 드러낸다. 소설「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드러내고자 한 것은 그 당시의 소설가 구보를 통해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거나 무기력한 상태로 방관자적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는 개인의 소외 문제라는 것이다. 

‘도시의 산책자’라는 용어는 현대시의 아버지라고 하는 보들레르가 <파리의 우울>에서 처음 언급한 말이다. 구보 씨는 ‘산책자’가 되어 서울의 거리를 걷고 있다. 전차와 재즈, 최신 유행의 모던 걸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하수구 시설이 되지 않아 똥냄새가 넘쳐나고, 골목 안에는 ‘문맹’의 어머니들이 돈 벌고 들어오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 아들은 아무리 소설을 써도 돈이 되지 않는다. 한 가족을 벌어먹여 살리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원고료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신문사로, 총독부 청사로 구직활동을 벌여보지만 역부족이다. 그래서 무조건 거리로 나서 보는 것이다. 어쩌다 돈을 번 친구들을 보면 거드름을 피며 술을 사고, 예쁜 여자도 끼고 있다. 그런 광경을 보면 지난날 맞선을 보았던 여자 앞에서 마냥 주눅이 들어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한 자신이 바보스럽기만 하다.

허나 어쩌란 말인가. 돈이 있어야 장가를 가고, 멋있는 여자를 들일 텐데……. 이게 소설가 구보 씨의 한탄 섞인 독백이었다. ‘하지만 예쁜 여자는 못 얻어도 좋다. 생활인으로 돌아가 소설을 쓰리라’는 다짐을 잊지 않는다. 그에게 막장드라마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던 것이다. 막장드라마는 자본 앞에 자존을 던져버린 마스터베이션이다.

<제주의소리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 시인 강은미.

 시인이자 글쓰기 강사인 강은미씨는 2010년 <현대시학>에서 ‘자벌레 보폭’ 외 4편으로 등단했습니다. 현재 제주대학교 창의력 글쓰기 지도자 과정 강의를 비롯해 NIE 전문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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