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 칼럼> 규모는 나중문제, 시작이 중요

와인이라고 하면 프랑스의 보르도 와인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실제 모습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그 일대 지역에 분포하는 양조장이 무려 1만개 이상이나 된다는 사실부터가 그렇다. 포도 농장마다 개별적으로 자기만의 와인을 생산해내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각자가 소규모로 와인을 빚어내고 있는 셈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샤토(châteaux)라고 불리는 가족경영 중심의 전통적인 포도원이 그 기본 단위다. 용어에 뜻에 따라 중세의 분위기가 넘쳐나는 고풍스런 성곽을 떠올리기 쉽겠으나 그렇지도 않다. 대체로는 작업장을 갖춘 일반적인 농장 가옥에 불과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농장 언덕배기에 허름한 창고 건물을 연상시키는 샤토도 전혀 없지는 않다.

농장 규모가 100 에이커가 넘는 경우도 있지만 기껏 2~3 에이커 정도로 운영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규모가 작은 농장끼리는 마을 전체적으로 공동 양조장을 운영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자부심은 한결같다. 와인 병에 붙여지는 라벨에 빈티지(생산연도)와 함께 명시되는 농장 이름이 그것을 말해준다.

현재 난관에 부딪친 제주 맥주 사업계획과 관련하여 보르도 와인의 경우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다. 규모에 구애를 받지 말고 일단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개별적인 소규모 샤토의 양조장들로 인해 ‘보르도 와인’이라는 세계적인 울타리가 형성된 프랑스의 사례를 제주도라고 이뤄내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보르도 와인의 경우만은 아니다. 맥주의 종주국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독일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독일에서 생산되는 맥주의 종류가 자그마치 4,000가지에 이를 만큼 각 마을마다 독특한 풍미의 하우스 맥주를 자랑한다. 역시 소규모일 수밖에 없다. 세계적인 브랜드로 자라잡은 뢰벤브로이나 크롬바커, 에딩거 등도 처음에는 그렇게 단촐하게 시작했을 것이다.

바라보는 범위를 넓혀본다면 프랑스나 독일에만 국한되는 얘기는 아니다. 유럽의 각 나라마다 지역적으로 올망졸망한 양조장을 갖추고 있다. 웬만하면 농장을 거느린 개인 식당에서도 와인이나 맥주를 생산해 고객들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유럽 여행의 재미는 멋있는 경치와 문화 유적을 살피는 것 말고도 이처럼 고장 특유의 음식과 가양주를 맛보는 데서도 한결 돋궈진다.

제주 맥주 사업의 발상도 원래는 지역 맥주가 바탕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일본 아오모리현 오이라세 지역의 맥주가 벤치마킹 대상이었다는 얘기도 들린다. 아사히맥주를 비롯해 삿포로, 기린, 산토리 등 유수한 브랜드가 활개치는 상황에서도 지역을 기반으로 무대를 착실히 다져가는 중이다. 맥주가 아니라도 특산품인 사과를 앞세워 음료수와 과자 개발에 노력하는 지역이 바로 아오모리이기도 하다.

제주 맥주가 오이라세 맥주 뿐만이 아니라 앞서의 보르도 와인이나 독일 맥주의 기본 단위를 이루는 아담한 농장 규모에서 시작하려 했다가 도중에 계획이 과도하게 부풀려진 측면이 없지 않다. 일단 제주개발공사가 주축이 되어 소규모로나마 사업을 시작하기로 잠정 결론이 내려졌다고 하니 원점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그동안 민간사업자 선정을 위한 세 차례의 입찰공모가 모두 무산되어 아쉽기는 하지만 외부 사업자를 끌어들인다는 계획 자체가 그렇게 바람직했던 것만은 아니다. 더욱이 요즘처럼 경제가 요동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격식을 갖춰 사업을 벌인다는 것이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할 우려도 있다. 입찰 참여를 고려하던 업체들이 마지막 단계에서 고개를 돌린 것도 그런 이유라고 보여진다. 

하지만 사업을 소규모로 시작한다고 해도 위험부담은 여전히 남아 있다. 위험 요소가 줄어든 것 뿐이다. 더욱이 국제자유도시 종합계획이 전반적으로 상당한 차질을 빚고 있는 상황에서 맥주사업에 대한 도민들의 눈초리가 따가운 것도 사실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의 호접란 농장사업도 애물단지로 전락한지 오래이거니와 자연사박물관 및 노면전차 사업도 전면 유보되거나 폐기된 상태다.

그런 점에서도, 맥주 사업은 거창하게 시작할 필요가 없다. 사업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것이 아니라 작은 규모로 시작해 차근차근 자리를 넓혀가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미 서귀포시 인근에 공장시설도 마련되어 있다니 다행이다. ‘제주 스피리트(Jeju Spirit)'라는 뜻에서 따온 ’제스피‘라는 이름도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맥주에 들어가는 청정 화산 암반수와 백호보리가 강점이다.

더구나 중국인들을 중심으로 외국인 관광객이 대폭 늘어나고 있어 기본적인 판매량은 어느 정도 확보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기후가 황량하고 겨울철이 긴 아오모리의 오이라세 맥주에 비해 훨씬 유리한 조건이다. 관광거점 도시로 이동하는 도중 점심을 먹거나 어쩔 수없이 하룻밤을 묵어야 하는 유럽의 시골 도시들에 비해서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늘 과욕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앞으로 제주 맥주가 실제로 나온다고 해도 처음부터 물량공세는 경계해야 한다. 요란하게 광고를 때리고 유통 물량을 늘린다고 해서 칼스버그나 하이네켄 같은 명품 맥주로 대접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제품으로 승부를 걸고 그것이 고객들로부터 서서히 인정을 받을 때에야 나름대로 권위있는 브랜드로 발돋움할 수 있다.

 

▲ 허영섭 칼럼니스트. ⓒ제주의소리

이런저런 이유를 떠나서도 적어도 제주도에는 지역 맥주가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향토 소주인 한라산이 있고, 막걸리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 목록에 맥주가 빠져서는 어딘지 허전한 것 같다. 내가 남보다 술을 좋아하기 때문이어서는 아니다. 제주도 여행에서 향토 맥주를 마신다는 것은 파리의 레스토랑에서 보르도 와인을 음미하듯이 그 자체로 신나는 일일 것이다. /허영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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