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멍 보멍 들으멍](6) 생을 마칠 때까지 가게 문 열겠다며… / 정신지

 

▲ 할망의 담뱃가게에는 마을 사람들이 마시다 남은 소주를 보관해준다. 그녀의 가게는 이 마을의 선술집이기도 하다. / 사진=정신지 ⓒ제주의소리

다섯 평 남짓한 공간에 과자며 술, 오만가지 잡화가 놓인 소위 말하는 ‘동네 구멍가게’. 시원한 물과 사이다를 사고, “얼마에요?” 물으니, 분홍색 옷을 입으신 할망(할머니의 제주어)이 고개를 쑥 내밀며 가게 안쪽에서 몸을 일으키신다. 사이다 한 병을 따 마시며 가게 이름이 뭐냐고 할망에게 물으니, 이름 같은 거 없다고 하신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 가게를, 할망 이름을 따서 ‘세화슈퍼’, 혹은 그냥 ‘담뱃가게’라고 부른다.

  많아 봤자 하루에 손님이 일고여덟 명이라는 할망의 담뱃가게는 올해로 31년째 한림읍의 한 마을을 지키고 있다. 예전에는 손님이 많아서 문만 열고 있어도 십만 원 이십 만원씩 하루 매상이 있었는데, 이제는 정말로 담배를 사러 오는 사람들 이외에는 사람 보기가 어렵다고 하신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내가 예상했던 대로 그녀의 입에서는 ‘마트’라는 말이 곧잘 나왔고, 이내 할망의 눈가에는 씁쓸한 주름이 잡혔다.
  “전에는 라면도 술도 상자로 사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마을에서 잔치라도 있으면 다 여기를 들렸었는데, 이제는 사람들이 뭐라도 돈 만 원어치 살려고 하면 죄다 마트로 가요. 나 역시 마트를 가니까. 왜냐하면, 물건을 마트에서 갖다 놔야 하거든요. 전에는 도매상이 있어서, 주문을 하면 트럭으로 갖다 주고 참 편했는데, 이제 그 도매상들도 다 망해버렸죠. 그러니 내가 직접 물건 하러 마트에 가는 거에요. 그런데, 마트에서 십만 원어치 물건을 하면 세금이다 뭐다 해서 일 할(10%)을 떼어가니까, 나 같은 구멍가게 주인에게 남는 게 있나. 마트에 돈도 뺏기고 손님도 뺏기는 거죠.”

 그런데도 할망은 장사가 좋다고 하신다. 1929년생인 그녀는 일본강점기 당시 구장(마을 이장)이던 아버지 밑에서 5남매와 자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전쟁 통에 물려 줄 재산도 없으니, 어디 가서 집 주소라도 쓰려고 하면 글공부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며, 있는 돈을 모조리 자식들의 교육에 투자했다고 한다.

  “그 당시, 등록금이 1원이었어요. 뻘겅헌(빨간) 돈인데 본적도 없죠? 학교에 1원50전 가져가서 50전은 저금하고, 1원은 등록금 내고. 그땐 1원도 아주 컸죠. 이발소에서 머리 끊는 데(자르는 데) 20전 했으니까.
 아버지가 구장을 한 10년 하셨는데, 왜정시대에는 공출(일제식민지하에서 전시 군사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1940년부터 강제로 시행된 제도)이라는 것을 냈어요. 아버지는 공출을 낼 때도 자식들이 먹는 양식은 몰래 남겨두었어요. 돈은 없었지만, 자식들 밥은 꼭 먹이고, 공부도 시켜주신 거죠.”

  국민학교(초등학교) 전교생 중에 여학생은 단 일곱 명뿐이었다던 그 시절. 마을 사람들은 여자아이가 학교에 다니는 것을 보고, “구장 딸은 대통령 되젠 헴신가(되려고 하는 것인가)?”, “지집년(여자아이)이 학교 댕경(다녀서) 뭐할거라?” 하며 비웃기도 했다. 배운 이를 부러워하기보다, 여자가 박식해지는 것을 경시하고 못마땅해 하던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어른이 되었다.

  그것이 오기가 되어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그녀는, 사실 농사를 지어본 적도 없다. 53세가 되어 담뱃가게를 시작하기 전, 그녀는 자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커리어우먼(career woman)이었다. 능력 좋은 부인을 두고 남편은 바람이 났고, 족은어멍(후처)을 얻어 집을 나갔다.  한평생 할망 혼자 열심히 일해서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독립시킨 것이다.

 

▲ 한림읍 어느 한 마을에 31년 째 마을을 지키고 있는 작은 담뱃가게가 있다. / 사진=정신지 ⓒ제주의소리

 

▲ 물 한 병 사고 “얼마에요” 물으니, 할망이 맨발로 걸어 나오신다./ 사진=정신지 ⓒ제주의소리

구장의 딸로 태어난 것이 그녀의 선택이 아니었듯, 일본강점기와 한국전쟁, 4.3사건을 겪어야 했던 것도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고달프고 슬펐던 기억은, 이 시대를 살아온 그 어느 노인의 입에서도 들을 수 있는 기억의 공통분모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와중에도, 먹고 배울 수 있던 특권층이었다. 그녀 역시 그것을 자각하며 살아온 걸까? 할망은, 힘들던 시절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목소리에 힘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보다 더 힘들게 산 사람들, 힘없이 죽어버린 사람들 이야기를 하며 연달아 맥없는 한숨을 쉬었다.

  분위기도 바꿀 겸, “이렇게 손님이 없는데 할머니는 왜 아직도 장사를 하세요?” 라고 물었다. 자식들도 독립해서 잘살고 있고 굳이 이렇게 홀로 장사를 해야 할 필요가 없을 듯해서 말이다. 그랬더니 할망은, “재밌으니까 하지” 라고 말씀하신다.

  그러고 보니, 할망의 발밑에 먹다 남긴 것 같은 소주 반병이 눈에 띄었다. 할망이 마신 거냐고 물으니, 부끄럽게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웃으신다.
  “아, 이거. 동네 사람들이 와서 여기 앉아서 술을 먹고는, 다 마시지 않고 보관해 놓고 간 거에요. 나중에 와서 또 마시려고.”

  충격적(?)인 사실에 빵하고 웃음이 터졌다. 술집에서 비싼 위스키를 병째로 주문하고 마시다 남은 것을 진열장에 이름을 써서 보관하는 것처럼, 이 마을 사람들에게 할망의 담뱃가게는, 잠시 들러 술 한 잔하고 가는 주막 같은 역할도 하고 있던 것이다. 자세히 보니, 가게 안 구석에 손 떼 묻은 간이 의자도 몇 개 놓여 있다. 할망 발밑에 소주병을 맡겨두고 검질(김의 제주어) 메러 나가고, 틈틈이 와서 술을 마시는 이들은, 할망과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일까?

  할망은 미인이다. 다른 마을에서 만난 84세의 노인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참 곱게 늙으셨다. 젊었을 때는 얼마나 더 예뻤을까, 하고 그녀의 잘나가던 시절 이야기를 물으니, “그렇지, 젊었을 때는 인기도 좋았어. 그런데 지금은 거울 ㅤㅂㅘㅇ이네(보아서) 어디라도 가젠 허민(가려고 하면), 나냥으로 거울보멍(나대로 거울보고) ‘아이고, 이쁜 얼굴이 다 어디 가부러서?(가버렸어?)’라고 혼잣말 허주.(하지).”라고 하시며 웃는다.

  할망은 오늘도 가게 안의 작은 방에 앉아있다. 손님이 와도 안 와도 가게 문을 활짝 열고, 바깥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키 낮은 시선으로 바라다본다. 그런 그녀에게 남은 바람은 없다. 단지 이렇게 생이 끝날 때까지 가게 문을 열고 있을 거라고 그녀는 말했다. 곳곳에 대형마트가 생겨나고 사람들이 외지로 빠져나가도, 여태껏 그래 왔던 것처럼 묵묵히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살다 가시겠지.
 “세월은 잠깐 하믄(하면) 가는 거여(거야).”라 말씀하시던 할망. 그런 담뱃가게 할망에게 무언가 신 나는 일 없을까? / 정신지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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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지는 ?

이 여자, 택시 기사들과 대화 나누길 즐기는 ‘수다쟁이’다. ‘역마살’도 단단히 타고났다. 거기에다 ‘촌스러움’까지 좋아하는 독특하고 야무진 여자다. 그녀의 이름은 정신지(32). 파주·부산 출신의 부모님 아래 서울서 태어나 여섯 살에 제주로 이민(?) 왔지만 스무살에 다시 서울로 나갔다가 일본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지역연구학’이라는 인문학을 전공했다. 그동안 세계 17개국의 섬·지방·대도시를 떠돌며 사람과 집단, 그 사회에 대한 이해를 넓혀왔다. 지난 봄, 일본의 국립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에서 문학박사 과정도 수료했다. 이제 12년간의 지구촌 유목 생활을 마치고, 태어난 곳은 아니되, 자신을 성숙하게 키워준 ‘진짜 고향’ 제주로 지난 봄 돌아와 부모님이 살고 있는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에 짐을 풀었다.  매주 한차례 <제주의소리>를 통해 제주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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