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미의 문학카페 > 19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컴퓨터 바탕화면에 깔린 들판풍경에서조차 건초에서 후~욱 올라오는 열기가 느껴진다. 그래서 시원한 느낌의 사진으로 바탕화면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한다. 여기저기에 저장해두었던 사진을 꺼내어 보다보니 시원한 듯 조심스러운 듯 내 마음에 흐르는 선율 하나가 있다. 비오는 날, 대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물방울 사진이다. 풀숲에서 기어 나온 물방울들이 사방에서 재잘대며 대나무를 타고 흐르다 숨을 잠깐 멈춘 음표들의 형상이다.

내가 음악가라면 이런 풍경에 어울리는 음표가 금세 그려질 것만 같다. 음악과는 거리가 먼 문화적 환경 안에서 자란지라, 풍경을 보고 클래식을 들으면서도 뭔가 떠오를 듯 떠오를 듯하기만 하고 음표를 그릴 수 없음이 안타까울 때가 있다. 그래서 요즘은 클래식과 좀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클래식 음악방송을 고정시켜놓고 늘 들으면서 다녀도 사실 클래식이 아직 내 귀에 밀착되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베토벤 곡인지, 모차르트 곡인지 구분하라 그러면 자신 없는 수준이다. 그러면서도 애써 들어보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소설을 비롯한 문학작품에서 그려지는 음악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그리고 고백하건대, 문학작품에서 거론되는 음악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알아보고 싶은, 알아야만 될 것 같은 그 어떤 강박증 같은 게 있다. 그것은 아마 무지를 감추고 싶은, 드러남에 대한 불안증 같은 것일 게다. 베토벤이 이 말을 들었다면 부리부리한 눈을 크게 뜨고 야단을 쳤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음악은 장식으로 듣는 게 아니다. 음악으로만 들어야 한다.”

간혹 소설 속에서 음악이 주는 영감이 그 소설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등장하는 베토벤의 현악4중주이다. 이 작품에서 베토벤의 현악4중주는 중요한 결단을 내리거나 어떤 전기를 암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베토벤의 현악4중주 16번은 베토벤의 마지막 작품이다. 베토벤은 이 곡의 4악장에 '신중하게 내린 결정',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 한다'라는 말을 써 두었는데 그 말들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여러 번 거론되고 있다. 마치 어떤 비장한 각오를 대변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고, 사랑의 숭고한 뜻을 되짚는 표현처럼 들리기도 한다.

밀란 쿤데라는 1929년 체코슬로바키아 브르노에서 태어났다. 쿤데라는 그의 아버지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다. 나중에는 그 역시 음악학을 공부했다. 이러한 음악적 배경은 그의 작품의 근간이 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950년에, 그는 잠시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학업을 중단 당했고, '반공산당 활동'이라는 죄목으로 공산당에서 추방당했다. 이 사건은 그의 소설《농담》(1967)에서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정치․사회적 배경을 깔고 있다.

또한 그의 음악적 소양과 당대의 철학적 화두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문학가로서 표현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고와 표현은 정치적 이견으로 해석하는 권력층에게는 눈엣가시가 되었고, 그것이 그의 자유를 감금하는 요소가 되었다. 그는 결국 체코가 소련군에 점령당한 후 시민권을 박탈당해 프랑스로 망명하기에 이른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프라하의 봄' 이후 러시아의 붉은 군대가 몰려올 당시의 프라하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소품처럼 등장하는 것들이 소설 전체를 이끌어가는 주요 복선이며 주제를 암시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소설의 서두에 등장하는 니체의 '영원회귀', 등장인물 토마시가 중요한 결정 앞에서 다시 한 번 되뇌는 '베토벤의 현악4중주', '니체의 영원회귀', 등장인물 사비나의 '키치'에 대한 생각 등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프라하의 봄'이라는 역사의 상처로 인해 늘 생의 짐 덩어리를 매달고 사는 듯한 네 남녀의 사랑을 통해 '존재의 가벼움' 혹은 '존재의 무거움'을 액자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결코 가볍다고도, 무겁다고도 할 수 없는 사랑, 그리고 삶. 그것은 '사는 게 다 그렇다!'라고 단정 짓기에는 어쩐지 허전하고 씁쓸한, 그러면서도 격정적인 베토벤 음악의 선율을 닮았다.

토마시는 장래가 촉망되는 의사였다. 어느 날 시골 카페에서 만난 여종업원 테레자가 트렁크 하나만을 들고 토마시의 아파트에 나타난다. 우연히 시골 카페에서 만나 농담을 주고받은 사이 뿐인데, 제 인생을 책임져달라는 듯이 나타난 테레자를 토마시는 얼떨결에 받아 안는다. 마치 "송진을 바른 바구니에 실려 강물에 떠내려 온 아기"처럼 느껴졌다고 그는 회상한다.

토마시는 그 어떤 여자도 운명이라고 여기지 않으며, 그렇게 짐으로 다가오는 만남을 원치 않는 자유로운 보헤미안이었다. 반면 테레자는 운명처럼 한 남자를 받아들이고, 그의 정신적․육체적 순결을 강요하는 순수함을 가장한 이기적인 여자였다. 그렇게 둘은 얼떨결에 만나 살림을 차리고 부부가 되었다. 그렇지만 토마시의 여성편력은 잠재울 길이 없었고, '사랑과 성은 서로 다른 두 세계'라고 설명하는 토마시의 말을 테레자는 이해하지 못했다.

한편, 토마시의 연인 사비나, 그녀는 화가였으며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누구를 억압한다는 것을 가장 비열한 짓이라고 생각했으며 무덤가에 비석을 세우는 것을 보며 "죽은 후에 제정신을 차리기는커녕 살아있을 때보다 더 호들갑을 떨고 있다"며 경멸을 표현하는 식이다. 그녀에게 적은 '키치', 키치는 모든 정치인, 모든 정치 행위의 미학적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키치로부터 스스로 추방당하면서 끊임없이 '미지의 무엇'에게로 달려갔다. 그러한 그녀를 사랑한 프란츠, 그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 안정된 일상을 누리던 교수였다. 그는 사비나에게 "사랑한다는 것은 힘을 포기하는 것이지."라고 말하며 가정을 포기하기로 마음먹는다. 그것이 선한 의지이며 책임 있는 선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비나는 다음 두 가지 사실 때문에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첫째, 그 말은 아름답고 진실하다. 둘째, 그 말 때문에 프란츠는 에로틱한 삶에서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토마시는 주간지에 공산당 간부를 비난하는 글을 썼다가 자신의 입장을 끝까지 철회하지 않아 시골로 쫓겨난다. 이때 결단을 하면서 떠올린 음악이 바로 베토벤 현악 4중주의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이다. 토마시와 테레자는 시골에 내려가 빌딩 청소부, 집단농장 트랙터 기사를 하며 보낸다. 사는 낙이 별로 없는 무미건조한 생활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개 카레닌이 있었다. 테레자에게 유일한 낙은 카레닌과의 소통이었다. 토마시는 나이가 들어도 늘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개 카레닌 만큼은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의지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카레닌도 나이가 들고, 병으로 죽게 된다. 카레닌의 몸을 나무 아래 묻어주면서 그녀는 깨닫는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열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또한 카레닌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어떤 이해관계가 없는 자발적 사랑이었다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그래서 토마시에게 고백한다. "토마시, 당신 인생에서 내가 모든 악의 원인이야. 당신이 여기까지 온 것은 나 때문이야.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을 정도로 밑바닥까지 당신을 끌어내린 것이 바로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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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녀와 합치기를 바라는 것일까, 아닐까?
그는 건너편 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앞마당을 멍하니 바라보며 답을 찾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리고 변함없이 소파에 누운 이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과거 그의 삶에 등장했던 어떤 여자와도 닮지 않았다. 그녀는 애인도, 부인도 아니었다. 그녀는 송진으로 방수된 바구니에서 꺼내져 그의 침대 머리맡에 내려놓인 아기였다.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그는 그녀 곁에 무릎을 꿇었다. 열에 들뜬 그녀의 호흡이 가빠졌고 희미한 신음마저 들렸다. 그는 그녀의 뺨에 얼굴을 부비며 잠에 빠진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속삭였다. 잠시 후 그녀의 호흡이 한결 고르게 변하더니, 그녀 얼굴이 그의 뺨을 향해 무심코 다가오는 듯 했다. 그녀의 입술에서 신열의 약간 텁텁한 냄새가 느껴졌고 그는 마치 그녀 육체의 은밀함 속에 파묻히고 싶다는 듯 그 냄새를 들이마셨다. 그 순간 그녀가 오래전부터 그의 몸속에 있어왔고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상상이 들었다. 불현듯 그녀가 죽고 나면 자신도 살아남지 못하리란 것이 너무도 당연한 진실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녀 곁에 나란히 누워 함께 죽고 싶었다. 그는 이러한 상상에 잠겨 그녀의 얼굴에 뺨을 대고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중략)

그들은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에 맞춰 스텝을 밟으며 오고갔다. 테레자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안개 속을 헤치고 두 사람을 싣고 갔던 비행기 속에서처럼 그녀는 지금 그때와 똑같은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아래쪽에서 희미하게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왔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마지막 문장이다. 아직 이야기가 다 끝나지 않은 것 같다. 토마시와 테레자가 살았나 죽었나를 다시 되짚어본다. 결론은 죽었다. 토마시, 테레자, 프란츠는 죽었고, 사비나만 미국에서 망명생황을 하고 있다. 허망하다고 생각하다가도 후련함과 아련함, 고요함에 몸이 내려앉는다. 그러다 벌떡, 격정적인 물음이 나를 일으켜 세운다. 너의 존재는 가벼운가, 무거운가?

‘프라하의 봄’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세계의 민주화 투쟁 그 이후, 우리의 삶은 자유로워졌는가. 생의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를 방황하는 이념의 사생아, 네 남․녀의 모습에서 과거를 보고 현재를 본다. 그리고 끊임없는 철학적 논쟁의 중심인, 육체와 영혼, 삶의 의미와 무의미, 시간의 직선과 영원, 존재 생성과 소멸, 그 가벼움과 무거움 등 딱히 뭐라고 답할 수 없는 무거운 질문들. 원래 질문 자체가 무겁진 않을 텐데, 그 물음을 앞에 두고는 존재가 한없이 무거워지는 건 어떤 공포감 때문일 것이다.

물음에 답할 수 있기 위해서는 프란츠처럼 힘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재의 나는 그럴 수 없음에 대한 슬픔이 공포로 위장한 것이다. 슬픔이란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는 것, 그것은 아마도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으며 내게 힘이 있는지 없는지 스스로를 늘 저울질하고 있다는 것일 게다. 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여! /강은미

 
▲ 시인 강은미.

 시인이자 글쓰기 강사인 강은미씨는 2010년 <현대시학>에서 ‘자벌레 보폭’ 외 4편으로 등단했습니다. 현재 제주대학교 창의력 글쓰기 지도자 과정 강의를 비롯해 NIE 전문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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