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의 숨, 쉼> 지혜와 함께 늙기

 이웃집 할머니의 사연인즉 이러했다.

 그날 밤 정확히 말하자면 밤이 아니고 새벽 2시 쯤, “와장창” 무엇인가 떨어져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고, 뒤이어 고양이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에 설핏 잠이 깨었으나 평소에 워낙 떠돌이 고양이가 설치고 다니는데다, 종종 요사스런 울음소리를 내는 일도 다반사다보니 무시하고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문득 할머니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아이구 게. 저녁에 고기 졸려나둔 거 고양이 들어와 엎었구나 게.’ 그 생각이 나자마자 할머니는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가 불을 켰다. 그런데 할머니의 예상은 빗나가고 부엌은 너무나 멀쩡했다. 무슨 일인가 이리저리 집안을 둘러 봐도 고양이가 들어온 흔적도 없고 잠잠하기에 그냥 돌아서려는데 어디서 죽어가는 사람의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혹 잘 못 들었나싶어 다시 귀를 귀울려보니 틀림없이 죽어가는 사람의 신음소리였다.
 
이쯤에서 나 그리고 당신이라면 어찌하였을지 묻고 싶다.
……
 할머니는 누군가 죽어간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얼른 문을 열어 밖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마당 한쪽에 웬 여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제야 할머니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할아버지를 흔들어 깨웠다.

들어보시라. 내가 전해들은 두 분의 대화다. 이 급박한 상황에도 웃음이 나온다.
 (실제로 이야기를 전하는 할머니도 잠시 웃음을 터트렸다.)

 “큰 일 낫수다. 사람이 죽어감수다. 빨리 119에 신고헙서 게. ”
 “뭐? 그 그래. 알았저. 경헌디 119가 몇 번이라?”
 “아이구 이 하르방아, 119가 119 아니우꽈?”
 “맞다, 게. 119번”

할머니는 급한 맘에 신고하라 소리 지르고 자다가 당황한 할아버지는 119가 몇 번인지 묻고……
어찌어찌 119불러 놓고, 수건 가져다 급한 대로 흐르는 피 막아놓고, 혹 할머니 집에 세 들어 사는 젊은 사람 중에 하나인가 싶어 방방마다 문 두려 보니 집안사람이 아닌지라 더 당황했다.
 옥상을 올려보니 옥상 위에 젊은 사람 둘이 서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기에 침착하게 불러내려 앞뒤를 맞춰보니, 할머니네 뒷골목 어디쯤에서 고스톱을 치다 경찰이 들이닥치니 도망 온다는 것이 담을 타고 할머니네 옥상으로……
 119오고, 경찰 오고, 낭자한 피 닦아내고 씻어내고 팔십 노부부는 그렇게 그 밤에 큰일을 치렀다.

그리고  다음날 이웃인 나를 만났다. 당신이라면 맨 처음 어떤 말을 하였겠는가?
자, 할머니의 말씀을 들어보시라.
 
“아이구 누구 엄마야,(팔순을 바라보는 할머니는 우리 아이 이름을 외우지 못하고 10년도 넘게 누구 엄마야로 부른다.) 나 이, 어제 완전 재수 좋았져.”

 그리고는 이미 앞에서 공개한 사건을 내게 술술 풀어놓으셨다.
내 이미 사연을 공개했으므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어안이 벙벙하실 것이다.

 ‘야, 누구 엄마야, 만약에 그 사람이 젊은 사람 집에 떨어졌으면 죽었을 거여. 새벽 2시난 젊은 사람 누게가 경 귀밝아 들었을 거니? 경해도 그 사람 살젠 우리 집에 떨어졋저 게. 이건 누가 도와도 도운 거여.  경허고 나가  2시에 잠 안 깨어났스민 어쩔뻔 했시니? 밤새 경 피흘리고 살아질까? 우리 집에서 사람 죽어나갈 뻔 했신디. 누가 도와도 도았져. 야, 난 완전 재수 좋았져.”

  나도 모르게 숙연해졌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야겠다는 측은지심을 가로막는 어떤 마음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 젊은 사람 집에 떨어지지 않고 잠귀 밝은  노인인 자신의 집에 떨어진 걸 다행으로 여기는 마음에서 평범한 이웃집 할머니가 청견보살(중생의 액난을 자신의 어깨로 대신 받아 어깨가 퍼렇게 멍이 들었다는)로 보이는 순간이다. 

 이것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다. 상황은 벌어진 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결해나갈 것인가는 오로지 나의 몫이다. 심장 떨리는 일을 당해 병원신세를 졌을 수도 있고, 그렇지는 않더라도 며칠 앓아누워 이 사람 저 사람의 위문을 받음직한 일을 너무나 담담하게 고맙고 다행한 일로 받아들이는 어르신을 보니 나이도 먹을 만 한 것 같다.

 살다보니 그런 것 같다. 행운은 얻지 못해도 본전이나 다행을 얻지 못하면 바로 불행으로 떨어진다. 그러니 부질없이 행운을 꿈꿀 일은 아니다.

 몸은 물질이니 늙어갈수록 약해지고 허물어진다. 그렇다고 마음까지 허물어질 텐가. 마음만 먹으면 젊은이보다 더욱 아름다워지고 강해지는 것도 있다. 두말할 것 없이 지혜다. 늙은이의 힘은 지혜다. 아름답고도 강한 보석, 다이아몬드와 같은 지혜를 한껏 뽐낼 수 있는 때가 바로 노년이 아닐까?  부디 지혜와 동무하여 늙을 일이다.

 나 역시 늙어서 나이 헛먹었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고 명심하여 읽는 좋은 글이 있어 소개한다.

                   노년의 지혜

나이가 들면 나서지 말고 미운 소리 우는 소리
헐뜯는 소리 그리고 군소리 불평불만일랑 하지를 마소.
알고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도 적당히 아는 척
어수룩하소. 그렇게 사는 것이 평안 하다오.

상대방을 꼭 이기려고 하지 마소.
적당히 져주시구려 한 걸음 물러서서 양보하는 미덕이
지혜롭게 살아가는 비결이라오.

돈 욕심을 버리시구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졌다해도
죽으면 가져갈 수 없는 것. 많은 돈 남겨 자식들
싸움하게 하지 말고 살아있는 동안 많이 베풀어서
바다같이 넓은 덕을 쌓으시구려.

그렇지만 그것은 겉 이야기일 뿐 정말로 돈을 놓치지
말고 죽을 때까지 꼭 잡아야 하오. 옛 친구 마나거든
술 한 잔 사 주시고 불쌍한 사람 보면 베풀어 주시고
손주 보면 용돈 한 푼 줄 돈 있어야 늘그막에 내 몸
돌봐주고 모두가 받들어 준다오.
우리끼리 말이지만 이것은 사실이라오.

지남 옛일들일랑 모두 잊고 잘난 체 자랑일랑
하지들 마오. 우리들 시대는 지나가고 있으니
아무리 버리려고 애를 써 봐도 가는 세월을 잡을 수가 없으니
그대는 뜨는 해 나는 지는 해 그런 마음으로 지내시구려.
나의 손자 그리고 이웃 누구에게든지
좋게 뵈는 마음씨로 늘 좋은 이로 살으시구려.
총명을 잃으면 안 되오. 아프면 안 되오.
그러면 괄시를 한다오.

아무쪼록 건강하게 오래 살으시구려. /산길(김희정)

    
▲ 산길(김희정). ⓒ제주의소리
        글쓴이 산길은 “연꽃을 좋아하고 닮고 싶어합니다. 어른뿐만 아니라 아이도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시를 쓰고자 정진하고 있지요. 제 시를 좋아해주고 저와 이야기 나누기를 좋아하는 바람섬과의 인연이 인터넷신문 <제주의 소리>로 이끌었네요. 컴퓨터와 별로 친하지 않은 제겐 참 놀라운 일이지요”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숨, 쉼>은 제주에서 나고 자란 전직 기자 출신의 ‘바람섬(홍경희)’과 10년 전 제주로 결혼이민(?) 온 아동문학 작가 ‘산길(김희정)’이 주거니 받거니 제주와 제주에서의 삶을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앞으로 이들은 <숨, 쉼>을 통해 빠르게만 달려가는 세상, 숨만큼이나 쉼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전해줄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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