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기억여행, 난징대도살기념관 그리고 아이히만
8월의 기억여행, 난징대도살기념관 그리고 아이히만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경훈의 제주담론> 上 아! 8월의 아시아여, 난징으로 떠난 '기억여행'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과거를 되풀이한다

갈수록 무더워지는 이 여름, 4․3평화재단의 난징기념관 견학단에 끼어 2003년 방문에 이어 두 번째로 난징을 찾을 기회가 생겼다. 그 당시 난징기념관의 방문은 나에겐 충격이었다. 특히 폐허의 건축물 잔해로 총검의 형태를 본떠 만든 거대한 조형물에 선명히 박힌 300,000이라는 검은 글씨와 기념관 입구의 천여 구의 난징대도살 당시 희생자들의 뼈들로 이루어진 ‘만인갱’, 마치 한라산 고목의 뿌리들이 얽힌 것처럼 반쯤 발굴하다 보존한 뼈와 뼈로 이루어진 시신들(물론 그것과 같은 장면은 제주에도 있었다. 바로 정뜨르비행장 4․3유해발굴의 현장에서). 그 강렬한 이미지들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의 뇌리에 남았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2007년 난징기념관은 난징대학살 70주년에 맞춰 18개월간의 보수와 정비 작업을 마치고 기념관을 확장 개관했다. 대대적인 증개축을 하고 전시기법도 아주 세련된, 중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한 만큼이나 괄목할 만하게 변했다는 사실을 이미 다녀온 사람들에게 전해 들은 지 오래다. 그래선지 기념관 방문을 앞두고 약간은 들뜬 기분이었다.

왜냐하면, 4.3평화기념관과의 꽤 질긴 인연으로 인해, 국가폭력이나 양민학살을 다룬 기념관들을 공부하는 마음으로 돌아보는 일이 습관이 되어버린 듯, 또는 비슷한 사건을 다룬 기념관들은 남의 일 같지 않아선지 꽤 유심히 보게 되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떠나기 이틀 전, 2005년 MBC의 창사특집스페셜 프로그램으로 방영되었던 <세계를 뒤흔든 순간-난징대학살> 3부작을 다시 보았다. 오랜만에 다시 보면서 내 기억 속의 잊혔던 난징의 이야기들과 이미지들이 새롭게 살아났다. 그와 함께 몇 년 전에 보았던 영화 <난징난징>과 중국판 쉰들러였던 독일인 실존인물 욘 라베의 이야기를 다룬 <존 라베(영어식 이름)> 등이 함께 떠올랐다. 다큐는 난징대학살의 이야기를 1, 2, 3부에 걸쳐 다루면서 난징의 문제를 영어로 출간한 《난징의 강간》의 저자 아이리스 장의 스토리와 뜻밖의 자살과 파장을 다루고 있다.

2부는 진실게임으로 아이리스 장으로 인해 촉발된 난징대도살의 실제들을 파헤친다. 특히 일본의 부정파들의 견해와 참전군인들이 남긴 다양한 자료와 증언을 통해 그 파장을 다룬 것으로 일본 내 우익군국주의자들의 치졸하고 옹색한 변명과 궤변을 다룬다. 3부는 증언-1937년 겨울로 난징전 참전군인들의 인터뷰와 중일전문가들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엮어간다.

이미 보았던 다큐를 되새김하는 터라 특별한 느낌은 없었지만, 이번에 보면서 새삼 놀라운 것은 한 가지는 여전히 진실과 사실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괴물들(?)’의 존재였다. 특히 90세가 넘은 일본 농촌의 평범한 촌로들이 놀랍게도 아이히만이 전범재판 당시 뱉었던 말을 똑같이 내뱉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 그 당시 사진 속의 일본군들은 분명 괴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마을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전장에서 돌아온 지금, 90세에 이른 그들은 여전히 정겨운 촌로들이다.

살아 있는 건 모두 죽이라고 해서 모두 죽였어!(난징전 참전 사병 33연대 12중대) 다 죽이라고, 모든 집을 태워버리라고 명령을 받았어. 그래서 불을 질렀지! 우리는 명령을 받고 움직였으니까 하기 싫더라도 어쩔 수 없었지.(난징전 참전 사병 15사단 33연대) 중국인의 희생은 전쟁 중에 일어난 일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난징전 참전 15사단 33연대 6중대)

나는 톱니바퀴 하나의 이에 불과했다.(아이히만)

분명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1월 말까지 6주 동안 30만에 달하는 중국인을 도살한 ‘학살기계’였던 그들, 그 광란의 학살극의 주인공들이었던 그들. 명령은 위에서 내렸지만, 그 악의 잔치에서 광기에 도취되어 대학살의 역사를 연출해 낸 그들의 주둥아리에서 내뱉는다는 말이 고작 “그렇게 하라니까 했을 뿐이야.(우리는 죄 없어!)”라니.

그 선한 눈빛과 착한 노인들이 젊은 날 자신의 손끝으로 30만을 절명으로 몰아갔던 그 불지옥의 기억을 이렇게 간단히 넘어서다니. 놀라운 일이다. 인간의 저 악마적인 확장 가능성이라니. 한나 아렌트가 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재판을 보면서 그를 이해하고 분석하려고 매달렸는지를 이해하는 순간이었다.

아! 아시아의 8월
-‘아이리스 장’ 이야기와 책임지지 않는 제국, 변명하는 일본

▲ 난징기념관에 세워진 아이리스 장의 반신상. 손에는 《난징의 강간》이 들려 있다.

8월은 동아시아의 제 국가들과 민족들에게는 특별한 달이다. 바로 근대의 초입에 만난 20세기의 끔찍한 경험과 기억 때문이다. 또한 일본들에게도 특별하기는 마찬가지다. 열강들의 각축의 시대, 탈아입구를 모토로 그야말로 욱일승천하던 제국 일본이 침몰한 달이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은 중국대륙과 인도차이나 그리고 일본 열도에 유사 이래 최악의 트라우마를 남기고서야 비로소 마무리되었다. 1939년 11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신호탄이 된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 5월에 유럽에서 먼저 총성이 멎었으며, 급기야 1945년 8월 아시아에서도 일본의 무조건적 항복으로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이 두어 줄에 서술된 그 기간, 인류는 역사상 전 지구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전쟁의 시대를 살았다.

물론 우리나라는 그 후 4․3에서 시작된 또 다른 더 가혹한 전쟁의 시대와 냉전이라는 늑대의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어쨌든 8월이면 아시아의 나라들은 이런저런 기념식과 기억의 제의들을 치러야 하며, 그 와중에 중국대륙에서 벌어진 1937년 12월과 1938년 1월 6주간의 ‘난징대도살(南京大屠殺)’의 기억을 마주해야 한다.

이 사건의 전말을 전 세계에 부각시켰던 중국계 미국인인 아이리스 장(장춘루어/张纯如)은 난징대도살에 대한 책을 남겼다. 바로 《난징의 강간-제2차 세계대전의 잊혀진 홀로코스트(The Rape of Nanking: The Forgotten Holocaust of World War II), 1997》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6년에 <역사는 힘 있는 자가 쓰는가(윤지환 옮김/미다스북스)>로 번역되어 출간된 바 있다. 서문을 보자.

“인간이 인간에 대해 저지른 만행을 기록한다면, 그 연대기는 길고도 참혹한 이야기로 가득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끔찍한 이야기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저질러진 난징대학살에 비견될 만한 정도와 규모를 지닌 사건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녀는 또한 “나찌의 유대인 학살이 600만 명이라 하고, 스탈린은 4천만 명의 러시아인을 죽였지만, 이것은 몇 년에 걸쳐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난징대학살은 단 몇 주에 걸쳐 집중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중국의 한 도시에 지나지 않는 난징의 사상자 수는 제2차 대전 전체를 놓고 볼 때, 유럽국가 전체의 사상자수를 능가한다.

사실 난징대학살의 희생자를 최대 26만 명에서 최대 35만 명으로 잡는다 해도 이 수치는 미군의 도쿄공습보다 많고 전쟁막바지의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탄 투하 때보다도 많다. 죽은 사람들이 손을 잡으면 난징에서 항저우(杭州)까지 222㎞를 이을 수 있고, 흘린 피의 양은 1200t에 달한다.”면서 “시체는 기차 2500량을 가득 채울 수 있고 시체를 포개놓는다면 빌딩 높이에 달할 것”이라고 적었다. (《난징의 강간》 중에서)

▲ 《난징의 강간》영문본 표지사진. 이 책은 정작 일본에서는 출간되지 못했고, 이 책과 관련된 일본인들이 쓴 책만 봇물을 이루었다.

 

《난징의 강간》은 아이리스 장이 <난징대학살>에 관해 쓴 논픽션 책으로 1997년 난징대학살 6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되자마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은 저자의 조부모가 학살을 피해 탈주했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난징대학살에 관한 광범위한 자료조사에 기초해 서술했다. 또한 일본군의 난징점령기간 동안 무력에 의해 중국인들에게 자행된 잔혹한 범죄행위를 담고 있다.

아이리스 장은 《난징의 강간》을 쓰기 위해서 2년 동안 자료조사와 수집에 매달렸다. 또한 난징대학살의 생존자들의 증언을 듣기 위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난징을 방문하기도 했다. 조사과정에서 그녀는 미국선교사의 일기와 독일인의 일기, 일본 퇴역병의 고백, 저널리스트들의 글들, 당시의 자료들, 당시 난징의 현장을 기록한 존 마기(Jhon Magee)의 영상물 등 생생한 자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장은 일본에서 조사를 하지는 않았다. 이는 후에 그녀에 대한 공격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

아이리스 장의 조사자료 중 가장 중요한 자료는 두 사람의 일기였는데, 첫 번째 일기는 독일 나치당의 일원이자, 비군사지역으로 설정한 난징국제안전지대의 지도자였던 욘 라베(John Rabe)의 것으로, 라베는 1910년에는 베이징(나중에 난징)에 있는 지멘스 AG(Siemens AG)의 중국법인에서 활동했다. 이 기간 중국인들은 그를 ‘난징의 살아있는 부처’라고 불렀다. 

대학살 기간 동안 그는 난징에 있었는데, 1937년 11월 22일 그곳의 다른 외국인들과 <국제위원회>를 조직하고, 중국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난징대학교와 진링예술과학대학, 미국대사관과 관청들이 있는 구역에 <국제안전지대>를 설치했다. 그는 또한 일본대사관과 히틀러에게 끊임없이 난징에서의 학살을 묘사한 편지를 보냈다. 라베와 그가 설치한 안전지대 내의 행정 책임자들은 일본군의 잔학한 학살로부터 중국인들을 보호하고자 노력했다. 라베는 일본군에게 그의 나치당원증명서를 제시하여 학살을 막아보려는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지만, 늘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8년 2월 28일 독일의 소환으로 난징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활동은 적어도 대학살기간 동안 20여 만 이상의 중국인을 구제하게 된다. 그의 일기는 이러한 당시의 활동과 실상을 담은 생생한 기록물이었다. 이 기록들에는 외국인 목격자의 증언, 신문기사, 라디오 방송, 전보, 사진 등도 기록되어 있었다.

▲ 난징기념관의 국제안전위원회 코너. 당시 활동했던 외국인들의 활약상을 소개하고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두 번째 일기는 미국인 윌헬미나 보트린(Willhelmina Vautrin)의 것으로, 중국인들은 그녀를 미니 보트린(Minnie Vautrin)으로 불렀다. 대학살 당시 진링(金陵)여자예술과학대학 교육학부 학장이자 연구책임자로 일하던 미니 보트린은 대학교 구역를 안전지대로 만들어서 약 만여 명의 여자와 어린아이의 생명을 살렸다.

일본군들이 보호구역임을 증명하는 문서를 찢고 사람들을 끌고 가려 하자 일본대사관에까지 직접 가서 항의를 한다. 그 후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난징 철수를 권고받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답한다. “지금은 떠날 때가 아닙니다.”라고. 그러나 결국 지친 몸으로 1940년 미국으로 귀국한 그녀는 이듬해 5월 14일, 인디애나폴리스의 작은 아파트에서 창문과 문틈을 온통 테이프로 막고 가스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녀가 목격한 난징에서 겪은 참상의 환영에 시달리며, 더 많은 생명을 구하지 못한 데 대한 자책이 그녀를 자살로 몰아갔던 것이다.

그녀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분노에 차서 그들의 혐오스러운 짓들을 응징할 힘이 내게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만약 일본의 여성들이 이런 혐오스러운 이야기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부끄러워할까.” 그러나 일본군과 일본정부, 일본군출신의 선한 할아버지들은 절대 이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이 일기들은 저자들의 목격담으로 생생한 난징대학살의 진상을 보고하며, 난징국제안전지대의 환경과 활동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 최근 몇 년 사이 난징대학살을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아이리스 장이 바랐던 결실인지도. 왼쪽부터, 영화 <존 라베(John Rabe)>, 감독: 플로리안 갈렌베르거(Florian Gallenberger), 2009년 작품 / 남경 남경(南京!南京!/City Of Life And Death), 중국, 감독: 루추안(Chuan Lu), 2009년 작품 / <진링의 13소녀(金陵十三钗/The Flowers of War)>, 감독: 장예모, 베트맨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크리스찬 베일’이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된 영화, 2011년 작품

아이리스 장은 욘 라베를 ‘난징의 오스카 쉰들러’로, 미니 보트린을 ‘난징의 안네 프랑크’라 칭했다. 라베의 일기는 800쪽이 넘는 분량이며, 난징대학살의 실상을 가장 상세히 묘사한 설명들이 포함되었다. 미니 보트린의 일기는 대학살에 관한 그녀의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을 자세히 서술했다. 이러한 자료들과 생존자들의 증언, 당시의 통신문이나 메모들, 외교문서들에 기초해서 아이리스 장은《난징의 강간》을 완성한다.

《난징의 강간》은 난징대학살을 서구사회에 처음으로 소개한, 영어로 쓰인 중요한 논픽션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에도 세계의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다. 발간 당시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목록에 10주간 올라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정작 대학살의 당사국인 일본에서만은 출간되지 못하였고, 도리어 이 책의 가치를 폄훼하고 흠집 내는 등 공격하거나, 난징대학살 자체를 부정하거나, 변명하기 위한 책들의 출판이 봇물을 이루었다. 심지어 그 비판서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이리스 장은 《난징의 강간》을 통해, 일본 정부가 중일전쟁 이후 벌어진 전쟁 범죄를 부끄러워할 만큼 충분히 사과하지 않았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그러므로 일본정부가 전쟁기간 동안 자행한 범죄에 대해 사과해야 하고, 희생자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캠페인을 벌였다. 이 책의 출간으로 난징대학살은 미국의 정치적인 이슈로 떠오른다. 그녀는 1997년에 일본 정부가 전쟁 범죄에 대해 사과를 하도록 제기된 미 의회결의문의 주요한 홍보인 중 한명이 되어, 1999년 당시 영부인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을 만나기도 한다.

 

▲ 난징기념관 내의 아이리스 장 관련 전시 벽면과 《난징의 강간》 집필 당시 자료들

하지만, 책임질 줄 모르는 일본은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하고, 이 사건을 축소 은폐시키는 데 몰두한다. 또한 일본 내에서는 극우파들이 주축이 된 난징대학살 부정파라는 일군의 세력이 형성되어 전화와 팩스, 이메일 등을 이용해 아이리스 장에게 암살 위협, 협박 등을 지속적으로 자행했다.

또한 일본의 극우파들은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의 협박을 가하기도 했다. 급기야 책이 출간된 후 일본의 ‘난징대학살 부정파들’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우울증까지 앓았던 ‘아이리스 장’은 《난징의 강간》을 쓴 지 7년 만인 2004년 11월 9일 캘리포니아주 클라라 카운티의 남쪽 17번 고속도로변에 세운 자신의 차 안에서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 36세였다. 진실과 대면하고자 하지 않은 일본의 극우파들과 정부는 결국 난징을 두 번 강간했고, 난징을 두 번 도살한 것이었다.

기억할 과거마저 없는 무기억의 국가

현재에도 일본에서 잘 나가는 정치가인 현 도쿄도지사인 ‘이시하라 신타로’는 “일본의 난징대학살사건은 중국인들이 지어낸 거짓말이다. 이로 인해 일본은 국가 이미지에 손상을 입었다.”라는 망언을 직격탄으로 날렸다. 또한 1994년 법무상인 ‘나가노 시게토’는 “난징의 강간 등 일본군의 잔혹행위는 모두 날조된 것이라 생각한다.

일본은 붕괴 직전에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가 사임하고 말았다. 일본정부의 각료들은 한국의 정신대문제와 함께 난징대학살을 부정하는 망언을 일삼는 일이 허다하다. 결국 《난징의 강간》이 나오고 난 다음 벌어진 소위 <난징대학살 부정파>들의 배후가 그들이며, 그들이 곧 몸통이기도 한 것이다.

망언은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는데, 올해 2월 나고야 시장인 ‘가와무라 다카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의 행위와 관련해 “통상적인 전투가 있었지만, 난징(대학살)사건은 없었던 것으로 본다.”는 망언으로 중국인들의 분노를 샀고, 1978년 이래 34년 동안 자매결연을 통해 맺어온 두 도시 간의 우정도 깨지고 말았다. 난징시는 결국 나고야시와의 교류 단절을 선언했다.

▲ 난징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100인 목 베기 살인시합의 두 주인공을 소개한 당시 도쿄니치니치신문의 12월 13일자 기사. “100인 목 베기 기록 초과, 무카이 106-노다 105.”(난징기념관 전시실 내 사진)

난징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100인 목 베기 살인시합의 두 주인공을 소개한 당시 도쿄니치니치신문의 12월 13일자 기사. “100인 목 베기 기록 초과, 무카이 106-노다 105.”(난징기념관 전시실 내 사진)

이 망언의 전통은 뿌리 깊은 것이어서 당시 중지방면군(中支方面軍) 사령관 겸 상해파견군 사령관을 지낸 ‘마쓰이 이와네’는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긴 세월 동안 나는 이 전쟁을 중국인들이 자기 반성을 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들을 증오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라는 망언으로 전범재판을 지켜보던 이들을 분노케 했다.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30만을 도살해야 했다니? 그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또한 악명 높은 ‘살인시합’을 벌였던 ‘노다 다케시’ 중위와 ‘무카이 도시아키’ 중위는 둘 다 150명 이상을 죽인 사실을 끝내 부인했고, 나중에는 변명으로 일관했다. 둘은 난징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19세기 말 탈아입구(脫亞入口)를 외치며, 동아시아를 전쟁의 포화로 끌고 간 제국의 기억을 일본인이나 아시아인들이나 모두 가지고 있다. 다만, 그 기억의 방식과 지난 역사를 회고하는 방향은 아주 다른 것이다. 그리고 그 다름은 난징대학살의 부정에서 갈린다. 난징의 부정(不正)은 곧 일본제국주의의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부정이며, 그들의 죄책감이 결여된 역사인식과 더 나아가 개인으로서의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철학적인 문제를 남긴다.

아이리스 장이 《난징의 강간》을 집필하면서 늘 가슴에 새겨두었다는, 미국의 철학자이자 시인인 조지 산 타야나(Gorge Santayana)가 말한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과거를 반복하기 마련이다.”라는 경구는 현재의 일본을 가늠하는 바로미터다. 결국 반인륜적 전쟁범죄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당사국들에게 사과하기보다는 축소, 은폐,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소위 ‘보통국가’로 가고자 하는 일본은 기억할 과거마저 없는 무기억의 국가이기도 하다.

최근 중국의 팽창으로 인해 그 지위가 흔들리고 있는 미국의 동아시아의 전략에 기대어 기회만을 엿보는 재무장과 군국주의와의 단절 없는 일본정부의 입장은 언제든 <난징대도살>의 역사를 반복할 수 있는 시한폭탄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착한 이웃이 아니라 언제든 악마의 전쟁기계로 표변할 수 있는 위험국가라고 이웃한 아시아국가들은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난징을 부정하는 한, 일본은 <난징의 강간>을 재현할 수 있는 위험국가이며, 잠재적 범죄국가이고, 비정상적인 국가라 바라볼 수밖에 없다.

▲ 인간이 조형한 이 풍경을 무엇이라 부를까? 당시 백기를 앞세우고 투항한 중국군 포로 2만 명을 양쯔강 강둑에서 반달 모양으로 둘러 싼 후 한꺼번에 기관총으로 참살한 장면(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난징난징>에서 재현된 장면).

독일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해 전쟁배상금으로 1,240억 마르크, 달러로 600억 달러를 지불했다. 반면 일본은 전쟁 범죄에 대해 어떠한 배상도 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정으로 전쟁 배상은 일단락되었다고 강변하며 버티고 있다. 하지만, 이 조약의 5조 14항은 “일본은 연합국에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

현재 일본의 자산이 충분하지 않다면, 경제상황이 호전된 후 피해와 고통에 대해 충분한 배상을 해야 하며, 동시에 다른 의무 또한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난징의 강간》 중에서) 이 규정은 언제나 유효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상황이 되도록 그 환경을 조성한 것은 미국이다. 미국의 필요에 의해 난징은 은폐되기도 하였으며, 미소의 냉전구조를 구조화시키기 위해, 아시아에 대한 전략적 목적에 의해, 일본이 전쟁범죄의 책임과 의무를 방기하도록 하는 데도 일조했다.

군국주의가 싹을 자르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의 군비확장의 길을 터 준 것도 미국이다. 미국의 우산 아래서 일본은 아시아 제 국가들에 대한 전쟁책임으로부터도 유보와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오늘에도 차세대 일본지도자로 부상하고 있는 오사카 시장이 또 한 번 망언록을 추가했다. 일본의 차기 유력주자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이 “(옛 일본군) 위안부가 (일본)군에 폭행·협박을 당해서 끌려갔다는 증거는 없다.”고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을 부정하는 발언을 했다.(한겨레 신문 기사)

▲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제주의소리

일본의 2대 도시 도쿄의 ‘이시하라 신타로’ 도지사와 오사카의 ‘하시모토 도루’ 시장이 비정상국가의 거봉을 이루고 있다. 오늘, 난징대도살이 다시 중요한 이유는 바로 불온한 열도의 풍경 때문이기도 하다.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제주의소리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0 / 400
댓글 4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순 추천순 이 기사에 달린 댓글 4
대한민국 2012-08-24 16:10:43
이런 살인마 집단 일본 잔제를 문화라 말하는 사람.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도 잘못된 선택의 뼈아픈 교훈으로 기억"

제민일보 편집국장의 발언.

이 사람이 진정 대한민국 사람인가 .

대한민국 국민앞에 실언임을 사과하라.
6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