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훈의 제주담론> 中 난징대도살기념관 현장방문기

▲ 난징기념관 진입부 전경. 배와 검 형상의 건축물과 조형물 <가파인망>이 어우러져 난징대학살의 아픔과 슬픔을 한 공간에 조형해내고 있다.

난징기념관의 정식 명칭은 <침화일군남경대도살우난동포기념관(侵华日军南京大屠杀遇难同胞纪念馆)>, 우리식으로 옮기면 <중국침략일본군남경대학살참사동포기념관>이다. 이 명칭은 중국의 지도자 등소평이 친히 지었다고 한다.

▲ <가파인망(家破人亡)>. 집안은 파괴되고 사람은 죽어 나간다는 사자성어가 제목인 이 작품은 중국 조각원 원장이며, 세계적인 조각가인 우웨이산(吳爲山)  난징(南京)대 교수가 제작했다. 높이 10여 미터에 이르는 이 청동조소는 난징대학살 당시 죽은 자식을 안고 통곡하는 어머니의 형상을 묘사한 작품으로 난징기념관 전체의 테마를 상징한다.

이 기념관은 1985년 8월에 정식으로 세워졌으며, 1994~1995년, 2005~2007년 두 번에 걸쳐 확장 개축이 이루어졌는데, 2007년의 개축은 기념관을 완전히 새로 건립한 수준이었다. 기념관의 부지면적은 7만 4천㎡이며, 건축면적이 2만 5천㎡, 전시면적만 9천800㎡에 달하는 기념관이다. 기념관은 전람집회 구역, 유적추모 구역, 평화공원 구역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2007년 12월 13일 대학살 70주년에 맞추어 개관했다. 전시관의 외관은 <평화의 배>로서 하늘로 치솟은 뱃머리를 조형화했다. 측면에서 볼 때에는 끊어진 군도(軍刀)와 같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검과 쟁기의 입체적인 모습처럼 보인다.(주성산 관장의 해설) 이 새 전시관의 설계는 화남 이공대의 하경당 교수가 담당했다고 한다.

기념관은 <가파인망(家破人亡)>이라는 10m가 넘는 대형 청동상을 지나, 기념관 진입부의 기다란 벽을 이루는 기념관 외벽을 따라 물이 담긴 수조공간과 수면 위에 설치된 <시민피난>이라는 조소군(彫塑群)을 지나야 정문으로 진입하게 되어 있다. 이 부분은 필자가 이 기념관에서 가장 칭찬해주고 싶은 부분이기도 하다. 기념관 정문에 들어서기 이전의 전이공간으로서 이 공간은 지극히 서정적이다. 처참한 조소상들을 보면서 진입해 들어가는 동안, 방문객들에게 관람을 위한 마음의 준비가 자연스레 이루어지게 하는 공간적 장치이기도 하다.

 

 

▲ 난징기념관 정문의 <시민피난> 행렬. 난징대학살에 대한 깊은 감성적 해석과 개성 있는 조형적 완결성은 <가파인망>과 함께 이 작품 하나로 기념관 전체를 대표한다는 느낌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 공간을 지나 정문을 들어서면, 두 개의 틈이 벌어진 <원혼의 외침>이라는 테마조형물을 만나게 되며, 탁 트인 자갈이 깔린 넓은 추모집회광장을 만나게 된다. 그 광장의 건너편에는 <재난의 벽>이 있는데, 검은색 화강암에 중국어, 한국어, 영어 등 12개 국어로 <참사자 300,000>을 새겨 넣었으며, 그 좌우의 앞에는 십자가 형상의 <표지비석>과 <평화의 종>이 놓여 있다. 표지비석에는 ‘1937.12.13-1938.1’을 새겨 넣었는대, 이는남경대학살이 벌어진 6주간의 기간이다.  <평화의 종>은 일본에 거주하는 화교들의 기부로 만들어져 66주년에 기증된 종으로 매년 12월 13일 기념일에 타종된다.

▲ 하늘에서 본 기념관 전경. <평화의 배>라고 이름 붙여진 기념관 신관의 전체 모습이다. 끊어진 칼과 평화를 실은 배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매우 세련된 건축물이다.(기념관 도록 수록 사진)

기념관의 전시는 크게 2개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지하층과 1층의 전시인 <인류적 대참사(人類的 浩劫)-중국침략일본군의 남경대학살역사진실전(侵华日军南京大屠杀史实展)>과 2층의 전시인 <승리 1945 테마전(胜利 1945专題展)>으로 이루어져 있다.

▲ <집화광장>과 <재난의 벽>, 그 좌우에 <표지비석>과 <평화의 종>이 위치해 있다.

기념관으로 들어서면,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 전체 주변으로 거대한 난징성의 폐허가 조성되어 있다. <전화 속의 남경> 부분이다. 그리고 이 공간을 나서면, 갑자기 깜깜한 추모공간이 나타나는데, 바로 <서정(序厅)-참사자 300,000>의 공간이다. 천장에 고딕의 굵은 글씨로 숫자가 박혀 있다. 우리가 ‘4·3’이라는 숫자의 상징성에 매달리듯 난징대학살은 300,000이라는 숫자로 표상되는 듯하다. 이 숫자는 기념관과 평화공원 곳곳에 새겨져 있다. 마치 우리의 시각에 각인시키려는 듯 말이다. 사실, 주성산 관장의 말처럼, 일본인들이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강박의 숫자’일 수도 있다.

▲ 기념관의 초입 로비와 계단을 지나 맨 처음 만나는 공간인 <서정-참사자 300,000>. 천장에 난징성의 무너진 성벽과 당시의 남경의 지도를 새겨 넣었다. 전면 벽의 중앙에 있는 화환에는 참사자들의 사진이 번갈아 비춰진다.

전시관은 수많은 수집자료들로 이루어진 전시벽면들이 이어지고, 전시실의 중간에 <강동문 유적 참사자 유해> 공간을 만나게 된다. 이 유해는 2007년 기념관 확장 당시 새롭게 발굴된 참사자 유해로서 제3차 유해다. 원래 그 모습 그대로 노출된 채 전시되어 있다.

왜 유해들을 완전히 수습하지 않았느냐는 우리들의 질문에 기념관의 주관장은 손사래를 치면서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란다. 왜냐하면, 10여 년 전에 희생자 유골이 다량으로 발굴되어 완전히 발굴을 마치고 유골을 들어내 봉안했는데, 일본의 ‘난징대학살부정파들’은 그 유골이 난징이 아닌 지역에서 발굴된 것을 가져다 난징대학살 희생자 유골이라고 우긴다고 공격했다는 것이다.

그때 이후로 이 지역의 발굴 유해들은 완전히 발굴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냥 보존처리만 해서 전시하고 있다고 했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현장에서 발굴된 유골마저 가짜라고 우기는 일본의 극우파들은 여전히 괴물인 채로 21세기를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결국, 1937년에 희생당한 희생자들은 난징의 진실을 위해 죽어서도 저렇게 학살의 증거품을 보여주기 위해서 남아 있어야 했다. 반성 없는 일본정부와 난징대학살 부정파들에 대한 분노와 인간에 대한 허망함이 동시에 찾아왔다.

▲ 전시동선 중간에 만나게 되는 전시관 내부의 노출 공간인 <강동문 유적 참사자 유해>. 기념관 건물 자체가 유적지 위에 세워진 것으로, 노출된 유해들은 반쯤 발굴된 상태로 전시되어 있다.

<가파인망(家破人亡)>은 이 전시관의 중요한 키워드 중의 하나다. ‘가옥(정)은 파괴되고 인명은 멸실되어 간다’는 이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문화혁명 당시를 대표하는 표현이기도 한데, 이번 난징기념관에서는 대도살의 전체이미지를 상징하는 용어로 활용하고 있는 듯했다. 전시관 진입부의 거대한 어머니조상이 그렇고 이 전시관 내부에도 몇 개의 가파인망의 사례를 입체모형으로 재현해 놓고 있으며, 천장에는 사인보드판으로 <가파인망>의 사례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 가파인망의 다양한 사례들을 게시한 사인보드가 천장에 매달려 있다.

 

<선간후살(先奸後殺)> 역시 난징대도살의 역사를 상징하는 키워드 중의 하나다. 남경을 점령한 일본군은 남경을 점령한 처음 4주 동안 2만 여 차례의 강간·윤간·강간살인을 행했다. 이곳에 전시된, 일본군이 여성을 강간하는 사진들은 모두 일본군 포로들의 몸에서 나온 것들이다. 또한 일본군은 대도살 기간 동안 두 곳에 위안소를 설치하여 운영했는데, 다수의 남경 여성들이 희생되었다.

이 코너들을 넘어서면 일본군이 자행한 전면적인 약탈, 방화, 도시파괴에 관한 자료들과 이미지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쯤에서 관람객들은 이미지의 포화와 정보의 과잉접촉에 따른현기증과 무감각증을 느끼게 된다. 끔찍한 장면과 패널들이 가득 채워진 전시관의 각 코너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오히려 무감각 증세를 조장한다.

마치 살인에 익숙해졌던 당시의 일본군들처럼, 살인과 강간의 비인간적인 아카이브공간이 결국, 무감각 증세를 가져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길을 뗄 수 없게 만드는데, 정작 전시관람을 방해하는 것은 너무 많은 사람들의 인파다.

무료로 개방되어 마치 국민교육장처럼 운용되고 있는 탓에 남경을 방문한 외국인 방문객은 물론이고, 다른 도시에서 찾아온 중국인들로 넘쳐난다. 또한 간체중국어와 영어, 일본어로 이루어진 패널들의 설명들은 한국인들에게는 매우 불편한 것이어서 3개 언어 중 하나가 능통하지 않은 사람들이나, 설령 안다고 해도 사전에 정보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관람하는 일이 불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주성산 관장과의 면담 중 한국어로도 병기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다시 이동해보자. 야만의 시간 속에 난징사람들에게 다른 인종, 국가의 고마움을 느끼게 해준 있던 몇 안 되는 외국의 착한 ‘인간’들이 등장하는 코너다. 앞에서 언급했던 욘 라베, 미니 비트린, 존 마길을 중심으로 당시 국제안전지대를 운영하면서 20만 명의 난징시민을 구했던 국제위원회 멤버들의 사진과 활동상, 그 당시 자료들이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욘 라베와 미니 비트린의 경우 특별하게 조소상과 청동상을 만들어 전시해놓고 있다. 난징사람들이 그들에게 느끼는 존재감의 정도를 짐작케 하는 코너였다.

 

▲ 중국인들과 난징시민들은 난징안전국제위원회의 은인들을 잊지 않고 있다. 특히 욘 라베와 미니 비트린 그리고 존 마길 선교사는 각별히 입체조소상을 세워 전시해 놓고 있다. 난징사람들이 이들을 얼마나 특별하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욘 라베와 관련한 에피소드 하나. 사실 그는 완전히 잊혀졌다. 아이리스 장이 그를 추적하여 그의 일기를 세상에 내놓을 때까지. 욘 라베는 1938년 2월 난징을 떠나 아내와 함께 4월 15일 독일로 돌아왔다. 독일인들은 그의 용기에 갈채를 보냈다. 독일 국무장관은 라베의 일을 언급하며 칭찬했고, 라베는 붉은 십자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라베는 곧바로 베를린 전역을 돌며, 존 마기의 필름을 상영하고 난징의 실상을 강연으로 알렸다. 심지어 1938년 6월 8일, 그는 마기의 필름 복사본과 난징학살에 관해 작성한 보고서를 히틀러에게 보냈다. 그러나 라베는 자신이 생각했던 나치의 실상을 몰랐다. 며칠 후 들이닥친 두 명의 게슈타포가 그를 체포하고 본부로 끌고 갔다. 그리고 라베는 지멘스의 상관이 보증을 서고, 난징의 이야기에 대해 함구하겠다는 서약을 하고서야 석방되었다.

그 후 그의 삶은 악몽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지멘스사에서 작은 일감을 받았으나, 적은 임금으로는 가족 부양이 힘들었다. 전쟁이 끝나자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밤낮으로 조사를 받았고, 그 다음에는 영국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는 등 곤욕을 치러야 했다. 나중에는 나치 당원으로 고발되어 오랫동안 고통받아야 했다.

조금 모은 저축은 변호사비로 탕진하고, 노동허가까지 상실한 그는 집안의 물건들을 하나둘 팔아가며 연명해야 했다. 그녀의 아내는 몸무게가 44kg으로 떨어졌다. 패전국 독일의 생활은 고통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라베는 결국 중국에서의 인도주의적 행위를 감안해 ‘비(非) 나치’로 승인을 받아 나치 당원의 이력으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렇다고 경제적인 상황까지 나아진 것은 아니었기에 들판에서 뽑은 잡초로 수프를 끓여 먹고 딱딱한 빵조각으로 연명해야 했다. 1948년경 라베의 어려운 상황이 중국에 알려졌다. 난징시 정부는 시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로부터 단 며칠 만에 난징시민들과 생존자들은 당시로서는 꽤 큰 금액인 2천 달러를 모아 시장에게 전달했고, 난징시장은 스위스로 가서 식료품을 산 후 이를 라베에게 보냈다. 그 당시 패전국 독일은 돈이 있어도 식량을 살 길이 없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1948년 6월부터 그해 가을까지 난징시민들은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식량을 보냈다.

국민당 정부는 중국으로 돌아온다면 주택과 평생연금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라베는 난징시민들의 호의에 크게 감사하며 삶의 신념을 되찾았고, 1950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기까지 난징대도살에 관한 2천 쪽 이상의 기록을 남겼다.(《난징에서의 강간》)

▲ <12초>. 12초에 한 명씩 사라져간 난징의 대도살을 건축적으로 그리고 예술적 상징성으로 연출해내고 있다.

그의 이 기록이 빛을 보게 된 것은 아이리스 장에 의해서다. 라베의 흔적을 추적하던 그녀에 의해 라베의 손녀딸인 우르슐라 라인하르트가 간직하고 있던 것을 알아냈고, 발표를 주저하던 그녀를 ‘아이리스 장’과 난징희생자협회장인 ‘샤오 즈핑’이 설득해 비로소 일기가 공개된 것이다.(이 일기는 나중에 독자적인 책으로 출간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존 라베, 난징의 굿맨》으로 2009년에 번역 출판되었다.)

다시 전시관으로 돌아오자. 여전히 사람 많은 중국을 실감하면서 전시의 끝부분을 향할 즈음, 눈에 들어오는 공간이 하나 있는데, 깜깜하다. 자세히 눈을 뜨고 보아도 보일 듯 말 듯한, 실 같거나 칼날 같은 외줄기 빛이 벽을 수직으로 가르는 공간이다. <12초>다. 12초, 슬픈 시간의 간격. 난징대학살 당시 6주의 시간, 그 기간 동안 평균 12초당 1명의 생명이 사라졌다.

그래서 이 공간의 제목이 <12초>인 것이다. 3층 높이의 수직공간에서 12초마다 생명을 상징하는 물줄기가 한 번씩 떨어지고, 그와 동시에 양쪽 벽에 부착된 참사자의 이미지들에도 불이 켜졌다 꺼졌다 한다. 이곳에서 관람객들은 비로소 12초의 의미를 깨닫고 놀라고 만다. 12초당 한 명의 생명이 사라져야 했다니. 필자는 그 허공을 수직으로 가른 빛의 날이 마치 일본도의 날 같고, 떨어지는 물줄기는 목이 잘려 나갈 때의 핏줄기 같다는 느낌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 유화작품인 <학살·생명·보살-남경대학살>. 미국의 화교화가인 리자건의 작품으로, 왼쪽의 일본군은 학살을, 가운데 상단부의 어린아이는 생명을, 오른쪽 시신을 매장하는 스님은 부처의 화신을 보여준다.(전시도록 사진)

 

이제 전시실을 나서면 거대한 벽면의 글씨와 그 앞에 전시된 대형 서고를 만나게 된다.

난징대학살 희생자들의 조사카드를 모아 놓은 압도적인 스케일의 당안장(档案墙/Archive-Wall/문서보존벽)이다. 12,000여 개의 자료케이스가 놓여 벽을 이루고 있다. 난징에서의 죽음의 실감은 스케일에서 오는 것인지, 이 벽 역시 300,000이라는 숫자의 반복되는 이미지처럼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케이스는 세 종류인데, 검은색은 희생자들의 개인 문서파일이고, 파란색 케이스는 생존자의 개인문서파일이다. 또한 회색 케이스는 해외 증인들의 개인문서파일이다. 아마도 결국에는 모두 검은색 파일로 바뀔 것이다. 상세한 증언자료는 이 서류함들이나 컴퓨터검색을 통해 찾을 수 있다고 한다.

▲ 12~24mm의 광각렌즈로도 담을 수 없는 규모의 문서보존벽.

바로 이 <문서보존벽>의 반대편 10여 미터에 달하는 전면 벽에 글자 폭이 1m는 됨직한 큼지막한 고딕체의 간체문장이 박혀 있다. 前事不忘, 后事之師, ‘과거 일을 잊지 않으면, 훗날의 교훈이 된다’는 이 문구는 중국 전한(前漢) 시대의 유향이 편찬한, 전국시대(戰國時代) 전략가들의 책략을 편집한 책인《전국책(戰國策)》〈조책(趙策)〉에 나오는 성어(成語)다. 뼈아픈 역사와 관련하여 이만한 명문장이 따로 있을까?

이 문구는 중국의 항일시기를 테마로 한 모든 역사기념관에 반드시 등장하는 것으로, 1972년 중일 국교정상화 때 주은래가 일본에 던진 문구다. 이 말이 곧 이 기념관의 모토이다. ‘망각은 파멸에 이르고 기억은 구원에 이른다(이스라엘 야드바셈 기념관의 모토)’는 말처럼, “잔혹한 역사를 기억하고 미래에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이 기념관이 존재하는 것이다.” 주성산 관장은 이것이 난징기념관의 이념이자, 설립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다.(난징기념관 해설서)

이제 지하층에서 1층에 이르는 <인류적 대참사-중국침략일본군의 남경대학살역사진실전>은 끝났다. 다음은 2층의 전시인 <승리 1945-테마전>인데, 필자는 이 전시까지 다 보았다. 그 내용은 일본군의 만주침략에서부터 시작된 중국과 일본과의 전쟁에 대한 것인데, 평화인권의 주제라기보다는 다분히 현대사전 같은 테마전시였다.

즉, 이 기념관은 총론으로서의 중-일 간의 전쟁기념관이면서 주축은 난징대학살사건을 테마로 하는 전시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필자의 주요관심은 난징대학살에 있었으므로, 기념관의 소개는 여기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다만, 부기할 것은 확장개축 이전에 있었던 기념관도 현재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내부의 전시가 없어지고, 추념공간으로 새단장을 했고, 특히 심금을 울리는 <묘지광장>과 <어머니의 회침 석상>, <만인갱>, <부조상-재난, 학살, 제사>, <1만여 명의 명단-통곡의 벽>, 각 학살지별 위령비들은 여전히 예전 공간에 남아 있다.

 

▲ 이전 기념공간에 남아 있는 조형물들. 높이 4m의 입체(화강석) 작품인 <어머니의 외침>. 바닥의 조약돌들은 30만의 죽음을 상징한다. 오른쪽은 담을 따라 설치된 <부조-재난>의 부분.

한때 이 기념관도 부침이 많았다. 이 기념관은 미국과 일본 등 서방의 인권공세에 대응하는 정치적 의미도 컸었다. 개혁개방 초기에는 더욱 그러했다. 또한 과거 마오시대의 공산당 정부는 이 사건이 국민당정부 시절 일어났다는 이유로 그동안 기념사업에 있어서나, 이 사건을 국가적 아젠다로 올리는 데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그러한 역사적 배경이 <난징대도살>을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비해 덜 알려지게 한 원인 중의 하나로 거론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동안 지속적인 발굴과 확장사업이 이루어지면서 중국정부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평화인권의 상징적인 기념관들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이 기념관의 연간 방문객 수는 550만 명으로 베이징의 <자금성>을 제외하고는 단일 시설 중 최고의 방문지로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내외국인 할 것 없이 말이다.

그 와중에 불현듯 한국정부가 떠올랐다. 4·3평화공원이 총 3단계 사업 중 현재 2단계에서 멈칫거리고 있는데, 국민의 정부 시절 시작된 사업이 아직도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다. 중앙정부의 관료라는 것들이 지방의 뼈아픈 역사를 알아서 해결해 주리라고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 핑계 저 핑계 걸면서 아직도 주지 않는 예산을 축소시키고 용역결과까지 나온 사업을 변형시키는 작태를 보면서 한심하고 쪼잔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통령까지 공식사과한 도민 3만의 죽음에 대한 공동체적 보상금인 1천억이 그리 아까운지, 4대강엔 들입다 쏟아 부으면서도 미집행 3단계 사업비 400억 중 280억 원을 삭감했다. 이전 정부들과는 연속성이 없는 정부라서인지, 정권이 바뀌어도 관료들은 다 그 자리에 앉아서 결재판을 돌리고 있을 텐데, 그들은 국민이 낸 세금을 제 것인 양, 어떤 경우는 주고 어떤 경우는 빼고, 어떤 경우에는 아주 피곤하게 주기도 하는데, 4·3의 경우라고 예외 없다. 난징기념관을 나서면서 우리의 처지가 한심하기 그지없고 우리 정부가 치졸하기 그지없다는 섭한 마음에 분노마저 생긴다. 참 거 머시기하게 말이다.

사실 이번 방문 중 주성산 기념관장이 마련한 4·3평화재단 방문단과의 저녁식사자리에서, 주 관장은 기념관을 보고 난 우리들의 소감과 칭찬에 대해 “난징기념관은 국가 외부의 침략에 대한 것으로서 이렇게 기념관을 세우고 기억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자기 나라 정부가 스스로 나서 과거사의 잘못을 인정하고, 희생자들에게 국가수반이 사과하고, 이를 기록·기념하는 기념관을 만들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이를 실현했다는 것은 우리보다 더욱 훌륭한 일”이라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 그는 꼭 한번 방문하고 싶다고 우리들에게 말했다.

▲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제주의소리
4.3기념관의 가치를 정확히 평가하는 통찰력 있는 발언이었다. 국가 스스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한다는 것, 그렇게 인정된 국가폭력의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것, 그것은 실로 쉽지 않다는 것, 그렇기에 4.3평화공원과 기념관의 가치가 더욱 의미 있다는 것을 과연 우리 정부와 중앙정부의 관료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은 외국인인 주관장만큼 인식하고 있을까?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면, 그렇게 쉽게 예산 자르고 사업 미루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졸속으로 치닫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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