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홍철 칼럼] 시멘트 한 포대에 신성한 주권을  팔았던...

▲ 고홍철 제주의소리 대표이사
전국비상계엄령 선포, 국회해산, 정당 정치활동정지, 헌법개정, 초법적인 대통령긴급조치발동,....

1972년 10월17일을 기점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단행한 일련의 조치, 이른바 '10월 유신'이다.

그는 이같은 일련의 조치를 통해 눈깜작할 사이에 강권탄압의 유신체제를 확립했다.

계엄령을 선포한지 열흘도 못돼 국민투표에 의한 헌법 개정을 공고하고 나섰다. 그리고 한달만에  유신헌법이 새로 만들어졌고, 또 한달만에는 정체불명의 헌법기관인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제8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아니 추대됐다고 함이 맞을런지 모른다.그가 만들고 자신이 의장으로 있는 기관에서 추천을 받고, 그들이 선출하는 것이었으니까.

실제  단독입후보한 선거로서, 선거인인 통일주체 대의원중 기권인지 무표인지 2명을 제외하고는 100% 찬성률을 기록했다. 이른바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장충체육관 선거'가 그것이다.

50대후반이면 대다수는 그시절 유신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들을 갖고 있을터. 나 자신 또한 그무렵의 씁슬한 기억을 몇 갖고 있다.

대학진학을 위한 전국예비고사가 코 앞인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이다.시골학교라서 그렇게 입시에 열을 올리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긴장감이 전혀 없지는 않을 때다. 당시 일반사회 과목을 담당하고 있던 한 선생님이 평소와는 다른 교재를 한 아름 안고 교실로 들어섰다. 곧 만들어질 유신헌법 계도자료라고 했다.그러고는 출처를 알 수없는 자료문건들을 설명해 나갔다.

선생은 새로 개정될 유신헌법은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대목에 이르러 스승과 제자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한국적 민주주의도 좋지만, 대통령이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을 자기마음대로 뽑을 수 있느냐. 그것은  민주주의 원리인 삼권분립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대통령을  선출하는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도데체 어떤 기관인가.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지금까지 교과서에서 배운 것과는 다르지 않느냐"는 등의 질문이 쏟아졌다. 

그랬다. 그무렵 대다수의 고교에서는 1학년때 정치경제란 과목을, 그리고 2-3학년이 되면 일반사회과목을 수업했다. 분명 그때 가르친 내용과는 다른 민주주의라서 학생입장에서는 당연히 궁금했다. 그렇다고 학생이 그렇게 따지고 든 것은 아니었다. 일반 시국토론이라기 보다는 학구적인 질문수준들이었다. 그런데 학생들의 진지함과는 달리 질문에 답하던 선생님이 갑자기 흥분했다.

"야 이놈들아 나는 이거 좋아서 하는 줄 아느냐" 그러고는 계도자료 뭉치를 교탁에다 냅다 팽개치고 교실을 나가 버렸다.선생의 입장에서는 가르침이 어제와 오늘 다른데 자기 배신을 느꼈을런지 모른다. 물론 헌법이 만들어 지기 직전이었느니 가능한 행동이었다. 아마도 그 무시무시한 유신헌법이 만들어진 후 그랬었다면 담임선생은 물론 학교장까지도 분명 경을 쳤을 것이다. 유신헌법에 터잡은 대통령긴급조치권은 헌법에 대한 비난이나 비판을 하면 주무장관으로 하여금 학교장 또는 교사를 해직토록하고 심지어는 학교문을 닫도록 했었다. 이 또한 사법심판대상에서 열외로 할 만큼 강력했다.

사실 그랬다. 유신헌법에 의한 초법적 대통령긴급조치가 발령되면서 10월유신에 대한 비난은 물론 일체의 집회및 시위가 금지됐다. 정치집회는 물론 지역 대동제라 할수 있는 읍면체육대회, 심지어는 초등학교 대항 체육대회까지도 전면 금지됐다. 서로를 감시하면서 사회적 불신이 조장되고 지역 공동체가 서서히 무너져갔다. 운동이라면 잘살아 보세를 외치는 새마을 운동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더욱 씁쓸한 추억은 시멘트 한포대에 신성한 주권을 팔았던 기억이다.

10월유신에 대한 불평과 비난이 서서히 일면서 박정희 유신정권은 또한번의 극단의 조치를 취한다. 서슬퍼런 긴급조치권 발령아래서 유신헌법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투표에서 부결되면 자신에 대한 불신임이란 단서를 달고 서였다.

나로서는 얄궂게도 그때가 처음 참정권이 주어진 때였다. 겨울방학때로 기억난다. 시골집에 내려와 있었는 데 그전에는 곧잘 어울려 주시던 동네 이장님이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까닭을 묻자 이장님이 " 이제 곧 선거(국민투표)가 있을 텐데 걱정이다"고 했다. 이번 선거에 마을단위로 투표율과 찬성율이 높아야 마을 안길포장용 시멘트가 지원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네 같은 사람들이 걱정이란 것이었다. 찬성률이 낮아 질것이라며 왜 내려 왔느냐고 핀잔까지 주는 것 아닌가.

동네 책임자로서 마을걱정하는 것을 보니 안탑깝기도 해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의미가 있는 선거도 아니니 나같은 사람  투표를 하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고 얼버무렸다. 순간 이장님 눈 빛이 크게 달라졌다. 정말 그렇게 하자고 했다.

투표당일 하루종일 뒤척이다가 그래도 나에게 주어진 첫 참정권행사여서 미련이 생겼다. 이장님 한테는 미안하지만 투표마감 시간이 다되서 투표장엘 나갔다. 그런데 웬걸 내 몫의 투표가 이미 이뤄져 있었다. 선거인명단에 손도장이 이미 찍혔있었다. 어떻게 된거냐고 따져물었더니 관계자들이 슬슬 자리를 피했다. 멀리 있던 이장님이 사태를 파악하고 달려왔다. "누군가 인주를 잘못 찍은 것 같다"며 그냥 투표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이장님 얼굴을 보는 순간, 마음이 약해져 어르신네 앞을 얌전히 물러 나왔다. 속도 편치 않아 그길로 이웃마을 친구집을 찾았다. 막걸리 한잔으로 마음도 달랠겸해서다.그런데 그친구 역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돌아와 있었다. 자신은 연로한 어머님까지 모시고 갔는데 그랬더란 것이었다.

그날 투표가 끝나고 개표장에서는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졌다. 마을별 시멘트지원 경쟁이 벌어지면서 대부분이 100%가까운 투표율에 100%의 찬성률이 나왔다. 심지어는 투표율 105%까지도 발생했다. 유권자 수보다도 더많은 표수가 나온 것이다. 기권이 예상되는 표수를 투표함에 마구 집어 넣다보니 이중 투표가 더러 이뤄진 탓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문제삼는 곳은 없었다. 찬성률이 낮은 것은 문제가 돼도 높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랬다.유신을 반대하고 정부를 비난하는 특별한 사람들은 어두운 철창속에 넣어지고, 마을 이장님들처럼 순박한 보통사람들은 바보아닌 바보가 돼야 하는 우민화의 시대였다.

유신체제는 그렇고 그렇게 탄생된 체제였다. 민주헌법을 파괴하고 선량한 국민들을 우롱하면서 만들어진 체제였다. 혹자는 절대군주제 보다도 더한 대통령 1인독재체체라고 했다. 3선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의 기틀을 다지고 10월유신으로 종신대통령제를 확립했다고도 했다. 그렇기에 일각에서는 그의 가족들을 유신공주 유신왕자라고 비아냥 거리기도 했다.   

사단이 그랬음에도 최근들어 죽은 박정희가 되살아 나는 것같아 섬뜩하다. 엊그제 국회 부의장 출신이 박정희 정권의 '10월유신'을 고무찬양하고 나선일이 그것이다. 기자들을 상대로한 그의 말에 따르면 유신 장본인 박정희대통령을 재정러시아의 피터대제에 비유했다. 그러면서 "공연히 야당의원들이 10월유신에 대해서 안좋은 부분만 얘기하는데 비열한 짓이다" "유신이 없었으면 100억불 수출이 어떻게 달성됐겠느냐." "박근혜와 박정희는 천륜이다. 아버지 욕하면 대통령시켜 주겠다는 건데 내가 후보라면 절대 무릎꿇지 않는다..."

대선유력주자의 측근인물로서 딴에는 맆서비스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국회부의장을 지낸 사람으로서 거들말은 아니다.

참으로 그 어두운 시절 시골학교 학생들의 생각에도 못미치는 발언이다. 마을을 위해 애오라지 시멘트 몇포대에 연연했던 동네 이장만도 못한 수준의 정치인이다. 그러니 정치권이 국민들로부터 불신을 받고 널리 '안철수 신드롬' 생기는 것 아닌가. / 고홍철 제주의소리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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