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미의 문학카페> 20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드디어 해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멀리서 검은 구름이 말발굽소리를 죽이며 서쪽으로 물러가고 머리를 풀어헤친 나무들이 태풍에 동강난 제 곁으로 그늘을 드리웁니다. 주변 도로에 세워진 깻단 비닐들이 끄나풀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습니다. 그 옆을 가로질러 가던 고양이 한 마리가 처음으로 세상 구경 나온 사람처럼 두리번거리고 있습니다. 이런 바깥세상과 아무 상관없이 나는 방안에 틀어박혀 당신이 오래전 보낸 편지를 읽습니다.

  아,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난 게 언제였던가요. 누렇게 뜬 책의 속지에는 인지도 붙여지지 않은 채 1986년 9월 10일 발행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제 생각납니다. 그 책의 발행날짜를 마치 첫눈에 반한 사람을 보듯 눈을 떼지 못했지요. 9월 10일, 그날이 바로 제 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과의 만남은 어떤 운명적이었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직 여물지 못한 소녀들은 대부분 이런 감상에 젖곤 하지요. 그러면서 열심히 받아 적는 것에 익숙하답니다. 나또한 그런 소녀였기에 당신이 내게 전해준 사랑, 고독, 환희, 죽음과 같은 말들을 아무 의미 없이 받아 적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이제 다시 보니, 폭풍우 속에 전갈 받은 편지처럼 모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나는 그 말의 뜻을 알지도 못한 채 밑줄을 그어댄 것이지요. 노란색 줄들이 희미하게 얼룩져 있습니다. 추억처럼 어른거리다가 “내가 언제 이런 생각을 했던가?'‘ 아주 까마득하기 하다못해 기특하기까지 하답니다.

  오, 라이너 마리아 릴케여!

  잠 속에서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는 마음으로 눈을 비벼가며 당신의 편지를 다시 읽습니다. 각질처럼 딱딱해져버린 나의 감각이 어느새 비듬을 털며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처음 세상이 열린 듯한 이 낯선 공포, 글자를 처음 익히는 아이처럼 또박또박 소리 내어 당신의 편지를 읽습니다. 음울하고, 모호하고, 환하고, 사려 깊은 당신의 인내심을 봅니다. 내가 이제껏 보아온 세상은 장님의 세계 그것이며, 내가 들어온 음악은 비 온 날 자동차 바퀴에 감겨 굴러가는 비닐조각 소리였나 봅니다. 주변의 사물이 제 그림자마저 버리고 이제 문 밖으로 나가고 없는 이 고요, 오롯이 당신의 생각하고만 마주하렵니다.

  당신은 날마다 괴로워하는 군요. 사람들은 살려고 도시로 모여드는데, 당신은 그들이 모두 죽어가고 있다고 보시는군요. 눈을 감아도 사람들의 속사정이 환히 보이고, 마침내 그들의 생활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당신, 새가 그들의 심장을 쪼아대며 함께 울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는지요. 또한 그 새가 꽃을 피우게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셨는지요. 당신은 그것이 시인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당신이 한 말 그대로를 옮겨 적습니다.

 작품 속 책갈피...

시, 아아, 시라는 것은 젊었을 때 쓴 것에는 신통한 것이 없다. 거기에는 기다린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일생을 두고, 그것도 아마 긴 일생을 두고 지칠 줄도 모르며 의미와 감미로움을 모아야 한다. 그런 끝에 가까스로 아마 열흘 가량의 좋은 시를 쓸 수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는 흔히 사람들이 말하듯이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로지 시는 경험인 것이다.


한 줄의 시구를 얻기 위해서는 많은 도시를 보아야 하고, 사람을, 사물을 보아야 한다. 처음 가 본 고장의 낯선 길을 생각해낼 수 있어야 한다. 뜻밖의 만남이나 벌써 오래 전에 가까이 오는 것이 보였던 헤어짐을 생각해낼 수 있어야 한다.
아직 그 의미가 잘 밝혀지지 않고 있는 어렸을 때의 일을, 또 부모가 나를 기쁘게 하려고 가져왔던 것이 내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한 추억이며, 참으로 기묘하게 시작되었다가 뜻밖에 깊고 무거운 변화를 가져온 어렸을 때의 병이며, 작은 방에서 조용하게 지낸 날들의 일이며, 바닷가의 아침이며, 바다 그것이며, 맑은 바다며, 높은 하늘을 수렁거리며 별들과 함께 날아 가버린 여행의 몇 밤 등을 생각해낼 수 있어야 한다.

(중략)

그리고 또 죽어가는 사람들의 머리맡에서 시중을 들고 죽은 사람과 한방에 앉아 열어젖힌 창문에서 커지고 작아지면서 들려오는 바깥의 소리에 귀 기울였던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추억만 가지는 것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 추억이 많아지면 그것을 잊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잊어버린 추억이 언젠가 되돌라오는 날을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 왜냐하면 추억은 그것만으로는 아직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내부에서 피가 되고 눈길이 되고 몸의 움직임이 되고 이름도 없는 것이 됨으로써 비로소 어느 날엔가 매우 드문 시각에 하나의 시의 첫 말이 그들 추억 복판에서 일어나 거기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왜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시는지요. 아, 그 전에도 똑같은 말을 하셨지만 나는 그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방금 심은 씨앗이 왜 지금 꽃이 안 되는지를 아는 것처럼 방금 한 생각이 시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지요. 들로, 산으로, 바다로, 거리로 나서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 따름입니다. 그것은 기다림과는 아주 먼 이유였지요. 바로 그곳에서 그 어떤 이름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성급함, 그것은 자주 나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상처라는 것도 나 혼자만의 독단입니다. 세상을 이리도 분별없이 우쭐거려도 되는 것인가. 당신의 편지 앞에서 참혹하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이제 기다림을 배워야겠습니다. 그리고 낯선 거리와 낯선 사람, 낯선 사물들에 연인이 된 것 같은 마주침, 헤어지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것들이 피가 되고 눈길이 되고 몸의 움직임이 되고 이름도 없는 것이 될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겠습니다. 갈 길이 얼마나 먼가요. 갓 걸음마를 시작한 시인의 보폭으로는 한 계절 동안도 한 마을을 벗어날 수 없겠습니다. 이별의 정감을 맛보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걸어야겠습니다.

당신도 알고 보면 늘 이별하며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파리에서 로마로, 쏘리오에서 로카르노로, 베르크성에서 뮈조트성으로 일생이 여행길이었지요.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고 이별을 했던가요. 기억나는 이름만 해도 루 살로메, 클라라, 파울라 베커, 릴리 칸니츠 메나르 백작 부인... 등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들은 수없이 많답니다. 그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은 나의 질투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하고, 세상의 어떤 시보다 아름답기만 하답니다. 그래서 만인의 연인을 독차지한 듯한 경외감을 느끼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 누구와의 편지보다 아름다운 것은 삶과 죽음의 세계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소녀 베라에게 바친 헌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가 그것이지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시의 전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 시가 죽음의 노래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음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자의 마지막 비명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였지요. 하지만 그것이 오르페우스의 노래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의 리라연주와 같은 음악이라는 것을 엊그제야 눈치 챘답니다. 당신은 죽음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노래했지요. 눈물도 없는 금속성의 세상을 건너 죽음 너머를 순순히 받아들인 자의 희망노래!

  아, 허망하다고 욕하지 말아주오. 모든 것을 순박하게 받아들이는 경지는 어떻게 생기는 것인가요. 당신이 말했듯이 오랜 기다림 끝이 아닌가요. 그러니 이제 마을 안길을 서성거리는 나의 좁은 시야를 용서하길! 삶의 가장자리로 밀려나면서부터 노랫소리가 서서히 들리기 시작할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나니, 그것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구원의 노래가 될 것임을 감히 약속하나니. /강은미

 
▲ 시인 강은미.

 시인이자 글쓰기 강사인 강은미씨는 2010년 <현대시학>에서 ‘자벌레 보폭’ 외 4편으로 등단했습니다. 현재 제주대학교 창의력 글쓰기 지도자 과정 강의를 비롯해 NIE 전문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제주의소리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