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멍 보멍 들으멍](12) 포기를 모르는 소녀, 파란만장한 보초 / 정신지

 

▲ 태풍이 몰아치던 밤에 우리집 개 보초가 새끼를 8마리나 낳았다. 잠자는 어미개 ‘보초’와 장녀 강아지 ‘볼라벤’. 혹여나 강아지의 입양을 희망하시는 분은 연락 주시기를.  사진=정신지 ⓒ제주의소리

우리 집 개가 새끼를 낳았다. 제15호 태풍 ‘볼라벤’이 몰아치던 밤, 폭풍우 속에서 바람결에 문이 열린 내 방으로 피신을 온 어미 개 ‘보초’는, 그 자리에서 떡하니 출산했다. 생전 처음으로 조산부가 되어야 했던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대여섯 시간에 걸친 여덟 마리 강아지의 출산 대장정 끝에, 나도 모르게 감동의 눈물이 흘렀다.

이북 출신의 풍산개 외할아버지와 전라도 출신인 진돗개 외할머니를 둔 보초는, 제주 애월읍 똥개 출신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범지역적인 강아지로 태어났다. 하지만 생후 몇 개월 만에 못된 개장수에게 끌려가 온갖 고생을 하고, 내 아버지의 손에 구출되어 구사일생으로 다시 귀향한다.

사람에게 익숙하지 못해 눈치만 보며 살았지만, 시간이 흘러 점차 가족의 구성원으로 우리 집 보초 역할을 도맡아 해왔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보초’.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개인만큼 출산 또한 특별했다. 일단, 누구에게도 남편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다. 게다가, 좋은 여름 날씨 놔두고 하필이면 30년 만에 제주를 찾은 대형 태풍이 몰아친 저녁, 그것도 내 책상 옆에서 5남 3녀를 출산했다. 일등으로 태어난 장녀 강아지에게 붙여진 이름은 ‘볼라벤’. 볼라벤은 이름만큼이나 강하다. 어미의 젖을 온갖 힘을 다해 빨고, 태어난 지 사흘 만에 멍멍대며 짖는다.

한낮 개에 지나지 않는 보초이지만, 그녀에게도 이렇듯 4대에 걸친 역사가 있다. 물론, 개 자신이 나에게 들려준 것은 아니지만, 인연이 닿아 사람과 만나면 그곳에는 언제나 이야기가 생겨나는 법. 마치, 이야기가 이야기를 만나 ‘글’이라는 새끼를 낳듯 말이다.

 

▲ 지난 초여름 할망을 방문했을때, 할망은 갓 수확한 하얀 보리를 마루 한 가득 쌓아놓고 그것을 팔고 있었다. 할망의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보리쌀이 정겹다. 사진=정신지 ⓒ제주의소리

 

▲ 추석때 즈음 묘종을 심을 것이라며 마늘을 손질하고 계신 할망. 그녀와 마주 앉아 마늘을 까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사진=정신지 ⓒ제주의소리

지난 초여름에 만난 친절한 농사꾼 할머니가 한 분 있다. 그녀는 중학생인 손녀와 함께 사는 올해 80세의 건강한 노인이다. 우연히 길을 묻다 알게 된 인연이거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재미가 붙어 그녀의 집에도 들어갔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에는 자루에 담긴 보리가 마루 한가득, 두 달 만에 다시 찾은 할망의 집에는 빨갛게 여문 고추와 씨앗으로 쓸 마늘이 한 가득이다. 할망의 집에는 어느덧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다.

그녀와 마주 앉아 모종을 만들 마늘을 깠다. 태풍주의보와 함께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한 창밖을 바라보며,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내 나이 열세 살에 해방이 되었어. 일본군이 이디(여기) 왕(와서) 굴 팡(굴을 파서) 기어들고, 저 위에까지 잘도(상당히) 많이 살아나서(살았었어). 해방됭이네(해방되고) 일본군들이 자유로이 댕길 적에, 한 번은 동네 언니랑 쇠 멕이러 간(소를 먹이러 갔어). 겐디(그런데) 일본군이 나타나서 ‘아소비마쇼(‘놀자’라는 일본어), 아소비마쇼’ 허멍 나를 콕(살짝) 심는 거(잡는 것) 아니? 열세 살에 게(말이야). 잘도 겁이 낭이네(엄청나게 겁이 나서) 쇠 잡아먹어 불카부덴(소 잡아먹어 버릴까봐서) 신 한 짝 벗어지멍(벗겨져서) 어디사 가신지도(어디에 갔는지도) 모르고, 막 무서웡(무서워서) 도망 나와서.

……제국시대에는 농사한 거 죄다 공출하고(공출=일제식민지하에서 전시 군사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1940년부터 강제로 시행된 제도), 다 갖다줭이네(가져다주고) 이녁 양식이 어서나서(내 양식이 없었어). 그 시절이 젤(제일) 어려운 때라. 이제는 농사 지엉(지어서) 돈이라도 벌지마는, 그때는 돈도 안 줬주게(안 줬지). 경해도(그래도) 개중에는 일본군이영(일본군이랑) 친해졍이네(친해져서) 아기 낳고 살던 여자도 이서나서(있었어). 겐디 해방되엉(그런데 해방되면서) 혼자 버려졌주만은(버려졌지만)….”

 

▲ 할망과 손녀 그리고 내가 나란히 앉아 점심을 먹는다. 처음으로 먹어보는 호박잎국과 검정콩의 콩잎이 너무나 맛있어서 밥을 두 그릇이나 먹어치웠다. 사진=정신지 ⓒ제주의소리

 

▲ 글쓰기와 디자인에 관심이 있다는 손녀의 방에는 예쁜 글씨체로 그녀의 좌우명이 붙여져있다. 포기란 배추 셀 때 하는 말이라는, 가히 농사꾼 할망의 손녀다운 명언. 사진=정신지 ⓒ제주의소리

할망이 일제식민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바람이 거세게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먹구름이 몰려와 바깥이 컴컴해지고, 거기에 그녀의 슬픈 기억들이 뒤섞여 분위기가 어둡다.

“인간, 태어날 때는 초례로(차례로) 태어나지만 죽는 건 몰라. 매일 행복하게 살젠 해도(살려 해도) 살아보민(살아보면) 그렇게 되나. 마음대로 안 되는 일 처럼 곱곱한(갑갑한) 것은 어서(없어). 사람 살면서 제일 곱곱한 것이 그거라. 그럴 때는 촘아야지(참아야지). 다 촘아야지게. 시간이 감시믄(가고 있으면) 어떵이라도 되난(어떻게라도 되니까), 늙은 사람일랑(사람은) 저승 갈 초비나(준비나) 해놓고 게.

……나는 아무런 종교도 믿지 않허여(않아). 젊은 때부터 불교여신디(였는데), 이제 다리가 아팡(아파서) 절에도 못 가난(못 가니까), 그자(그저) 내 안에 부처가 있다 생각행(생각해서) 이녁 마음 이녁이 믿는 거주(내 마음 내가 믿는 거지). 경행 살암주(그렇게 살지). 종교를 믿는 추룩(믿는 것처럼) 하고 남이나 잡아먹고, 남의 것 훔치고, 그게 젤로(가장) 나쁜 거라.”

그러고 있는데 학교를 일찍 마친 손녀가 돌아왔다. 아들의 이혼으로 오갈 곳 없는 손녀를 다섯 살 때부터 할망이 길렀다. 가난한 살림에 학원도 못 보내고 시골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지만, 요망지고(야무지고) 착한 손녀는 중학교에서 전교 부회장도 맡고 있다. 손녀가 들어서자 그녀의 환한 웃음에 비바람도 물러간 듯,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왜 이렇게 시간이 흘러서 오셨어요? 처음 오셨을 때에는, 인사만 하고 헤어져서 언니가 교회에서 온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할머니가 아니라고 하시길래. 그럴 거면 더 이야기할 걸 하고 후회했었어요. 근데 또 오시니까 정말 좋다!”

친근감 있고 순수한 시골소녀는 교복도 벗지 않고 할망 곁에 앉아 나와 이야기 삼매경에 빠진다. 어릴 적부터 세계 일주가 꿈이었다는 소녀는, 교육청의 후원으로 중국에 연수도 갔다 왔다. 외국 친구도 많이 사귀고, 많은 곳을 여행하고 싶다는 말에, 문득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보고 온 타국의 이야기, 세계 각국에서 온 유학생 친구들의 이야기를 하는 내내, 그녀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그녀가 돌아오기 전에 할망이 내게 말을 했다. 제대로 뒷바라지도 못하고, 매일 작은 집에서 늙은이와 살아왔는데, 공부도 열심히 하고 효녀로 자라준 손녀가 너무나 고맙다고. 사람이나 곡식이나 시골에서 햇볕을 받고 자라면 튼튼하게 자라는 것이 분명하다고 할망은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이녁 재주만쓱(자기 재주만큼) 크는 거여.”라는 그녀의 심지 있는 한 마디.

내년이면 중학교를 마치고 제주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손녀에게, 이번 여름은 할망과 보내는 시골에서의 마지막 여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소녀는 언젠가 세계 일주를 할 수 있는 멋진 어른으로 성장해 가겠지. 평생 제주의 땅을 일구어 자신의 튼튼한 뼈와 살이 되어준 할망의 사랑과 지혜를 늘 잊지 않고 소녀는 나아갈 것임이 분명하다. 그도 그런 것이, 소녀의 방 책상 앞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포기’란 배추를 셀 때나 하는 말이야.”, “오늘도 나는 1등을 꿈꾼다.”/ 정신지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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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지는 ?

   

이 여자, 택시 기사들과 대화 나누길 즐기는 ‘수다쟁이’다. ‘역마살’도 단단히 타고났다. 거기에다 ‘촌스러움’까지 좋아하는 독특하고 야무진 여자다. 그녀의 이름은 정신지(32). 파주·부산 출신의 부모님 아래 서울서 태어나 여섯 살에 제주로 이민(?) 왔지만 스무살에 다시 서울로 나갔다가 일본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지역연구학’이라는 인문학을 전공했다. 그동안 세계 17개국의 섬·지방·대도시를 떠돌며 사람과 집단, 그 사회에 대한 이해를 넓혀왔다. 지난 봄, 일본의 국립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에서 문학박사 과정도 수료했다. 이제 12년간의 지구촌 유목 생활을 마치고, 태어난 곳은 아니되, 자신을 성숙하게 키워준 ‘진짜 고향’ 제주로 지난 봄 돌아와 부모님이 살고 있는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에 짐을 풀었다.  매주 한차례 <제주의소리>를 통해 제주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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