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 형제와 제갈량…, 촉나라를 만나다
유비 형제와 제갈량…, 촉나라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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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의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의 결의를 맺은 도원. ⓒ양기혁
삼국지의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의 결의를 맺은 도원. ⓒ양기혁
도원결의를 맺는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의 조각상과 사당 안의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의 영정. ⓒ양기혁
도원결의를 맺는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의 조각상과 사당 안의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의 영정. ⓒ양기혁
ⓒ양기혁
ⓒ양기혁

<양기혁의 중국횡단기> 17 이백과 두보가 살던 파촉(巴蜀)

파촉(巴蜀)의 땅, 이백과 두보의 땅쓰촨(四川)지방은 오랜 옛날부터 ‘파촉(巴蜀)’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파(巴)’와 ‘촉(蜀)’은 모두 고대 이 지방에 살던 부족의 이름이라고 하는데, 춘추시대에는 이 지방의 동부지역인 충칭을 중심으로한 ‘파국(巴國)’과 청뚜 일대의 ‘촉국(蜀國)’이 있어서 이 둘을 합쳐서 파촉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

후한(동한) 말 제갈공명은 천하를 삼분(三分)할 계획을 세우고 그에 따라 유비(劉備)는 당시 익주(益州)라는 지명을 가진 이곳에 성도(成都)를 도읍으로 하고‘한(漢)’나라를 세우니 이 것이 위, 촉, 오 삼국의하나인 ‘촉한(蜀漢)’인 것이며, 이후 쓰촨성 일대는 ‘촉’이라는 지명으로 불렸다.

좀 나아지는가 싶던 기침이 아침부터 계속되어 누워 있을 수 없었다. 좀 이르기는 하지만 일어나 짐을 챙기고 나갈 준비를 하였다. 계획했던 관광을 빨리 마치고 오늘 충칭까지 가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체육대학 대학원 인터뷰가 있다는 리양은 벌써 준비를 마치고 옷을 말쑥하게 차려 입고는 나에게 “짜이지엔”하고 작별인사를 건넸다. 리양이 나가고 나서 나도 곧 배낭과 침구를 간단히 정리하고 일어섰다. 천진인과 차이원롱이 누워 있는 채로 손을 흔들며 한마디씩 한다.

“이루순펑”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방을 나왔다.

무후사는 아침 이른 시간인 데도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제갈공명은 유비의 사후 촉한의 2대 황제에 오른 후주 유선(劉禪)으로부터 ‘무향후(武鄕候)’에 봉해지는데 무후사(武候祠)는 무향후 제갈량을 모신 사당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곳은 원래 유비의 묘 ‘혜릉(惠陵)’이 있는 곳이다. 그러니까 황제인 유비와 신하인 제갈량을 같이 모신 사당이라고 할 수 있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곳을 제갈량을 뜻하는 무후사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황금빛으로 치장한 유비의 상이 관람객을 맞고 있으며 그 옆으로 관우, 장비,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의 상이 차례로 늘어서 있다. 유비의 사당인 소열사(昭烈祠)와 제갈량의 사당인 무후사를지나면 뒤쪽에는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이 의형제를 맺은 도원결의를 보여주는 도원(桃園)과 세 사람의 조각상이 꾸며져 있었다.

 

▲ 삼국지의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의 결의를 맺은 도원. ⓒ양기혁

 

▲ 삼국지의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의 결의를 맺은 도원. ⓒ양기혁

유비는 관우의 복수를 위하여 오나라 손권과의 전투에 친정하였다가 223년 호북성 경계에 있는 장강 근처의 백제성(白帝城)에서 병이 깊어져 죽었다. 촉한을 세우고 황제를 칭한 뒤 3년 만이다. 죽음을 맞이하여 유비는 제갈량에게 이제 17살에 불과한 유약한 아들 유선을 부탁하며 말하였다.

“… 만약에 뒤를 이을 아들이 보필을 받을 만하다면 지켜주시오. 그런 재목이 안 된다면 그대 스스로 그 자리를 차지해도 좋소.”

아들 유선이 명민하지 못하여 나라를 지키지 못할 때는 황제의 자리에 올라도 좋다는 유비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유비가 죽고 난 뒤 권력 을 한 손에 쥐고 있던 제갈량은 유씨의 한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헌신하다가 오장원에서 죽음을 맞게된다. 후세 사람들은 조조의 아들 조비가 후한의 헌제로부터 선양의 형식을 취하면서 나라를 찬탈하여 위나라를 세운 것을 비난하며, 2대에 걸쳐 헌신적으로 보필한 제갈량의 충심에 감복하고 그를 숭배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충효와 혈통주의를 강조하는 주자학적인 지배권력의 논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당나라의 시인 두보도 만년에 이곳의 초당에 머물고 있을 때 ‘촉상(蜀相)’이라는 제목으로 무후사를 노래한 시를 한 수 남겼다.

丞相祠堂何處尋 승상의 사당이 어디인지 찾아보니
錦宮城外柏森森 금관성 밖 잣나무 숲이라네
映階碧草自春色 계단에 드리운 풀은 봄빛이 완연하고
隔葉黃鶴空好音 나뭇잎 사이로는 꾀꼬리 울음소리 들리네
三顧頻繁天下計 세 번 찾아준 은혜에 천하삼분의 계책을 내고
兩朝開濟老臣心 두 대를 정성껏 섬긴 늙은 신하의 마음
出師未捷身先死 출사하여 아직 이기지 않았는데 몸이 먼저 죽으니
長使英雄淚滿襟 후세의 영웅들이 옷깃을 적시네.

 

▲ 도원결의를 맺는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의 조각상과 사당 안의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의 영정. ⓒ양기혁

 

▲ 도원결의를 맺는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의 조각상과 사당 안의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의 영정. ⓒ양기혁

무후사 앞 버스정류소에서 82번 시내버스를 타면 두보초당 앞에서 내릴 수 있다고 한다. 기다린 지 오래지 않아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칭다오에선 1원 하는 버스비가 여기선 2원이다. 얼마를 가다 보니 학교가 나오고 교문 위에 인터뷰하러 오는 학생들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어서 어젯밤 룸메이트였던 리양이 다닌 체육대학임을 알 수 있었다.

정신이 팔려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쳐서 쳐다보니 대머리에 짙은 노란색 상의와 자줏빛 긴 치마를 두른 라마승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였다. 큼직한 배낭을 지고 서있는 모습이 안돼 보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내가 미처 자리에 앉기 전에 한 중년 신사가 잽싸게 그 자리에 앉고 말았다. 스님의 호의만을 받고 배낭을 벗어서 바닥에 내려놓고 나니 한결 편했다. 스님은 몇 정거장을 더 가서 내렸다.

정류소가 가까워 올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안내 방송에서 ‘두푸’라는 소리가 나오는지 귀를 기울여 들었다. 버스는 한참을 달려갔고 ‘두푸’라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앞에 앉아 있는 여학생에게 지도를 보여주며 물었다.
“칭원, 워야오취두푸차오당 시아처짜이날(말씀 좀 묻겠습니다. 두보초당 가려고 하는데 어디서 내려야합니까)?”
여학생은 내가 건네 준 지도를 잠시 보더니 나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꾸어러(지나갔다)!”
아차 싶었다. 바닥에 내려놓은 배낭을 다시 등에 지고 정류소에막 멈추려고 하는 버스에서 내렸다. 뒤에서 여학생이 하는 말이 들려왔다.
“뒤미엔 짜이휘치….(건너편에서 돌아가세요….)”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며 생각해보니 ‘두푸차오당’역은 없고 ‘차오당’만 있었던 것 같다. 무후사 앞 버스정류소의 노선안내표에도 草堂’역만 있었고, 안내방송에도 차오당’은 얼핏 들렸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차들이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어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 사이를 오토바이들이 미끄러지듯이 빠져나간다. 길을 건너서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택시를 잡을 수가 없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청년이 멈추더니 나에게 어디 가느냐고 물어본다. 내가 그를 쳐다보면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냥 가버린다. 얼마 후 또 다른 오토바이가 다가오더니 “나리(어디 가세요)?”라고 물어본다. ‘왜 나에게 그걸 물어보느냐.’라는 표정으로 내가 시큰둥하게 쳐다보고 있으니 오토바이를 돌려 가버린다.

그때서야 나는 그들이 오토바이로 택시 영업을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퀵서비스’배달업과 같은 것이다. 물건이 아니라 사람을 태운다는 것이 다르지만. 그리고 한번 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빈 택시를 잡을 수도 없고 차가 밀려서 시간도 많이 걸릴 것 같았다. 택시든 오토바이든 이번에오는 걸 타고가자 하고 마음먹고 있는데 이번에는 헬멧까지 갖춰 쓴 오토바이 한 대가 다가왔다. 내가 먼저 그 청년에게 물었다.

“다오 두푸차오당 둬샤오치엔(두보초당까지 얼마예요)?”
청년이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자 다시 물었다.
“산콰이(삼 원)?” 그가 웃으며“산스콰이(삼십원).”라고 정정했다.
비싸서 안 탄다고 하자 청년은 두보초당이 거리가 멀고 지금은 차가 많이 밀리는 시간이라서 합당한 가격이라고 설명을 했다. 내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그는
가격을 조금 내렸다.
“얼스바(二十八, 28원).” “얼스우(二十五, 25원).”
25원이면 내가 타겠다고 했더니 25원은 안 된다고 한다. 이때 건너편에 있던 중년 남자가 오토바이를 부르더니 자기가 타고 가겠다고 한다. 청년은 그 남자를 쳐다보고 나서 나를 돌아보더니 뒷좌석에 타라고 손짓을 했다. 그가 내 배낭을 받아 기름통 위에 얹어놓고,

헐렁한 핼멧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한손으로 헬멧을 쥐고 한손으로 그 의 어깻죽지를 잡고 있으니 오토바이는 출발했다. 교통신호는 대부분 무시하고, 인도와 차도, 횡단보도를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으로 달린다. 거의 모든 차들이 그러하듯이 오토바이도 끊임없이 경적소리를 울리며 차량들 사이를 곡예운전하듯 달려갔다.

운전 중에도 그는 계속하여 뒤에 탄 나에게 말을 걸어왔는데 나는 거리의 소음 때문에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고, 건성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대화는커녕 가는 내내 조마조마하고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 ⓒ양기혁

 

▲ ⓒ양기혁

곧 두보초당에 도착했고 약속한 요금 25원을 지불했다. 5원 깎은 흥정에 나는 만족했는데 한국 돈으로는 800원 정도이다. 오토바이 청년도 내가 내미는 돈을 받고 만족스러운 듯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양기혁

   
필자 양기혁은 1958년 서귀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 상경해 도시 생활을 시작했다. 중앙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나서 서울에서 바쁘게 살다 중년에 접어들고서 고향으로 돌아올 결심을 했다. 제주시에서 귀농 생활을 즐기다 우연치 않게 방송통신대 중문과에 입학해 중국어를 공부했다. 이왕 공부한 김에 중국 횡단 여행을 다녀와 <노자가 서쪽으로간 까닭은?>이라는 책을 냈다. 노자는 어쩌면, 필자 자신인지도 모른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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