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후 칼럼> 위험사회, 개인의 책임인가


저녁은 인간에게 행복한 시간이다. 산업사회에서 저녁이 주는 의미는 매우 크다. 낮에 겪었던 치열한 삶의 행진을 잠깐 멈추고 가족과 함께하거나 오랜만에 지인과 담소를 나누는 등 개인의 여가를 맘껏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밤이 점점 무서워지고 있다.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강력 범죄가 집 안이나 길거리, 지하철, 술집, 여행지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사고는 순간이지만 그 파장은 매우 심각하다.

최근 여의도, 수원, 의정부에서 일어난 소위 ‘묻지마 칼부림’ 사건으로 선량한 시민들이 큰 피해를 보았다. 서울과 수원, 통영, 제주 등지에서 발생한 성폭행 살인사건, 나주 어린이 성폭행 사건 등 엽기적인 흉악범죄가 연이어 발생했다.

정부자료에 의하면 지난 5년간 강간과 강제추행 등 성범죄를 저지르고 잡히지 않은 범죄자가 9천여명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10여년 간 우발적인 범행과 아동ㆍ성폭력 범죄가 급격히 늘어났다. 불특정 다수가 범행 대상이 되기 때문에 너도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우리 공동체가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말한 ‘위험사회’로 접어든 느낌이다. 벡은 "위험은 산업사회가 초래한 성장의 딜레마"로 보았다. 그 원인으로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위험 요소의 증가를 지적한다. 대표적 사례로 방사능, 기후변화, 유전자 조작, 테러, 금융위기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경제성장에 따른 양극화와 사회불안, 인간소외가 개개인의 위험을 더 키우고 있다. 예외적인 위험이 일상화된 것이다. ‘위험사회’의 재앙이 우리 사회의 역동적인 안전성을 급격히 소진시키고 있지 않나 걱정스럽다.

‘무차별 범죄’에 대해 전문가들은 여러 가지 의견을 내놓고 있다. 대체로 높은 실업률과 경제적 빈곤, 취약한 사회 안전망, 가족해체, 경쟁적ㆍ갈등적인 대인관계 등 심각한 사회적 스트레스 상황에서 밀려난 절망형 외톨이들이 사회 전체를 적으로 삼아 분노를 표출한 것으로 보고 있다. 자포자기ㆍ복수심리를 가진 사람들이 제3자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화풀이’, ‘나를 알아 달라’는 신호로 해석한다. 세계 최하위의 행복수준이 낙오자의 절망과 폭력 수준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음란물의 무차별적인 유포가 성범죄를 부추기고 있다. 음란물의 영향이 컸다는 성폭력 가해자들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일부 네티즌들이 아동 성폭력 가해자를 부러워하는 댓글을 올리는 등 아동 성폭력에 대한 죄책감도 희박하다. 한국은 온라인 아동 음란물의 생산 유통에서 세계 6위 수준이다.

작년에 법원은 13세미만 아동 성범죄자의 절반을 집행유예로 풀어줬다. 아동 음란물의 제작ㆍ유통과 성범죄를 관용하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 허술한 정부 대책 등이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사회의 위험은 사회 경제적ㆍ문화적인 요소와 인간의 소외ㆍ심리 불안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산업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절망범죄’를 사회책임보다는 개인책임으로 돌리는 시각이 있다. 개인의 무능력을 탓한다. 성폭력의 원인을 여성 개인에게 두고 성차별성역할론만 강조하는 가부장적 남성 지배의식의 뿌리는 깊다.

그렇기 때문에 성범죄는 사회 부적응자뿐만 아니라 학생, 회사원, 지도층 등에서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다. 성폭행은 사회적 범죄가 아닌 개인 사이에 일어난 일로 보는 사회통념도 문제다. 개인의 불행에 대해 홀로 무한책임을 지도록 강요당하고 있는 셈이다.

‘위험사회’를 조장하는 범죄행위에 대해 사회 전반의 책임의식을 높여야 한다. 범죄발생이 최소화되도록 경제적 빈곤과 사회ㆍ문화적 인프라의 개선, 정부의 위험관리 능력 제고와 국민의 신뢰를 얻는 일이 급선무다.

대증요법과 함께 위험의 뿌리를 제거하는 근원적 처방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주민 주도형 지역 치안망의 구축, 취약 아동에 대한 지역사회의 돌봄서비스 등과 같이 자발적인 국민참여가 수반되어야 장기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당사자인 피해자와 가해자의 문제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대증요법인 법과 제도의 개선, 단속 강화만으로 흉악 범죄를 근절할 수 없다. 정부는 불심검문, 아동음란물 단속, 화학적 거세 대상의 확대 등 강경한 대책을 내놓고 있다. 범죄예방 효과가 의문인 사형 집행의 부활과 물리적 거세를 주장하는 복수심도 가세했다.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다.

현행 법규를 엄격하게 지속적으로 집행하는 것이 범죄 예방에 훨씬 효율적이다. 정부 대책은 범죄 위험에 분노하는 민심에 편승해 가해자 엄벌위주로 되어있어 예방효과와 실효성은 의문이다. 초기에 인기영합적 강경책은 일시적 효과가 있겠지만 일정 기간이 지나면 범죄가 되풀이될 가능성이 크다. 사형제도는 폐지되는 것이 마땅하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는 비대칭적이기 때문에 흉악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처벌 강화론’이 난무한다. 엄벌만이 능사는 아니고 범죄가 발생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사회 안전망을 촘촘히 구축하여 개개인의 행복과 인정욕구를 충족시킬 필요가 있다. 개인차원의 정신적 치유 및 복지 대책과 인정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회적 쉼터가 필요하다.

이러한 조치는 범죄의 위험성을 완화시킬 수 있는 긍정적 기제로 작용할 것이다. 피해자에 대해서는 국가 차원에서 치료ㆍ정신상담 등 재활에 소요되는 비용의 지원 수준을 현실화하고, 아동 범죄의 발생 소지가 큰 취약한 주거 환경 등의 개선과 빈곤층 가정에 대한 보호 프로그램이 마련되어야 한다.

오늘날 대중문화가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범죄 발생의 원인과 관련하여 사회 경제적 환경과 아울러 대중문화의 악영향이 많이 지적되고 있다. 일부 언론사의 인터넷 사이트는 선정적 제목이나 음란물에 가까운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는 실정이다. 스마트폰, 인터넷 중독 현상도 심각하다. 누구나 쉽게 악성 아동 음란물에 접근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아동 음란물이 사람들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인간성을 말살하는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아동 음란물에 대해 정부의 강력한 단속과 처벌이 지속적으로 시행되고, 아동 음란물 근절에 국민들도 적극 동참해야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 권영후 전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장. ⓒ제주의소리

초등학교부터 성평등, 성폭력 예방과 대중매체, 인터넷 활용을 정규 교육과목으로 편입시켜여야 한다. 학부모들의 관심도 필요하다. 현재 우리 언론이 ‘위험’ 이슈의 다양한 공론화, 시민의 참여 유도, 심층진단 및 근본 대책을 지속적으로 제시하는 본연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언론은 선정적인 범죄 상업주의와 떼거리 보도, 냄비 근성을 탈피하여 차분하게 사회적 의제를 이끌어야 한다. 위험에 대한 성찰과 함께 정부, 언론, 시민사회 그리고 모든 국민의 참여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권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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