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언제나 아시아에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언제나 아시아에 있었다, 그러나…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경훈의 제주담론> 下 아! 8월의 아시아여, 난징으로 떠난 '기억여행'

난징 이후의 이야기-인간임을 선언한 인간, 기묘한 풍경의 변주

자, 이제 이번 난징여행 동안 사유한 속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무엇이었을까? 필자가 본 난징대학살의 기록들과 증거물들, 저 광란의 인간의 대지의 기록들을 보고 난 나의 속마음, 그 저음부에서 들려오는 베이스 톤의 그 슬픈 변주를 무엇이라고 부를까?

1편에서 필자는 유독 침묵하고 변명하는, 죄책감 없는 난징 참전군인들의 태도에 대해 놀라움을 표한 바 있다. 필자가 세상에서 가장 많이 가 본 나라가 일본이다. 그리고 일본사람들의 그 친절함이야 이미 알려진 일이었지만, 시골의 노인들의 모습은 그렇게 평화롭고 따스할 수밖에 없는 얼굴들이었다. 친절함은 기본이고.

그런데, 그때 만난 그 정겨운 노인들 중 8, 90세가 된 남자노인들이 난징의 학살자들일 수 있다니. 물론 다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연령대의 남자들은 당시 모두 태평양전쟁의 참전군인들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최후의 국민총력전 시기, 일본은 식민지의 청년들도 군인으로 다 뽑아갔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중의 일부는 중국대륙에서 싸웠을 것이며, 그들은 난징뿐만 아니라 대륙의 곳곳에서 난징에서와 같은 행동으로 일관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기억 중 한 부분은 분명히 1930년~40년대에 걸쳐 있을 것이고, 그 걸쳐진 전쟁의 경험 중 가해자로서의 기억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일본의 참전군인 출신 노인들은 자신들의 경험에 대해 솔직하게 증언하지도 않으며, 또한 난징에 대한 죄책감을 표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다.

2010년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했던 필자의 눈에 비친 그 노인들은 다수가 줄을 서서 참배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 무더위에도 침착하고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서 참배하고 있었다. 야스쿠니 신사는 ‘천황의 군대로 전쟁에 참여해 전사한 군인’들을 합사한 신사다. 제국주의시대 일본군의 ‘군인칙유(軍人勅諭)’를 따르는 군인들의 신사인 것이다.

전장의 일본군이 달달 외우고 다녔던, ‘군인칙유’의 첫 문장은 “우리나라의 군대는 천황에게 속해 있다.”로 시작한다. 1882년 메이지는 일본군대를 천황의 군대인 황군으로 선언하고, 황군의 복무규율을 규정한 ‘군인칙유’를 선포하였다.

그 후 일본군은 천황의 군대가 되어 ‘천황의 명령’ 하나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철저한 ‘천황제일주의 군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당시 참전군인들은 죽을 때까지 천황의 군인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들 중 대부분은 현재까지도 군인 신문을 구독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니라, 그들 방식, 즉 ‘천황의 군인들의 방식’으로 기억을 전수하고 있는 것이다. 야스쿠니의 긴 대열은 그 기억의 길이처럼 느껴졌다.

 

▲ 2010년 8월 15일 종전기념일의 야스쿠니 신사. 오전부터 많은 참배객들이 입추의 여지 없이 신사를 향했다. 사진 위 왼쪽은 중문에서 돌아본 인파, 오른쪽은 우익들의 참배행렬. 일본군복과 일장기는 트레이드 마크다. 아래 사진은 배전 앞의 참배인파인데, 적어도 30분은 넘겨야 참배할 수 있을 정도로 기다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박경훈

야스쿠니 신사의 경내에 조성된 ‘유슈칸(遊就館)’은 그러한 <천황의 군대>의 전쟁을 그들의 의도대로 스토리텔링한 전시관이다. 즉, 당시 외세의 침탈에 맞서 어쩔 수 없이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자위적 전쟁이었음을 나타내고, 그렇게 시작된 전쟁에서의 각종 전투기록과 무용담을 애국주의의 그릇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러므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다는 행위 자체는 단순히 전몰용사에 대한 참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근대 이후 일본군이 자위적 전투를 벌인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천황의 군인이었던 시절의 기억을 되새김하며 보전하고 있는 것이다. 난징대도살기념관과 정확히 대척지점에 야스쿠니 신사가 건재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야스쿠니 유슈칸 전시공간에 난징대학살은 존재하지 않는다.

 

▲ 1882년 개관한 유슈칸은 일본 최초이면서 가장 오래된 전쟁박물관이다. 패전 전까지는 제국군대의 무기박물관이었고, 잠시 폐쇄되었으나, 역사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재개관하여 사용되었으며, 1992년 신관을 새로 개장했다.(사진 왼쪽) 이곳에는 메이지유신 이후, 태평양전쟁까지의 테마로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자신들의 전쟁이 침략 전쟁이 아니라, 오히려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애국주의 전쟁이라는 관점을 유지한다. 제국시대의 무기들이 전시된 1층 로비 공간.(오른쪽 사진) ⓒ박경훈

1946년 1월 1일, 일왕 히로히토는 연두 조서를 통해 살아있는 신, 아라히토카미(現人神)에서 보통 인간이 되었음을 선언한다. 소위 <닌겐센엔(인간선언)>이다.

“…전략… 천황과 국민은 굉장히 강력하게 묶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합은 신화와 전통에 의한 것은 아니다. 또 일본인은 신의 자손이며, 다른 국민보다 뛰어나 다른 민족을 지배할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잘못된 관념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수천 년의 헌신과 열애에 의해 염출된 신뢰의 끈이며, 애정의 끈이다. …후략…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고모리 요이치, 뿌리와 이파리, 2004)”

라고. 인간이 인간임을 선언하다니, 참 이해가 안 가는 희대의 이벤트라고 보겠지만, 이는 전범국가 일본의 최고 권력자로서의 책임을 면피하려는, 점령국 미국과 국체인 천황을 보호하려는 패전국 일본 기득권층이 문화적으로 치밀하게 정치(定置)시킨 정치적 쇼였다. 이 일은 맥아더의 GHQ(연합군 최고사령부 / General Headquarters)가 발안하여 기획된 것이다.

 

▲ 1945년 9월 27일, 맥아더를 방문한 히로히토. 이 사진은 당시 일본인들에겐 충격이었다. 맥아더가 평상의 근무복을 입은 채 예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일본의 현인신을 맞았으니. ⓒ박경훈

이는 만세일계를 이어 온 현인신의 상태에서 저지른 태평양전쟁의 전범영수로서의 책임을, 평범한 인간이 되었다는 선언 하나를 통해 말끔히 청산하기 위한 미국과 일본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었다.

조선과 대만 병탄, 중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아시아의 최고 전범을 미국과 일본 두 나라의 이해관계 속에서 그들 방식대로 처리한 것이다. 맥아더와 미국은 천황에 대한 면죄부와 동시에 희생양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서 억울한 누명을 쓴 온건주의 각료들마저 ‘도쿄재판’을 통해 형장의 이슬로 보내 버렸다.

일본군 중에서는 누구보다 군인으로서의 도덕성에 있어서 엄격했고, 난징대학살의 실상을 알고 난 후, “우리가 끔찍한 짓을 저질렀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난징에서 도망친 중국인들과 미래의 중일관계를 생각하면 한숨만 나온다. 나는 외롭다. 승리를 기뻐할 수도 없다.”고 말한, 당시 폐결핵으로 전장에 있지 못해, 황족인 아사카 야스히로 장군이 모든 지휘권을 행사했던 난징대학살의 책임을 물어, ‘마쓰이 이와네’를. 

군부 강경파의 논리가 지배하던 전쟁 당시에도 침략을 피하고, 평화를 유지하려는 소신을 버리지 않았고, 군부에 맞서 전쟁의 종결을 위해 힘쓰고 종전협상을 담당했던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끌려간 도공의 후예인 외상 ‘도고 시게노리(東郷 茂徳 / 한국명: 朴茂德)’를. 마지막 순간까지 태평양전쟁을 반대했던 ‘히로타 고키(広田 弘毅)’ 수상을.

중일전쟁을 반대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1941년 이후에 전쟁을 반대한다고 배신자 취급을 당했는데, 지금은 연합사가 전범취급을 하고 있다.”고 한 ‘고노에 후미마로(近衛 文麿)’ 전 수상을.

그들은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과 함께 A급 전범으로 사형되었다.(고노에 후미마로는 자결했다.) 이 중 두 사람은 난징대학살과 관련하여 누명을 쓴 희생양이었다.

난징대학살의 주역이었던 ‘아사카 야스히코(朝香宮鳩彦王)’는 히로히토와 맥아더의 거래로 성사된 ‘황족 전범재판 불기소 방침’에 따라 무죄로 방면되어 평민으로 강등(황족이 평민이 된다는 것이 무슨 처벌의 의미가 있는가? 이미 상징천황제로 바뀐 후인데.)된 후 히로히토와 주말마다 골프를 치고 골프장 설계도 하면서 살다가 93세의 나이로 편안하게 생을 마쳤다.

당시 도쿄재판의 판사 중 한 사람이었던, 앙리 베르나르(Henri Bernard, 프랑스 출신 검사로 동경재판 당시 11인의 판사 중 한 명)는 “재판이 진행이 너무 불공정하고, 기술적으로도 결함이 많아 그 어떤 판결도 불가능하다. 일본이 저지른 평화에 반하는 범죄에는 일체의 기소에서 빠져 나간 주범들이 있고, 어떤 경우에도 본 건의 피고들은 공범에 지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 히로히토. 인간의 모습, 현인신의 모습.

일왕 히로히토는 인간선언이라는 비장한 코미디를 통해 수억 아시아인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의 면죄부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이 이벤트가 전범책임을 면피하기 위한 쇼였다는 것은 오래지 않아 드러났다.

그는 군인칙유를 따르는 군인들을 추모하는, 즉 천황의 군대를 위한 안식처를 찾는다. 바로 야스쿠니 신사다. 히로히토는  종전 후부터 1975년 11월까지 8차례나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이러한 <천황>의 방문에 신사측은 외교적으로 공식적으로 해체해 버린 군국주의 일본의 아카이브를 구축했다. 그리고 오늘도 그 아카이브는 일본 군국주의의 영광을 전수하는 교육의 장으로 훌륭하게 기여하고 있다.

일왕 히로히토의 업적과 그의 시대에 만들어진 역사적 자긍심은 야스쿠니에 남아 여전히 일본 군국주의의 온상이 되고 있다. 1978년 10월, 도쿄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사형당한 신위들의 합사가 비밀리에 이뤄졌고, 이후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전후 반성의 진정성을 시험하는 가장 폭발성이 강한 기억의 장소가 되었다. (히로히토가 죽은 후 도쿠가와 요시히로 시종장은 그가 A급 전범의 야스쿠니 신사 합사를 불쾌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전했다.

또한 실제 A급 전범 합사 뒤에는 한 번도 참배하지 않았다. 또한 현 아키히토(明仁) 일왕은 즉위 이후 단 한 번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국제법상의 전범들이 그의 성스러운 전사들과 함께하면, 천황을 위한 영령들을 애국주의와 결부시켜 온전하게 보존할 수 없으리란 판단에서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야스쿠니의 <천황의 군인들>을 위해 말년을 보냈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 욱일승천기와 히로히토(그래픽: 필자). 아직도 한국인들과 아시아인들에게 <욱일승천기>는 기억하기 싫은 식민시대의 상징으로 작용한다. 그 상징의 중심에 히로히토가 있다.

히로히토는 표면적으로는 난징대학살과 관련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 되어있다.(사실, 맥아더와 GHQ가 열심히 공작한 탓에.)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것일 뿐, 실제적으로는 난징대학살의 실상을 모를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난징대학살의 총체적이고 직접적인 책임은 일왕가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바로 난징진공전투의 총지휘자가 ‘아사카 야스히코’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아사카는 히로히토 일왕의 삼촌으로, 왕가의 남자들은 군인이 되어 ‘천황’을 보필한다는 왕가의 전통에 따라 군인이 된 왕자였다.

아사카는 일왕 히로히토가 난징공략 7일 전에 폐결핵이 심해진 ‘마쓰이 이와네’ 총사령관을 대신할 지휘관으로 긴급하게 파견한 장군이다. 마쓰이를 대신한 그에게 난징공략의 지휘권과 모든 군권이 있었으며, 군대는 그의 통제하에 있었다. ‘천황의 군대’라는 일본군은 특히 상명하복이 철저한 군대였다. 그들은 <군인칙유>를 달달 외며 전장을 누볐다. 그러므로 일왕-사병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계통화가 이루어진 군대에서 일부 장교들만의 자율적 의지로 30만 명에 달하는 도살과 만행이 일어날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 아사카가 부임한 뒤 아사카 개인 봉인이 찍힌 비밀명령서가 각 부대의 지휘관들에게 하달되었는데, “모든 포로를 죽이라.”는 것이었다.(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지만.) 그 후 ‘마쓰이 이와네’가 병세가 호전되어 다시 총사령관으로 복귀했지만, 그의 통제권은 각 부대의 장교들에게 더 이상 먹히지 않게 되었다.(마쓰이는 학자 집안 출신의 독실한 불교신자였기에 군인으로서의 자부심과 도덕성 같은 것을 갖춘 인물이었다.) 결국, 난징대학살의 실제적인 통제는 아사카가 했으며, 아사카와 친한 장군들이 전체적으로 주도했다. 그러므로 그런 그의 행적을 히로히토가 모를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난징대학살은 당시 세계의 신문들의 일면을 장식하기도 했던 사건이었다.

또한 히로히토의 막내동생 ‘미카사 다카히토(三笠宮崇仁)’는 난장대학살이 발생한 지 5년 뒤인 1943년 난징 사령부에서 참모를 지내면서 대학살의 이야기를 듣고 경악해 《한 일본인의 중일전쟁에 관한 성찰》이라는 보고서를 쓰기도 했다.

히로히토는 이 보고서를 접했을 것이다. 이러한 왕가의 친인척들과의 관계 등을 종합해볼 때 히로히토가 난징의 실상을 몰랐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히로히토는 난징대학살과는 직접적인 관련과 책임이 없는 것으로 되었으며, 있다 해도 인간이 된 신이었으므로, 인간 히로히토는 책임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끈질긴 사과 요구에도 그는 사과하지 않았고, 죽는 날까지 끝내 난징에 대해서는 아무런 인간적인 사과와 표현을 하지 않았다.  

히로히토는 전범으로서의 아무런 죄 갚음 없이 살다 갔다. 이른바 군국주의와 그로 무장한 황군으로 인해 아시아 수억의 인민은 오랫동안 그 후유증을 겪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패전 후 그는 자연과학도가 되기도 했었고, 편안히 골프를 즐기고 여전히 <천황>이라 불리며, 특별한 존재로 살다 갔다.

또한 그는 죽을 때까지 야스쿠니를 위해 살았다. 야스쿠니 신사는 말년의 그의 재정지원으로 대대적인 증·개축을 하기도 한다. 그 증·개축을 통해 천황의 군대와 그들이 치른 성전에 대한 영원한 기록의 전시관인 ‘유슈칸’ 신관이 들어섰다. 히로히토는 신에서 인간의 지위로 내려오면서 모든 전쟁범죄로부터 면죄부를 받았다.

그는 인간임을 선언한 이후에도 단 한 번도 난징의 희생자들과 아시아 제 국가, 민중들에 대해 사과한 적이 없다. 인간으로서의 히로히토는 그런 적이 없으니, 학살에 대한 인간적인 책임도 없는 셈이다. ‘기만과 가면’ 그대로 살다 갔다. 하지만, 히로히토는 전쟁의 중심이었고, 주전파였다. 아시아 제 국가들에서 벌인 일본군의 인종청소는 기실 그의 복심에서 나왔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도쿄재판에서 도조 히데키는 재판부의 질문에 대한 답변 중 이런 말을 했다. “천황이 시키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그러므로 일본군이 외국에서 행한 모든 반인륜적 전쟁행위들은 결국 히로히토가 시킨 일들이었다.

전세가 악화되던 1945년 2월, 당시 수상이었던 ‘고노에 후미마로’는 강력하게 히로히토에게 종전을 진언했으나, 히로히토와 군부는 이 건의를 기각하고 ‘국체 수호(일본 천황가의 생존)’를 주장하면서 전쟁을 계속했다.

그 결과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1945년 3월 15일 도쿄 대공습(민간인 약 15만 명 사망)과 8월 6일, 9일의 히로시마(90,000~166,000명 사망), 나가사키(60,000~ 80,000명 사망)의 원폭 투하를 불러일으켰다. 원폭 투하가 있기 10일 전, 7월 26일의 포츠담 선언에 ‘일본의 민주화’가 명기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범 재판에서 천황제가 무너지면, 사형될 것을 두려워한 히로히토와 군부는 포츠담 선언을 거부했다.

결국 두 번의 원폭 투하라는 결정타를 맞은 후인 8월 14일 선언에 서명했고(이때는 이미 천황가의 생존이 보장되었음.), 8월 15일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한다. 자신과 왕가를 살리기 위해 300,00~400,000만여 명의 엄청난 자국의 국민을 희생시킨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야욕을 위해 아시아 제 국가의 민중들을,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그를 신으로 받들었던 신민들을 희생시켰다. 또한 포츠담 선언의 뒤늦은 수락은 소련의 참전을 불러일으킨다. 러시아의 북방 4도(쿠릴 열도) 문제의 기원이다.
 
1989년 1월 7일, 일왕 히로히토가 사망했다. 이로써 1926년부터 시작되어온 쇼와(昭和)시대가 63년 만에 막을 내렸다. 그의 나이 88세였다. 수많은 억울한 목숨을 앗아갔던 그는 천수를 누린 것이다. 일본에서는 대대적으로 히로히토 추모 분위기를 조성한다.

궁내청(일본왕실의 사무담당) 기자회견이 뉴스로 방영되고, 히로히토의 사망 이후 이틀 동안 NHK는 물론 모든 민영방송들이 예외 없이 일왕 사망 관련 보도만 했다. 또한 그를 추도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붐을 이루었다. 매스컴은 그가 ‘평화주의자’란 점을 강조하면서 전쟁의 과오는 그의 의지와 무관함을 역설했다.

당시 수상 ‘다케시다 노보루’는 “언제나 평화주의자였고 입헌군주였다.”라며 애도했다. 전쟁의 광기와 그는 완전히 분리되었다. 또한 히로히토 개인은 물론 일본의 과거행위 역시 반성할 이유가 없는 역사가 되었다. 

허버트 빅스(Herbert P. Bix)는 그의 저서 《히로히토 평전(오현숙 번역, 삼인, 2010)》에서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경험이나 사건, 그로 인해 형성된 가치 기준, 행동을 규정하고 인격을 형성한 사상 등, 히로히토가 입을 다문 채 침묵으로 일관한 것은 이외에도 많다. 타인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의 지위를 결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점에서 그는 근대의 군주 가운데 가장 솔직하지 못했던 인물 축에 들었다.”고 히로히토를 평했다.


미국은 언제나 아시아에 있었다. 그러나 …

미국은 단 한 번도 아시아인의 입장이나, 제국주의 일본의 피해 당사국으로서의 아시아 제 국가들의 입장을 자신의 것으로 취해 본 적이 없는 유일무이한 아시아의 맹방(?)이요, 태평양전쟁 종전 후의 최대 대주주였다. 그들은 그들의 이해관계 이외의 것에 대한 책임감과 이해심이 결여된, 아주 특이한 실제적 힘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미국의 전략에서 이루어진 모든 전후 조치들은 아시아 제 국가들에 대한 일본의 전후 청산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배경이 되었다. 전후 아시아의 지도 그리기는 미국의 아시아 경영에 필요한 대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아시아는 현재까지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종전 후 이 유래 없는 집단학살을 포함한 전쟁에 대한 단죄와 책임자 처벌 그리고 패전국의 전후처리에 있어서 미국은 신중하지 못했다.(아니, 이것은 틀린 표현이다. 그들은 아주 신중했다. 다만 그 신중의 잣대가 철저하게 미국의 아시아 경영전략과 다가올 냉전프로젝트에 입각해 있었다는 것이 전후 아시아 국가와 인민들에게는 최악의 불행이었다.) 미국의 이익에 부합되는 한 천황의 책임도, 아사카 야스히코의 죄도, 이시이 시로(731부대의 악명 높은 사령관)의 추악한 실험들도 거래되었다.

아니, 미국은 일본이 반인륜적인 활동을 통해 얻은 귀중한(?) 비인도적 과학실험의 성과를 철저하게 가로채기 위해,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도쿄전범재판은 철저하게 미국의 통제하에 이루어졌으며, 미국의 이익에 부합되게 조정되고 연출되었다. 도쿄재판은 미국의 입맛에 맞게 몇몇의 희생양을 처단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 1948년 동경재판의 모습.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범들이 중앙에 기립·도열해 있다.

 

아이리스 장은 《난징의 강간》에서 “1945년 미군 점령군이 어렵게 얻은 일본군의 기록들은 미국정부에 의해 마이크로필름으로 만들어지기도 전에 1957년 갑작스럽게 일본에 반환되고 말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난징대학살과 관련한 최고 책임자들을 규명할 수 있는 길이 막혀 버린 것이다.

미국은 아시아와는 언제나 그런 관계였다. 유럽이민자들이 이주해 건국한 백인들의 나라인 미국에게 대서양은 안마당이지만, 태평양은 경영해야 하는 타자의 바다였기 때문이다. 즉, 정복하거나 확보해야 할 전략적 공간이었던 것이다.

미명의 근대로 진입하던 시기, 미국과 우리나라와의 인연도 분노와 기만으로 얼룩져 있다. 일명 ‘카스라-태프트 밀약’이라 불리는 미일 간의 비밀협정이 그것이다. 1905년 7월 29일, 일본 측의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桂太郎)와 미국 측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특사였던 미 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가 도쿄에서 비밀리에 맺은 협정이다.

일본의 한반도 강점을 인정하고 자신들은 필리핀을 보장받는 뒷거래였다. 그런 미국을 믿고 고종황제는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를 밀사로 파견, 루즈벨트에게 보냈으나, 외면당하고 만다. 풍전등화의 왕국을 지키려 했던 고종황제는 그런 미국을 우방으로 기대했으니, 참 슬픈 역사의 시작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한미관계의 질긴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항상 잇속은 미국이 챙기고 우리는 내어주면서, 또는 그들의 대리인이 되는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도 그들을 피를 나눈 맹방으로 언제까지나 고마워해야 한다는 웃기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제주의소리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0 / 400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순 추천순 이 기사에 달린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