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 칼럼> 재일동포들의 애향심 잊지 말아야-

지난날 제주도 주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본격 건너가기 시작한 것은 불행하게도 식민치하에서였다. 경상도나 전라도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일제의 교활한 수탈정책으로 하루 아침에 토지를 빼앗기거나 어업의 침탈로 생활을 지탱하기 어려운 농어민들이 일품이라도 팔기 위해 조상 대대로 살아온 탐라의 고향을 어쩔 수 없이 등졌던 것이다.

목적지는 거의 오사카(大阪)였다. 그때 이 일대에는 공장지대가 확대되고 있었으므로 일거리가 충분했다. 특히 방직공장이 번창함으로써 ‘동양의 맨체스터’라고 불리던 무렵이었다. 하다못해 등짐이라도 지면 될 것이었다. 그들의 말을 모르고 의사가 잘 통하지 않는다고 해서 굶주릴 염려는 없었다. 현재 재일동포들의 거주지가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간사이(關西) 지역에 몰려 있는 것이 그런 때문이다.

특히 1920년대 중반 무렵부터는 제주에서 오사카를 연결하는 뱃길이 뚫림으로써 제주 주민들의 일본 이주가 한결 수월해졌다. 일본 당국이 부족한 일손을 조달하기 위해 항로를 개설한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제판(濟阪) 항로다. 일장기를 내걸은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가 파도가 넘실대는 현해탄을 정기적으로 오가며 이주민을 실어날랐다. 언젠가 다시 돌아오마고 마음은 먹었지만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이었다.

남정네만 떠나간 게 아니었다. 부녀자들도 보따리를 짊어지고 낯설은 타향길에 함께 따라나섰다. 이엇사나, 이어도 사나-. 희미하게 멀어져가는 한라산을 바라보며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진 뱃길이었다. 그렇게 떠나간 제주도 주민들이 1930년대 한때는 연간 2만명 가까이 육박하기도 했다. 제판항로의 왕복 이용자가 연간 평균 3만2000여명에 이르렀다는 통계숫자가 그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정착 생활은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저들의 질시와 모멸은 그렇다 치더라도 살림집부터가 문제였다. 우선 아쉬운 대로 개천가의 버려진 땅에라도 얼기설기 판잣집을 마련하고 비바람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사람들로서는 돼지나 키우던 하찮은 들판(猪飼野)이었지만 이주민들이 몰려 살기에는 그런대로 제격이었다. 그곳이 오사카 재일동포들의 중심지인 지금의 이쿠노구(生野區) 지역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제주 출신 주민들도 여기에 둥지를 틀었다. 일자리는 주로 방직공장과 고무공장이었다. 당시 오사카 지역 일대에는 고무공업도 번창하고 있었다. 더욱이 도심을 흘러가는 도톤보리( 道頓堀) 강의 물줄기를 연결하는 운하 개설공사가 이어지고 있었으므로 막노동 일거리는 널려 있었다. 게으르지만 않다면 그럭저럭 입에 풀칠은 가능했다. 부녀자들은 방직·제사공장에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노임이 일본인들의 절반 밖에는 안되었지만 그것을 불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야홍 이야홍, 그렇구 말구요-. 삶이 고단할 때마다 저절로 흘러나오는 노랫가락으로 시름을 달래기도 했다. 생활에 지칠수록 밤이면 돌담으로 이어진 한라산 자락의 고향 풍경이 꿈속에 떠올랐다. 떠나왔다고 해서 쉽게 잊을 수 없는 것이 고향의 맛이며, 냄새였다.

그렇게 식민치하 시절을 겪으면서 재일동포들의 생활은 서러움 뿐이었다. 조센진(朝鮮人)이라고 깔보며 상전 행세를 하려는 일본인들의 냉대는 참기 어려울 정도였다. 제주 교민들 사이에 ‘제우회(濟友會)’라는 친목회가 결성된 것도 그런 과정에서다. 김녕, 함덕, 애월 등 출신 마을 단위로 상조회가 만들어졌다. 다른 내륙 출신들로부터도 ‘섬것들’이라며 은근히 따돌림을 받고 있었으므로 믿고 의지할 것은 서로뿐이었을 것이다.

드디어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광복을 맞으면서 교포들의 어려움도 끝나는가 싶었으나 그게 아니었다. 1948년의 4.3사태에 이어 1950년에는 민족의 비극인 6.25전란도 일어났다. 가산을 정리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려던 이들의 발걸음이 주춤해질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4.3사태의 여파로 인해 당국의 추적을 받던 요주의 인사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으로 밀항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교포들의 고향 생각이 멈추지는 않았다.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먹을 것, 입을 것 아끼며 한두푼씩 모은 돈을 고향에 부치는 운동이 자발적으로 시작되었다. 학교를 짓고 마을 도로를 놓는데 보태달라며 보낸 것이었다. 그 돈으로 마을에 확성기를 설치하고 전깃줄을 끌어들였으며 수도를 놓기도 했다. 미술관을 기증한 사람도 있고 관광호텔과 골프장에 투자한 경우도 없지 않다. 지금도 곳곳에 세워져 있는 공덕비가 그들의 애향심을 증언하고 있다.

특히 감귤 묘목 기증사업은 제주도를 지금처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교포들을 중심으로 재산을 반입하거나 기증하는 형식으로 감귤묘목이 대량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1960년대에 들면서 감귤 재배가 제주도 전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덕분이었다. 1965~70년 기간에 재일동포들로부터 기증받은 묘목만 해도 무려 280만주 가까이 이른다.

요즘도 재일동포들의 고향 사랑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림읍 출신의 교포 기업가인 김창인 회장이 제주대학교에 20억원의 발전기금을 내놓았다는 지난주의 뉴스가 하나의 사례다. 그가 그동안 지원한 140억원의 기금에 추가로 내놓은 것이라고 한다. 더욱이 그의 건립기금 지원으로 추진된 ‘재일(在日) 제주인센터’가 새로 문을 열었다니 감회가 깊을 것이다.

제주특별자치도가 해마다 제주 발전에 공헌한 학술, 예술, 교육 등 각 분야의 주인공들에게 문화상을 수여하면서 재일동포를 포함시키고 있는 것도 그들의 애향심을 기리자는 뜻이다. 지난해에는 간사이 제주도민회 부회장을 지내며 교포들의 법적 지위향상을 위해 노력한 박신평 씨가 영예의 수상자가 됐으며, 그 한해 전에는 교포 기업인인 박국남·부승배 씨가 상을 받았다.

더욱 뜻깊은 것은 식민지 시절 일본에 건너갔던 1세대 제주인 19명이 이번 추석을 앞두고 고향 땅을 다시 밟게 됐던 일이다. 그동안 경제적 어려움과 조총련, 이중호적 등의 문제로 고향을 방문하지 못했던 분들을 제주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초청함으로써 이루어진 행사다. 임시 여권을 발급받느라 오사카 총영사관의 도움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 허영섭 칼럼리스트
초청 대상자들의 대부분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한 분들이어서 더욱 가슴을 울리게 했다.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 현해탄을 건너가 무려 70여년 만에 고향 땅을 밟은 할머니도 있었고, 젊은 시절 모은 돈으로 고향 초등학교 건립부지를 기증한 할아버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부모님 묘소에 성묘를 하고 친지방문과 도내 관광지를 둘러보고 다시 돌아갔지만 방문기간중 이들이 흘린 뜨거운 눈물은 도민들의 가슴속에 길이 기억될 것이다.

과거 교포들이 어려운 처지에서도 고향에 베풀었듯이, 이제 도민들도 그들에게 베풀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최소한 그들의 애틋한 애향심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그것이야말로 내 고장 제주 사랑의 첫걸음임은 물론이다.  /허영섭 칼럼리스트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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