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연재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첫 기고문이 실린 뉴요커지.
나치 친위대 장교 시절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년 10월 14일~1975년 12월 4일)는 독일 출신의 정치이론가이다. 종종 철학자로 평가되지만, 아렌트 자신은 정치이론가로 불리기를 원했다. 철학이 인류를 대상으로 하기보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1963년), 김선욱 옮김, 한길사 간, 2006.
예루살렘 법정에서의 아이히만. 그는 방탄유리 박스 안에서 재판에 응해야 했다.
왼쪽 사진은 중국 난징의 만인갱의 얽혀 있는 뼈무덤이다. 오른쪽은 2007년 제주시 정뜨르비행장 발굴 당시 유골의 모습이다. 이 죽음의 모습들뿐만 아니라, 이 주검을 만들어낸 폭력의 모습도 흡사했다. 이 작은 섬 제주를 휩쓸었던 4·3 역시 대한민국의 아이히만들이 만들어낸 모습들이다.
어쩌면 이 사진들이 말하는 진실은? 신부의 멱살을 움켜잡은 현장용역의 폭력과 주민들에게 악다구니하는 해군장교의 폭언과 공무원들의 강압적 철거행위의 현장에서, 적어도 진정한 애국과 위민이 함께한다고 말하기 어렵다.(사진: 뉴시스, 제주의소리, 연합뉴스)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제주의소리

<박경훈의 제주담론> 下-(2) 난징으로 떠난 '기억여행'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악의 평범성

반성 없는 일본과 죄책감 없는 난징전 참전군인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한 정치이론가를 비켜갈 수가 없다. 그녀의 이름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그녀는 그 자신이 유대인이기도 해서 2차대전 당시 나치독일의 마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뒤 20세기 이 광란의 살육의 시대를 정치이론적으로 탐구하고, 파시즘의 시대를 이론화하는 데 평생을 바쳐, 현대지성사에 빛나는 존재감을 남기고 갔다. 그런 그녀의 지적 궤적 중 1961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보고 난 뒤 ‘뉴요커’지에 기고한 보고서는 아주 독특한 것이기도 하며, 또한 “악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것일 때 더욱 파멸적”이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긴다.

난징대학살이나 유럽에서의 홀로코스트는 이전 시대와는 확연히 다른 차원의 인간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만든 희대의 사건들이다. 대학살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원초적이고 심오한 질문을 던진다. 그 대량학살이 이루어진 것은 몇몇 수괴들만의 잘못일까?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 움직였던 중간급, 말단급 병사들은 죄가 없어지는 것인가? 등등의 질문과 함께 말이다. 전쟁의 책임은 최초의 명령권자이자 최후의 종결자가 지는 것으로 최종적으로는 일왕에게 있다지만, 바다 건너 열도에만 있는 천황이 직접적으로 학살을 수행한 것은 아니기에 결국 또 다른 ‘인간’이 저지른 사건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돌프 오토 아이히만(Adolf Otto Eichmann)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행해진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실무담당자이자 독일군 나치 친위대의 중령(최종계급)으로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 즉 유대인 ‘학살’의 실무 책임자였다. 전후 아르헨티나로 도피해 신분을 숨기며 생활하다 1960년 5월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의 긴밀한 체포호송으로 이스라엘로 붙들려 와 1961년 예루살렘의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런 그가 오래도록 인간성과 20세기에 벌어진 대량학살과 관련하여 끈질기게 오르내리는 이유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라는 정치철학가가 그의 재판과정을 방청하고 직접 기고한 연재문에서 매우 문제적으로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미국의 유명한 시사주간잡지인 이 ‘뉴요커(The New Yorker) 지’에 1963년 2월부터 3월까지 총 5회에 걸쳐 연재된 그녀의 보고문은 나중에 《예술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자로 출판되는데, 이 글에서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이라는 유명한 명제를 창안한다. 바로 이 악의 평범성의 실체요, 모델이었던 것이 ‘아이히만’이다. 미국의 도덕철학자인 수잔 니먼(Susan Neiman)이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악의 문제에 대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기여”로 평가했을 정도로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논쟁적인 테제가 되어 버린다.

 

▲ 당시 연재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첫 기고문이 실린 뉴요커지.

필자가 난징대학살과 관련하여, 일본의 90세를 넘긴 난징전 참전군인들의 죄책감 없는 모습들에서 느낀 섬뜩함과 놀라움의 근원 또는 이유가 무엇인가 궁금했을 때 이를 명쾌하게 정리한 사람이 바로 한나 아렌트였다. 아렌트의 통찰력이 정리한 ‘악의 평범성’은 결국 ‘우리 안의 아이히만’이라는 인간의 본질과 연동되어 있다.

▲ 나치 친위대 장교 시절의 아이히만.

아돌프 아이히만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당시 도피해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 학살과 관련한 증언이 하나둘 터져 나오면서 아이히만의 이름이 도처에서 거론되기 시작했고, 그는 유대인 학살의 악마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그가 1961년 아르헨티나에서 붙잡혔다는 소식은 세계인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고, 서방의 언론들은 그의 재판을 총력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때 한나 아렌트는 2차대전 당시 망명한 이후 내내 뉴욕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히만의 체포와 재판 소식을 듣고 예정되었던 대학 강의와 논문집필 등을 조정한 후 뉴요커지의 재정적 지원으로 뉴요커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기꺼이 예루살렘까지 날아가서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끝까지 지켜본다.

이 재판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한나 아렌트도 세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를 정신병자 또는 악의 화신, 괴물로 상상했던 듯하다. 그랬기에 재판정에서의 아이히만을 보고 그녀는 충격을 받고 만다. 왜냐하면, 아이히만은 괴물도, 정신병자도 전혀 아닌 그저 평범한 독일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히만은 지극히 평범한, 지극히 가정적인 독일인 가장이었으며, 유대인을 증오하는 반유대주의자도 아니었다. 통상적으로 400~600만의 유대인이 희생되었다는 <홀로코스트 프로젝트>의 설계자, 유대인 문제 최종해결책(the final solution)의 책임자이면서, 유대인 문제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이며, 효율적인 기획자였고, 지휘자였던 ‘악의 화신’이 평범한 독일인이었다는 충격 말이다.

더욱이 그는 효율성을 중시하고,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전형적인 중간계급의 행정관료였으며, 자기 일을 철저하게 자기 책임하에 완수하려는 열망을 가진 조직적인 인간임을 확인한다.(이는 사실 복지부동의 공무원이 너무 많은 우리나라의 경우 너무나 필요한 인재가 아닌가?)

▲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년 10월 14일~1975년 12월 4일)는 독일 출신의 정치이론가이다. 종종 철학자로 평가되지만, 아렌트 자신은 정치이론가로 불리기를 원했다. 철학이 인류를 대상으로 하기보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아렌트는 이 기이한 상황(악마가 아닌 악마의 업무를 수행한 평범한 인간을 마주한) 속에서 무엇이 그를 600만이나 희생시키는 <홀로코스트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했는지 철학적으로 탐색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재판과정의 모든 것을 면밀히 분석하고 이를 뉴요커지에 5회에 걸쳐 게재했다. 재판을 지켜보던 아렌트는 그가 사용하는 재판과정상의 표현(그가 쓰는 상투어들-공문서상의 언어들, 즉 행정용어들, 관용어들)들에 주목하게 된다. 왜냐하면, 아이히만은 시종일관 상투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 그룹이 사용했던 <언어규칙>에 따라 만들어진 언어들, 최종해결책(학살), 재정착(이송), 동부지역 노동, 예비적 조치들 등 암호화된 용어들에서부터 어떤 상황과 개념을 설명할 때도 그는 소위 관청용어(행정용어, 공문서용 용어)를 가급적 사용하려 했던 것이다. 이 언어들은 사실 아이히만의 현실인식을 가로막는 중대한 장벽이기도 했다. 그는 장벽 내부에서만 사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히만은 재판정에서 “관청용어(Amtssprache)만이 나의 언어입니다.”라고 판사를 향해 고백한다. 즉, 그는 어떠한 증언이나, 자기변호 시에도 가급적 상투적인 관청용어로서 설명하고 변명했던 것이다. 아렌트는 “관청용어가 그의 언어가 된 것은 상투어가 아니고서는 단 한 구절도 말할 능력이 정말 없었기 때문에,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게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또한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the words)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즉, 그는 ‘타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할 줄 모르기 때문’에, 타인과의 소통이나 공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에 대한 학살 역시 죄책감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직 그의 죄책감은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할 때만 작동하는 것이었다. 

“나는 괴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나는 오류의 희생자다.”라는 아이히만을 피고석에 앉힌 재판부는 아이히만에 대한 심문을 진행해 나갈수록 곤경에 처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아이히만이 저지른 흉악한 악행이 범죄의 의도를 미리 갖고 있거나, 학살과 관련해 특별한 의도가 없었다는 점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도착적이거나 가학적이지 않았다.

따라서 아이히만은 “잘못을 행하려는 의도가 범죄를 구성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모든 현대 법체계에서 통용되는 가정을 무력화시켜 버린 것이다. 결국, 검사 측은 아이히만의 범죄구성요건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1963년), 김선욱 옮김, 한길사 간, 2006.

아이히만이 그랬듯 ‘나는 톱니바퀴의 하나의 이에 불과했다.’는 주장이나 어떤 임무를 지시받았을 때, 설령 그것이 수백만 명을 가스실로 보내는 명령이라 하더라도 정의의 여부에 상관없이 수행된다는 것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그것이 범죄인 한 그 기계의 모든 톱니바퀴의 이들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상관없이 법정에서는 즉시 범죄의 수행자, 즉 인간으로 변형된다.”라고 판단한다.

즉, 집단적인 시스템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할지라도 그 행위가 범죄적인 것이라면, 결국은 개체로서의 한 인간의 정의의 문제로 귀착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책임은 인간으로서의 개인에게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결국 개인의 무사유도 죄라는 것이다.

몇 장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대부분 해군기지와 관련된 이미지들인데, 2000년 제주도청 현관에서의 공무원들, 강정해군기지의 해군들과 전투경찰들, 사복을 입은 정보과 형사들의 모습이다. 상부의 명령이라서 어쩔 수 없이 집행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그들 중에는 차마 듣기 힘든 욕설과 발길질 등 소위 ‘오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경우, 단순히 공무를 집행하기 위한 ‘어쩔 수 없음’을 넘어서 어떤 광기마저 느껴질 때가 있다. 이들은 아이히만보다는 더 나아가 난징의 병사들일 확률이 높다. 그런 상황이 만들어지면 말이다.

 

▲ 예루살렘 법정에서의 아이히만. 그는 방탄유리 박스 안에서 재판에 응해야 했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폭력의 역사는 4·3과 광주라는 최현대사에서만 두 번이나 반복한 국가폭력을 다시 재탕하고 있다. 강정이 그렇다. 강정에서 아이히만들은 다시 몰역사의 국가폭력과 제노사이드를 감행하고 있다. 이번에는 국방과 국책사업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하지만, 역사는 국민에 대한 폭력이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지지 않은 경우가 없음을 보여준다. 히틀러가 그랬고, 스탈린이 그랬으며, 4·3 때는 태극기가 꽃힌 M1소총으로 양민을 학살했고, 5·18광주항쟁 때는 애국가를 틀어놓고 <화려한 휴가(광주학살의 작전명>를 즐겼다.

단죄되지 않는 역사는 결국, 수많은 아이히만에 면죄부를 준다. 난징의 일본군 참전군인들이 그러하며, 광주학살의 진압부대 출신 장병들이 그러하며, 4·3 당시 토벌대로 참여한 한국의 노인들이 그러하다.

 

▲ 왼쪽 사진은 중국 난징의 만인갱의 얽혀 있는 뼈무덤이다. 오른쪽은 2007년 제주시 정뜨르비행장 발굴 당시 유골의 모습이다. 이 죽음의 모습들뿐만 아니라, 이 주검을 만들어낸 폭력의 모습도 흡사했다. 이 작은 섬 제주를 휩쓸었던 4·3 역시 대한민국의 아이히만들이 만들어낸 모습들이다.

난징에서 ‘차등인종’인 중국인들이 문제였고, 한반도에서는 ‘빨갱이’들이 문제였다. 4·3 당시 제주도민은 박멸해야 할 빨갱이였다. 그 30년 후 광주에서도 여전히 빨갱이는 박멸 대상이었다. 시민에서 폭도로 보이는 순간 그들은 죽여도 되는 존재들이 되었던 것이다.

난징과 광주의 공통점은 최고 명령자가 처벌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 최고 명령자를 정점으로 하는 시스템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천황제의 존속과 야스쿠니의 존재는 참전군인들이 반인륜적 행위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게 하기보다는, ‘명령 때문이었어!’, ‘전쟁 중이었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우리가 힘이 있나?’라는 변명이 가능케 하는 힘이다.

한국의 광주 역시 당시 최고 책임자였던 전두환과 노태우가 후에, 구속 기소돼 1심에서 내란죄 및 반란죄 수괴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고,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고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1997년에 사면됐다. 법적인 단죄를 당했다고 하나(이는 어쩌면, 히로히토의 인간선언 같은 느낌이 든다.), 결국 그들은 버젓이 살아 있다. 5·18 당시 광주시민을 학살한 공수부대 출신병사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그들도 여전히 ‘상부의 명령이었어! 나는 죄가 없어!’라고 할 것이다. 퇴역병사들은 그러면 훨씬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다 위에서 시키는 일이니까?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어! 나라를 위한 일이었어! 나중에 역사가 평가할 것이야! 명령 때문이라는 갑옷을 두른 것이다.

▲ 어쩌면 이 사진들이 말하는 진실은? 신부의 멱살을 움켜잡은 현장용역의 폭력과 주민들에게 악다구니하는 해군장교의 폭언과 공무원들의 강압적 철거행위의 현장에서, 적어도 진정한 애국과 위민이 함께한다고 말하기 어렵다.(사진: 뉴시스, 제주의소리, 연합뉴스)

난징과 제주를 관통하는 키워드 ‘해충-구별 짓기’와 ‘박멸(撲滅)’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은 《증오의 세기(이현주 옮김, 민음사 간, 2010)》에서 <난징의 강간>의 배경으로 세 가지 충동을 들었다. 그 첫째는 ‘항복한 자들에 대한 경멸’로, 이 경멸이 극도로 야만적인 신체 학대문화와 손을 잡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일본군만의 특징은 아닌, ‘다른 인간을 열등하고 유해한 종, 즉 단순한 해충으로 간주하는 심리’가 20세기의 전쟁이 그토록 폭력적이었던 결정적인 이유였으며, 세 번째는 ‘강간 충동’으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요인이다. 이 강간 충동은 원시적 욕구, 도살의 방법(선간후살), 동료집단의 압력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세 가지 충동이 유래 없는 난징대도살의 참사를 불러온 것이라고 쓰고 있다.

1948년 4·3 봉기 이후의 제주도. 인구 27만이 거주하는 아시아의 작은 섬. 그 섬에서도 이 세 가지는 관통했다. 다른 시간대, 다른 장소에서 같은 폭력과 살상이 난무했다. 특히 난징과 제주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다른 인간을 해충으로, 즉 박멸해야 할 존재로 간주하는 심리였다. 박멸해야 할 해충의 이름은 ‘빨갱이’었다.

김득중(국사편찬위원회·한국현대사)은 ‘빨갱이’의 기원을 여순사건으로 파악하면서 한국사회에 있어서의 빨갱이의 기원을 탐구한 글에서, “‘빨갱이’란 용어는 도덕적으로 파탄난 비인간적 존재, 짐승만도 못한 존재, 국민과 민족을 배신한 존재를 천하게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는 어떤 비난을 하더라도 감수해야만 하는 존재, 죽음을 당하더라도 마땅한 존재,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존재, 죽음을 당하지만 항변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정치적 경쟁자인 ‘공산주의자’로부터 죽여도 좋은 존재인 ‘빨갱이’로의 전환, 빨갱이를 핏빛 어린 폭력적 존재로 형상화한 계기는 다름 아닌 여순 사건이었다.”고 주장한다. 빨갱이의 기원이 여순사건이었다는 점은 수긍하기 힘들지만(왜냐하면, <여순사건>은 제주4·3폭동 진압을 위한 군대의 파견에 좌익계열의 군인들이 주도해 발발한 사건으로, 빨갱이 사냥의 시간대는 제주가 앞서지 않았냐는 판단 때문이다.) ‘빨갱이’에 대한 서술은 타당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제주도 섬 주민들은 당시, 좌익계열에 찬동하거나, 안 하거나를 떠나서 ‘해총-빨갱이’로 전화된 상태였다. 미군정은 제주도민의 70%가 빨갱이라 파악하고, 대대적인 ‘빨갱이 박멸’을 위한 초토화작전을 감행하면서, 전 주민의 10%나 되는 3만의 생명을 절멸시킨 것이다. 비전쟁시기인데도 불구하고, 미군정은 일본이 난징에서 벌인(그나마 전쟁 시기에) 그 방식대로 제주도에서 해충 박멸에 나선 것이다. 특히, 해안선에서 5km 이상 내륙지역의 모든 인간을 ‘해충’으로 보는 전대미문의 작전을 구사한다. 당시 제주지역 미군총사령관이었던 미 제20연대장 브라운(Rothwell H. Brown)대령은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라고 선언했다. ‘해충’은 박멸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에 다른 흥미를 느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결국, 동등한 인간을 다른 종으로 보게 만드는 것, 그런 시스템의 존재와 작동, 또한 거기에 덧붙여, 자신이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 사유하지 않는 것(기실 브라운 대령과 아이히만은 같은 사람인 셈이다.)이 30만이든, 3만이든 그게 중국대륙이든, 제주섬에서든 집단학살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슬픈 것은 4·3이 법적·제도적으로 해결의 경로를 밟고 있는 상황에서도 ‘구별 짓기’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아방은 빨갱이가 아니어수다.’와 ‘아무 분시도 몰랑 당해수다.’라는, 무고하게 죽은 자들만 4·3희생자로 인정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에서 또 다른 ‘구별 짓기’가 발생한 것이다. 즉, 이전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곱 가르기였다면, 이제는 피해자끼리의 ‘곱 가르기’인 ‘무고한 피해자’와 ‘빨갱이 피해자’의 관계가 발생한 것이다. 그런 구분이 실제 완벽하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벌써 60년을 넘긴 4·3의 역사적 청산을 위한 작업 속에서도 실정법은 당시 사람들을 ‘한 시대를 살다 간 역사적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여전히 ‘진짜 빨갱이’로 낙인찍힌 당시 사람들은 평화공원 위패봉안소에 안치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유족들은 자신의 부모나 형제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고, 그 빨갱이들과 같이 취급받는 것을 싫어한다. 결국, 박멸해야 할 존재, ‘해충-빨갱이’ 인식에서 나아가지 못한 채 4·3의 극복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만 것이다. 문제는 ‘빨갱이’가 아니어서 안도하는 것은 좋지만, 이는 여전히 ‘죽어도 좋을 다른 빨갱이’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결국 누구나 빨갱이로 판명(?) 또는 낙인 찍히면 죽여도 된다는 사회에 ‘빨갱이’의 누명을 벗은 존재로 편입된 데 대한 안도로 끝나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4·3의 극복은 이루지지 못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4·3기념관은 ‘해충-빨갱이’의 실체에 관한 스토리텔링 기념관이다.
필자가 기념관 전시기획팀으로 활동하면서 바랐던 것 하나는, 후세들에게 4·3에 대한 기억의 전수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당시 4·3을 겪었던 생존자들과 그 유족들이 기념관 전시를 보고 나서 내 부모가 어떤 상황에서, 내 아버지가 어떤 상황에서 산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지, 봉기에 나설 수밖에 없었는지, 무고하게 학살당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필자의 외조부도 4·3 당시 난리를 급히 피한다고 산에 올랐다가 빨갱이로 몰려 죽을 뻔했는데, 동네 구장의 보증으로 살아났다고 하고, 어머님의 경우는 서귀포까지 잡혀갔다가 살아 돌아왔다고 한다. “무사마씸?”이라는 자식의 질문에 돌아온 말은 “몰르쥬, 그땐 시상이 하도 험해시난.”이었다. 그때 왜 그랬는지를 알지 못하고 그 피비린 역사를 감내해야 했던 당시 희생자들과 유족들에게, 4·3기념관이 ‘몰르쥬’로 시작되는 답변이 아닌, ‘영허난 경 되었구나!’로 바뀌게 해주길 기대했다. 난징기념관의 모토인 ‘전사불망 후사지사’는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하는 역사에 대한 ‘앎’, 즉 지식이 동반될 때 이후에 그에 대처할 수 있는 교훈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당시의 제주도주민들은 극심한 공포와 살육의 위기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다시는 기억하기 싫은 미증유의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모두는 자기 동네에 들이닥친 그야말로 “아무 분시(영문)도 모른 채” 당한 일들이었다. 그리고 그 후로도 60여 년 가까이 금기의 영역으로 남았던 삭제된 역사, 박멸된 역사 속에서 주민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세계사적 이해의 결여, 살기 위해 잊어야만 했던 자기삭제, 망각의 기제가 동시에 작용하는 세월을 살아왔다.

기념관의 전시는 바로 이러한 기억의 재구성이자, 제주도민들에게 찍혔던 낙인인 ‘빨갱이의 기원’을 밝히는 전시이기도 하다. 1948년 4·3봉기 이후 초토화 작전과 그 이후 연좌제까지 이어졌던 역사의 순환은 모두 ‘빨갱이인 제주도민’을 대상으로 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고하게 몰린 제주도민들을 빼고 난 그 자리에 남은 빨갱이들의 실체는 무엇인가? 해방된 조국 건설의 열정에 불타 고향에 돌아왔으나, 단죄 당하지 않는 친일경찰과 관료들이 지배하는 상황, 식민지 시대로 후퇴하는 미군정의 실정에 분노했던 이타적인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해충-빨갱이’로 오늘도 남아 있다. 4·3이 해결되어가고 있긴 한가?


돌아오는 길

황포강과 장강이 만나는 삼각주의 넓디넓은 상해공항을 출발해 제주로 향하는 귀행길, 5시간 가까이 공항에서 보낸 후 오른 동방항공기 안에서 최근 중국인들의 제주관광 호황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 일행만 한국인이었고, 기내를 채운 것은 모두 중국인 관광객들이었다. 같은 비행기에 앉아 같은 목적지를 향하는 동행인들. 문득 아시아의 동행은 언제나 이루어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중일이 함께 공생하는 아시아의 동행은 말이다.

인간은 한 시대를 살다 가는 존재일 뿐이다. 그 시대를 살육으로 얼룩지게 살다 갈 것인가, 평화롭게 살다 갈 것인가는 결국 그 시대를 사는 이들의 일이다. 강정이 어렵게 버티고 있다. 작은 섬 제주, 바다의 한가운데 붙들려, 언제나 바람 타는 섬. 그 섬에 돌아가는 이 길이, 닷새 만의 귀향이 편안하지만은 않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강정주민들의 반대투쟁이 무너져선 안 되며, 강정의 평화에 대한 지난한 외침이 살아나야만 우리 사회에 미래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크게 도울 일을 못 하는 나 자신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해군기지를 찬성하든 안하든 진실은 눈에 보이는 것이다. 수많은 20세기의 집단학살이나 대량학살이 발생하게 된 배경에는 눈앞에 있는 인간을 인간 그 자체로, 눈에 보이는 가장 쉬운 진실을 보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인이라는 이유로, 전쟁이라는 상황논리로, 인간으로 보지 말고 죽이라는 상부의 명령 때문에, 그 진실을 보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제주의소리

지금 강정의 문제는 해군기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하지 않는 소위 국책논리와 일부 토건식 개발논리에 매몰된 시대착오적인 경제논리, 사려 깊지 못한 국가주의에 포획된 애국주의에 가려 강정주민의 고통이 그 무엇에도 선행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보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의 엔지니어였던 아이히만이 그랬듯, 난징의 도살자들이었던 반성 없는 일본군 참전노인들처럼, 아비규환의 섬땅을 휘저었던 토벌대들처럼, 광주의 금남로를 개머리판으로 으깨던 광기의 탕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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