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멍 보멍 들으멍](15) 노부부의 ‘죽당 살아난’ 기억의 기록/ 정신지

 

▲ 올해 여든 넷의 할망 하르방은 두 분 모두 뱀띠다. 뱀은 뱀인데 ‘폭낭(팽나무) 밑 소굴에 사는 뱀’의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할망은 말한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1929년 태생의 할망 하르방은 두 분 모두 뱀띠다. 뱀은 뱀인데 ‘폭낭(팽나무) 밑 소굴에 사는 뱀’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할망은 말한다. 언젠가 무당이 당신 부부를 보고 던진 말이라 하신다. 그만큼 죽을 고비를 많이 넘기고 살아왔다는 두 분의 이야기. 두 번에 걸쳐 그들의 이야기를 연재했지만, 그들의 집을 찾으면 찾을수록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들의 파란만장한 스토리는 살을 찌우며 두꺼워져 간다.

하르방의 이야기에는 끝이 없다. 가끔 했던 말을 또 하기도 하지만, 들을 때 마다 새롭고 흥미롭다. 그는 10여 년 전에 허리를 크게 다쳐 더는 다리를 쓸 수도 없고, 오른팔이 마비되어 거동이 불편하다. 하루에 한 번 전동오토바이를 타고 마을을 산책하거나, 봤던 책을 또다시 펼치며 독서를 하는 일, 텔레비전을 보고 밥을 먹는 일이 그의 일과이다. 남들처럼 게이트볼을 하지도 못하고, 이제는 할 밭일도 없다.

그런 그이지만, 건강하던 젊은 시절 이야기가 나오면 빠지지 않는 것이 군대 이야기이다. 저번에도 2시간이 넘게 말씀하셨건만, 그는 또다시 한국전쟁 당시의 군대 이야기로 목청을 높이신다.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라시며, 그의 주특기 ‘죽당(죽다가) 살아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대전, 유성, 원주, 평창. 대관령 꼬불꼬불 길은 거의 다 돌아서(돌았어). 전쟁 내내 5년간 거기 이서시난 게(있었으니까). 나는 제주서 중학교꺼정(까지) 나와부난(나왔으니) 암호 병이 되언(되었어). 머리빡 호끔(머리 조금) 좋댄(좋다고) 암호를 풀어서 명령을 전하는 일을 했주(했지). 육지소름(육지사람)이 전부고 나만 제주도 촌놈인디(촌놈인데), 부대에 배운 놈이 하나도 어성게(없었어). 이녁(자기) 이름 하나도 못써. 게난 나가(그러니까 내가) 군인들 모아당(모아다가) 한글을 가르쳐신디, 배우젠도(배우려고도) 안 허여(안 했어).

 

▲ 몇달 전 열린 할망 집 배나무의 모습. 추석이 오면 하나 따 준다고 했건만, 지금은 몹쓸 태풍이 지나가면서 남김 없이 다 떨어져 버렸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경허당(그러다가) 어느 날 일을 햄신디(하는데), 적들이 그디로 다 쳐들어 왕(와서), 고치(같이) 있던 18명이 다 포위되신디(되었는데), 나만 포위 안되언. 나도 모르크라(모르겠어), 무사 경해신지는(왜 그랬는지는). 키가 족앙(작아서) 잘 안보여신가? 하하…. 경행(그래서) 그디(거기) 사람 다 죽고 나만 살아난…. 거뿐만 아니라. 또 이서.” 하르방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한번은 아리랑 고개를 넘는디, 버스 앞좌석에 나가 탄(탔어). 겐디(그런데), 촘젠해도(참으려해도) 촘젠해도 막 똥이 마려웡게(마려웠어). 기사신디(기사에게) 부탁행 세워달랜 행(세워달라고 해서) 똥 쌍 왔주(대변보고 왔지). 겐디 똥 쌍 왕(와서) 보니까 누가 내 자리에 앉아분 거 아니라? 경행 할 수 없이 뒤에 탔주게(탔지). 경해신디(그랬는데), 버스가 달리다 사고가 낭이네(나서) 뒤집어젼(뒤집어졌어). 앞에 탄 사람들 다 죽어부러신디(죽어버렸는데), 난 뒤에 박아졍 타부난(타니까) 죽지 않고 살아난 거라. 게난(그러니까) 똥 마려웡(대변 마려워서) 살아났주(살아났지)!”

하르방이 큰소리로 웃었다. 그러다가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나 싶더니, 화제를 바꾸어 다른 이야기를 하신다.

“일등병(하르방이 일등짜리 군인을 이렇게 부른것 같음)이 되면 서울에 보내줬어. 가민(가면) 육등 보급이라고 행(해서), 여자영(여자랑) 연애하고 오주게(오지).” 이해가 가지 않는 그의 첫 마디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르방이 말하는 ‘연애’라 함은 한국전쟁 당시에 ‘보급’이라는 명목으로 실시한 성(性)적 위안행위를 칭하는 것이었다. 여태껏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이야기에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르방이 다시 말했다.

“보병대에는, 여자가 보급되면 한 서른두 명 정도 돼신디(되었는데), 보급 받으레(받으러) 오는 군인은 몇 백 명이라. 나도 들은 이야기지만, 군인이 여덟 사람 넘어가난 여자가 죽어부렀댄 허는(죽어버렸다고 하는) 이야기도 이서(있어). 그 젊은 군인덜게(군인들 말이야). 장게도(장가도) 못 가보고 전쟁통에 왕이네(와서). 어휴, 나가 별 이야기를 다 햄쪄(하고 있네)….”

 

▲ 하얀 고무신을 신고 그녀는 매일 며차례씩 밖으로 나간다. 다리가 아파 오래 걷지 못하지만, 동네를 돌며 사람을 만나거나 나무 그늘 밑에서 쉬거나 하며 시간을 보낸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그가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겐디(그런데) 나는 그 보급을 받은 건 아니라. 어느 날 상사가 나신디(나에게) 왕이네(와서), ‘어이, 이 중사. 우리도 아가씨 하나 데리고 다니자.’ 허멍이네(하면서) 키가 잘도 크고 이쁜 순천아이를 데려와서(데려왔지). 가이도(그 아이도) 말 들어보난(알을 들어보니) 전쟁으로 남편도 다 죽어불곡(죽어버리고), 갈 디도(갈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어시난(없으니까) 상사가 몰래 심엉 다니멍(데리고 다니면서) 밥도 주고 행(해서) 쭉 그 사람 따라 댕겨서. 그 여자도 굶어 죽느니 그 길을 택헌거주(택한거지).”

그리고 하르방은 말문을 닫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야기를 웃으며 주고받다가 그가 꺼낸 육등 보급이야기로 분위기가 ‘정말’ 침울해졌다. 설상가상으로 그 분위기에 할망이 입을 열었다. 이번엔 그녀의 죽당(죽다가) 살아난 이야기다.

“나도 4.3사건 때 해안으로 소개(疏開, 공습이나 화재 따위에 대비해 한곳에 집중되어 있는 주민이나 시설물을 분산함.)되엉(되어) 갈 때 마을을 다 불태워부난(불태워 버리난) 무거운 궤짝을 등에 지엉이네(지고) 내려감신디(내려가는데), 순경 둘이 왕이네(와서), ‘그거 뭐냐?’고 물으난, ‘할망 궤짝이우다.’ 했주. 겐디, 그 두 놈 중에 한 놈이, ‘어이, 쏴부러(쏘아버려).’ 허맨(했지). 경허난(그러니까) 한 놈이 총을 꺼내잰(꺼내려) 허는 거 아니? ‘아이고, 이제 난 죽었구나!’ 하는데, 옆에 있던 다른 순경이 여자난(여자니까) 한 번 봐주랜 허멍(봐주라고 하면서) 가부런게(가버렸지).
며칠 지낭(지나고) 목총을 멩(메고) 훈련을 간(갔어). 그땐 여자도 싸움질 시켰주게(시켰지). 경행 거기 가신디(갔는데), 나를 죽이젠(죽이려) 한 그 순경 놈이 거기 서있는 거 아니라? 그 사람을 봐지난(보니까) 박박 털어젼(달달 떨었지). 날 죽이젠 했던 놈이난게(놈이니까). 그때 나 나이 열아홉이라서(이었어).”

 

▲ 길을 걷다 발견한 집. 이제 집이라기 보다는 커다란 하나의 나무같다. 과거에 이 집에 어떤 이가 살았을까? 사람도 가고 이야기도 갔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노부부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렇게 소름이 돋았던 적은 없었다. 삶과 죽음이라는 낱말이 마치 백짓장 한 장처럼 가볍게 여겨지던 시절을 그들은 살았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이제, 아픔에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들이지만, 불편한 팔다리와는 상반되게 그들의 목소리에는 점점 더 힘이 실린다. 이제껏 하지 못했던 이야기, 과거에 보아온 것들에 대한 그들의 기억 속에는, 우리가 책에서 배우지 못했던 역사의 뒷무대가 선명히 존재하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무대 뒤를 비추는 조명은 더 밝아져야 하고, 더 많아져야 한다. ‘정치’, ‘경제’, ‘종교’ 등등, 온 세상이 이와 같은 대문자의 화두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지만, 그런 것들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둘 수도 없는 할망 하르방들의 현재를 소문자로 차곡차곡 써내려가는 작업. 누군가는 해왔고, 하고 있고, 해 나갈 것이다. 하지만 더욱 적극적으로 해 나가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을이 왔다. 차가운 바람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걷고, 듣고, 공부하자.

아픔은 하얀 종이 같은 것
언제 시작되었는지
아픔 없는 날이 있기나 했었는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것은 미래도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아픔뿐,
그 무한한 영역 속에 과거도 있다.
그리고 오로지 과거만이,
새롭게 계속되는 아픔을 느끼는 법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에밀리 디킨슨(1830-1886)

◆ 본문에 나오는 ‘특수 위안대’에 관한 한국 정부의 자료 중 유일한 것은 육군본부가 1956년에 편찬한 『후방전사(인사편)』. 그 외의 기록은 회고록과 증언으로 논문 등에 실려 있지만, 연구와 보도의 수가 심히 모자라다. / 정신지

# 이번 글은 지난 7월14일자와 8월11일자에 실린 '84세 동갑 노부부의 구사일생 이야기'의 세 번째 글입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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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지는 ?

   

이 여자, 택시 기사들과 대화 나누길 즐기는 ‘수다쟁이’다. ‘역마살’도 단단히 타고났다. 거기에다 ‘촌스러움’까지 좋아하는 독특하고 야무진 여자다. 그녀의 이름은 정신지(32). 파주·부산 출신의 부모님 아래 서울서 태어나 여섯 살에 제주로 이민(?) 왔지만 스무살에 다시 서울로 나갔다가 일본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지역연구학’이라는 인문학을 전공했다. 그동안 세계 17개국의 섬·지방·대도시를 떠돌며 사람과 집단, 그 사회에 대한 이해를 넓혀왔다. 지난 봄, 일본의 국립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에서 문학박사 과정도 수료했다. 이제 12년간의 지구촌 유목 생활을 마치고, 태어난 곳은 아니되, 자신을 성숙하게 키워준 ‘진짜 고향’ 제주로 지난 봄 돌아와 부모님이 살고 있는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에 짐을 풀었다.  매주 한차례 <제주의소리>를 통해 제주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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