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 칼럼]

“그날 순례는 천지연 걸매생태공원에서 시작됐다. 후텁지근하게 내려붓던 빗줄기가 그친 때문인지 후박, 담팔수, 비파 등 정원수들이 한결 정겨운 모습이다. 짙은 안개를 동반하고 5월 중순까지 이어지는 ‘고사리 장마’. 고사리가 쑥쑥 자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겠지만, 순례자들에게는 어차피 짓궂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이 빗줄기 속에 행군을 계속해야 했다.” (경향신문 2004년 5월 7일)

아직 신문사에 몸담고 있던 시절, 제주도의 흙길을 걷고나서 쓴 기사의 첫 대목이다. 생명평화 탁발 순례에 나섰던 도법, 수경 스님을 따라 서귀포 순례길에 동행했던 것이다. 벌써 8년 전의 일이니 올레길이 만들어지기 전이기도 했다. 고행의 선승들을 따라 터벅터벅 길을 걸으며 제주도의 역사와 풍토에 대해 기웃거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유채꽃이 벌써 시들어버린 늦봄 무렵이었다.

기사는 다시 이어진다.

“전날에는 정방폭포를 찾았다. 4.3사건 당시 토벌대에 의해 80여명의 주민들이 소낭머리에서 처형당한 쓰라린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장소다. 밀짚모자를 벗어들고 묵념을 올리는 도법·수경스님의 얼굴이 더욱 꺼칠하게 보인 것은 비단 소금기 어린 바닷바람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제주도에 도착해서 열흘여가 지나는 동안 곳곳을 순례했다. 마라도에 들러 생명평화 기원제를 올렸으며, 한국전의 상처가 남아 있는 모슬포 섯알오름에서는 천도재를 올렸다.

길 위에서도 도법스님의 설법은 간간이 이어졌다. 화두는 단연 환경보존을 통한 생명평화다. “이만큼 개발됐는데도 아직도 모자란다고 자꾸 삽질을 해대는데 과연 얼마나 파헤쳐져야 만족할 수 있겠는가”라는 꾸짖음의 목소리조차 차분하고 낭랑하다. 제주도가 아무리 ‘평화의 섬’, 또는 국제자유지대를 내세운다 해도 자본의 논리에 의해 진행돼서는 쓸모가 없다고 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지낼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아도 동서로 70리에 이르는 서귀포 바닷가가 해안도로를 비롯한 각종 콘크리트 시설물이 들어서는 바람에 자꾸 훼손되던 시절이었다. 골프장도 한라산 자락을 깎으며 계속 만들어지고 있었다. 지하수를 머금은 중산간의 곶자왈 일대가 망가지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오고 있었다. 그 몇해 전까지만 해도 땅바닥을 조금만 파면 물줄기가 솟구쳤으나 지하수 고갈로 인해 갈수록 깊이 파들어가야 한다는 우려도 제기되던 터였다. 자기성찰의 순례길이 제주도의 개발 문제에 이르러 생각이 멈추고 말았다고나 할까.

사실이 그러했다. 그보다 훨씬 앞서 초년병 기자 시절 제주도 길을 걸으며 보고 느꼈던 모습과는 벌써 전혀 다른 분위기로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청소년적십자(RCY) 단원 1000여명이 8.15 광복절을 맞아 태극기를 앞세우고 제주도 일주도로를 돌아 서귀포까지 내려가는 행군길을 같이 걸었던 것이 1983년의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30년 전, 도법·수경 스님과 걸었던 때보다도 20년 전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제주대학 학생회관 앞 운동장에서 야영을 하며 전야제를 치른 청소년 단원들이 동서 양쪽으로 나뉘어 서귀포까지 이르게 되는 169km의 행군 일정은 4박5일로 잡혀 있었다. 섭씨 30도에 육박하는 여름철 무더위에도 제주도의 이국적인 풍광은 호기심 많은 외지인에게는 뚜렷한 인상으로 새겨질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목적지이자 동서 양팀의 합류 지점은 서귀포 중앙여중 운동장. 당시 중문관광단지만 해도 입구의 표지판만 세워놓고는 거의 허허발판일 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길거리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버스 정류장마다 상점과 음식점이 몇 군데씩은 들어서 있었고, 따라서 당연히 동네의 중심가라 할 만했건만 대체로는 그냥 한적한 시골 동네 모습으로만 기억되는 것이다. 바로 그해 초, 결혼을 하면서 신혼여행길에 머물렀던 신제주의 산뜻한 시가지가 그야말로 예외적인 경우였음을 깨닫게 됐던 셈이다. 일주도로 동네길에서는 다방 간판도 별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행군 일정이 끝나고 청소년 단원들과 다른 기자들은 모두 서울로 귀환했는데도 우리 사진부의 김윤철 후배와 나만 제주도에 남겨지게 됐던 것은 또다른 추억이다. 마침 태풍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좀더 남아서 현지 상황을 지켜보라는 데스크의 지시가 내려진 것이었다. 취재비가 거의 떨어지던 상황이었기에 제주 시내의 어느 허름한 여관에 묵었는데, 요즘의 정돈된 거리 모습이 더욱 비교가 되는 것은 아마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오랜만에 제주도를 다녀오면서 앞서의 흙길을 걷던 때가 문득 떠올랐다. 중산간 도로와 일주도로에서 굳이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걸으면서 제주도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던 것도 그런 때문이다. 역시 이만큼이나 푸근하고도 넉넉한 자연을 숨쉴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 그렇게 마구 개발이 된다며 걱정을 했건만 오히려 빈땅이 너무 많다고 느껴질 만큼 거리의 옛 모습이 간직되어 있기도 하다. 올레길과 연결되는 큰길가에 기껏 식당이 몇 개씩 더 늘어난 정도라고나 할까.

걸망을 둘러메고 길을 걸으며 설법을 하던 도법 스님의 무표정한 모습도 다시금 스쳐간다. 4.3사건 당시 부친을 잃고 유복자로 태어난 스님은 열세살 때 모친을 따라 고향을 떠났다고 했다. 한림읍 명월리가 스님의 고향이다. 순례길에 나서는 그날 아침에도 숙소를 떠나오면서 주인 부부에게 “따뜻하고 넉넉함이 아름답고 고마웠습니다”라는 한줄의 글귀로 인사를 대신한 스님이다. 하지만 그뿐, “언젠가 다시 만나자”는 의례적인 인사말도 없었다. 단지 고개 숙여 합장하는 것이 헤어지는 의식의 전부였다.

▲ 허영섭 칼럼리스트.

8년 전의 그 순례길 기사는 이렇게 끝난다.

“제주에서 탁발 행사를 마친 뒤 다음 일정을 위해 다시 서귀포로 넘어왔다. 그리고는 해변가를 찾아 범섬, 문섬이 바로 앞에 바라보이는 부둣가에 일행 모두가 둥그렇게 퍼질러 앉았다. 묵념에 이어 생명평화서약문을 낭독하면서 그날의 행사를 되돌아보고 마무리하는 절차다. 바람결에 퍼지는 파도소리 사이로 죽비의 울림이 산뜻하다. 아직 서쪽 하늘에 해는 남았지만 산그늘이 서서히 깔리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기약없는 순례의 길에서 오늘 밤은 또 어디에서 고단한 육신을 뉘어야 할 것인가. 내일은 또 내일의 길을 걸을 것이다.” /허영섭 칼럼니스트

<제주의소리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