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섬의 숨, 쉼]추석소고

추석에 관한 추억이 필요해 가족들을 모았다.
“ 내가 추석에 관한 이야기 하나 써야해, 뭐 떠오르는 추억 있으면 하나씩 얘기해봐”
그런데 이럴수가? 특별한 추억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 가지씩 의무 발표를 하라는 나의 닦달에도 “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왜 없지?” 라며 그냥 각자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혼자 남은 나는 짧은 시간 고민하고 고민하다 드디어 추억이 없는 이유를 밝혀냈다. 유레카라고 외칠 만큼은 아니지만 그것은 온갖 사회적 의미가 함축된 중요한 내용이었다. 정답은 추석날 항상 내가 지쳐있었다는 것이었다.

추석 전날 손발에 배인 기름 냄새가 정겨워 질만큼 음식 준비하고 추석날 허리 꼿꼿이 세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설거지를 하는 것으로 공식 행사 마무리. 마지막 그릇을 뽀드득 닦고 손 털며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 비로소 나의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것이다. 마무리 하고 집에 돌아가면 당연히 다음 순서는 잠자기.
우리 집의 이벤트 메이커가  잠자고 있으니 어떻게 추억이라고 이름 붙일 이벤트가 있었겠는가?

잠에서 깬 후의 일정은 친정 방문, 저녁 먹기, 영화보기..... 아, 그러고 보니 변치 않는 우리 집의 공식 추석 일정이 떠올랐다.
바로 가족과 함께 (컴퓨터로) 영화보기, 영화 보고 보름달 보며 소원 빌기.

가족과 함께 볼 영화를 고르기,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내 장담 한다. 영화를 고르는 우리의 고민은 추석 상영 영화를 고르는 방송프로그램 편성자의 고민보다 더 하면 더했지 결코 못함이 없다는 것을.

 첫 번째 장벽은 관람불가의 장벽이다.  아이들과 함께 19금 영화는 볼 수 없으므로 우리가 정한 타협 선은 15세 미만 관람불가. 이 원칙을 정한지가 10여년이 넘었는데 올해야 큰 놈이 15세 이므로 우리 아이들은 할 수 없이 조숙한 아이가 되었나 (^ ^). 

두 번째는 개인의 취향인데... 이게 가장 큰 문제다. 발언권 없이 그냥 부모가 골라주는 영화를 보기만 했던 아이들이 의식이 성장하면서 강력하게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 나로선 아주 기분 나쁜 것이... 나를 제외한 세 명의 원칙이 엄마가 고른 영화는 보지 말자는 것이다.
내가 강도 높게 항의 해도 힘센 우리 딸의 한 마디에 상황 정리.
“ 엄마가 고른 건 재미 없네”
(재미 없긴.. 내가 고른 건 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명작들인데. 너희들이 아트의 세계를 몰라서 그런 거야, 라고  나 혼자만 마음속으로 항의했다.)

어찌어찌 이런 과정을 거쳐 영화를 보아왔는데 그 와중에 떠오르는 영화 두 편이 있다.

몇 년 전 보았던 터미네이터4. 이 영화는 시리즈를 처음부터 보았던 남편과 내가 부모의 권위로 밀어붙여  성사시킨 영화다. (부모의 권위로 두 시간 동안  아들 딸과 격론을 벌였다. 흑흑.. ) 그날따라 늦은 가을비 치고는 굵은 빗줄기가 유리창을 때리고 있었고 토론의 분위기가 지나치게 무르익어 일순간 집안의 분위기는 적요했다. 결국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무엇인가 협상카드를 제시했고 분위기 수습해 영화를 본 기억이 난다. 지금 영화 내용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그 영화가 선택되기까지의 험난했던 여로에 관한 기억만이 남아 있다.

코지마 마사유키의 애니메이션 ‘ 피아노의 숲’은 애들이 어릴 때 같이 본 영화인데 잔잔한 감동으로 지금도 기억에 남는 영화다. 물론 이 영화도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우리 집의 ‘마우스 맨’ 큰 놈이 곰티브이 영화를 한 시간 동안 검색했지만 뚜렷한 결과물이 없자 나의 명령으로 결정된 영화다.(그때는 애들이 어려 명령이 좀 통했다) 그래도 보고 나서  ‘재미와 감동이 있는 영화’로 평가해주어 흐뭇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영화를 보고 나면 우리는 모두 마당으로 나가 소원을 빌었다.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빌기도 했고 아빠의 승진이나 엄마의 사업 번창을 소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어떤 소원도 이 소원의 간절함을 이겨 본적이 없다. 우리 아들이 여섯살 때 달님을 보면서 간절히 바란 소원.
“ 유희왕 카드 많이 갖게 해 주세요”


이젠 더 이상 아들은 유희왕 카드를 찾지 않고 가장 발언권이 없었던 막내딸은 해가 갈수록 그 영향력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이렇게 변해가고 있는 사이에 나도 남편도 세월을 따라 흘러가고 있다. 그러면서 바쁘거나 지치다는 핑계로 정작 중요한 추석의 추억 이벤트가 없다는 것이 조금 섭섭하다.
이왕 이번에 이렇게 돌아볼 계기가 생긴 김에 이번 추석에는 추억에 남을 가족의 추석 이벤트를 고민해봐야 겠다.

한가위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풍요의 정점, 한가위. 이번 한가위에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한가위처럼 풍요했으면 좋겠다.  또 우리 가족처럼 특별한 추억이 없는 가족들은 강제 조작을 해서라도 추억 만들기가 실현되는 한가위가 되었으면 좋겠다. 한가위 연휴 하루 전날부터 머리 싸매고 고민해보자.


작전 명: 한가위 추억 만들기
조건: 가족 모두 참여해야 함, 나의 의견이 아니라 우리의 의견으로 내용을 만들어        나감.

자, 이런 즐거운 일들을 생각하며 이번 추석엔 하늘에도 보름달, 마음에도 보름달을 두둥실 띄워 볼까요?

           
▲ 홍경희(바람섬). ⓒ제주의소리

글쓴이 바람섬은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바라건대 청춘 이후의 내 삶은 독서와 요가로 채워졌다고 말하고 싶다. 요즘은 아들 딸의 강력한 사춘기 에너지를 갱년기 에너지로 힘겹게 맞서며 하루하루살아가고 있다. 좋은 부모 만나 서울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고향에 돌아와 10년 언론사에서 일했다. 그 후 이제까지 제주교재사를 운영하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겠지만)행복한 교육으로 가는 작은 다리가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교재 교구를 판매하고 있다”

고 자신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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