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도민연대, '2005 전국 4.3유적지 순례'
고윤섭.고봉원씨 수형생활했던 마산.진주형무소터 방문
"꿈인지 생시인지 감회가 너무 새롭습니다"
'제주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이하 도민연대)가 29~30일 양일간 유족과 4.3단체 관계자 4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2005 전국 4.3 유적지 순례 및 진혼제'를 개최했다.
이번 4.3유적지 순례에는 직접 형무소에서 수형인으로 옥고를 치른 고윤섭, 고봉원, 고성화 선생님이 참여해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첫 방문지인 마산형무소는 주차장으로 변해 있었다. 마산형무소는 고봉원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수행생활을 했던 곳.
하지만 고 할아버지는 7월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15년형으로 선고받고 대구 형무소에서 6개월 가량 복역하다 50년 1월 부산형무소로 이감됐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마산형무소로 이송돼 56년 2월 가석방 돼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 할아버지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푸 부산형무소에서는 매일 야간트럭에 수형인을 끌고 갔지만 돌아오는 사람이 없었다"며 "아마도 부산 앞바다에서 처형한 것 같다"고 진술했다.
이어 고 할아버지는 "우리도 곧 죽을 줄 알았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제주출신 150명은 마산형무소로 이관됐다"며 "마산형무소에서는 더 이상 피의 학살극은 벌어지지 않았고, 56년 2월 가석방됐다"고 말했다.
진주형무소도 아파트 단지로 변해 있었다. 이 곳이 형무소터였다는 것을 알수 있는 유일한 사료는 120년 자리를 지키고 있는 '팽나무'
제주에는 마을마다 하나씩 있는 팽나무지만 육지부에는 별로 없어 아파트단지가 건설될 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국곡의 한국 근현대사를 모두 지켜본 듯 팽나무도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또 나무 밑둥에는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를 상징하듯 총흔도 군데군데 보였다.
진주형무소에서는 고윤섭 할아버지가 수형생활을 했던 곳이다.
고윤섭 할아버지는 반세기만에 다시 찾은 진주형무소터에서 '죽을 때까지 다시는 이 곳을 보지 못할 줄 알았다'며 눈시울을 붉혀 주변을 숙연하게 했다
고 할아버지의 고향은 제주시 봉개동. 4.3이 발생했던 48년부터 한라산으로 피신해 살았다.
고 할아버지는 형과 동생은 49년 1월 봉개,용강,회천 등 '동부8리소탕작전'에서 목숨을 잃고 자신은 매복해 있던 군경에 의해 총탄을 3발이나 맞았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헌병대 조사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제주경찰서에 이송된 후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광주지법에서 7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대구형무소에서 복역중 항소했지만 한국전쟁으로 항고가 취하되고 부산형무소에서 이송됐다가 53년 진주형무소로 이감돼 56년 출소됐다.
고할아버지는 진주형무소 복역중 남로당 제주도당 조몽구 위원장과의 인연도 설명했다.
고 할아버지는 "4.3 무력 투쟁을 반대했던 조몽구 선생은 당시 진주형무소에서 복역중이었다"며 "조 선생은 강경파인 김달삼 등에게 말려 4.3 무장봉기가 일어났다고 저에게 말한 바 있다"고 진술했다.
수용소는 이미 시가지로 변해 있었고, 주변에는 수용소박물관이 조성돼 있었다.
순레단에 참여한 김경훈 시인은 "4.3 평화공원이 포로수용소박물관처럼 되지 않도록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씁쓸히 말하기도 했다.
"조만간 4.3영화를 도민들에게 선보일 겁니다" - 임종호 감독 |
유적지를 돌아볼 때마다 6mm카메라로 행사를 열심히 찍었던 임종호 감독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제주영상위원회 임원식 감독의 큰 아들이기도 한 임종호 감독은 4.3영화를 만들기 위해 이번 순례에 참여한 것. 임 감독은 '조만간 제작발표회를 가질 예정으로 영화화 할 것'이라며 '스토리와 에피소드가 부족해 이렇게 따라나선것'이라고 말했다. 임 감독은 '유명한 소설가의 작품을 영화화하는 것으로 이미 판권게약을 마쳤다'며 '오는 11월 초경에 제작발표회를 갖고 본격 촬영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