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멍 보멍 들으멍] (18) 애월읍 영등할망, 그 첫 번째 이야기

 

▲ 제주의 바닷가에는 영등할망을 모시는 수많은 당이 있다. / 사진=정신지 ⓒ제주의소리

마을 아저씨들은 그녀를 ‘영등할망’이라 부른다. 영등할망은 매년 음력 2월 초하룻날 찾아와서 2월 보름경에 떠난다고 알려진 제주설화의 바람 신(風神)이자 풍농 신(豊農神)이다. 그녀는 60년 가깝게 물질을 하며 상군(해녀들을 기량에 따라 상·중·하군으로 구별, 가장 기량이 좋은 해녀) 중의 상군 해녀로 동네 바다 속을 꿰뚫고 있는 할망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인정 많고 재치 있으며 풍채도 좋은 그녀는 동네 아저씨들 사이에서 인기 만점의 할망이다.

밭담 옆에 홀로 기대어 앉아 빙글빙글 돌아가는 스프링클러를 바라보던 그녀에게 다가가 길을 물었다. 늘 그렇듯, 아는 길도 또다시 물으며 만남이 시작된다.
“이추룩(이렇게) 너영(너랑) 말해도, 나는 밥 한 재기(그릇) 더 먹은 사람이난 게. 그 말은, 우리 같은 노인이 젊은 소름(사람)들 보다 배운 것이 한 과목이라도 더 있다, 그런 말이주게(말이지).”

어디 한 과목뿐이겠습니까, 하고 받아치며 나는 그녀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멋모르는 어린아이처럼, 할망의 넓은 바다 속으로 ‘첨벙’.

그녀에게는 한 번 뚜껑을 열면 꼭 울고 닫아야 하는 기억들이 존재한다. 그도 그런 것이,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영등할망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았다. 물론 둘이 배꼽을 잡고 웃다가 흘린 달콤한 눈물도 있었다. 평화롭게 보내던 그녀의 오후, 갑작스레 나타나 길을 묻더니 할망을 울게 한 나는 정말 몹쓸 아이다. 하지만 그런 나를 집에까지 초대해주시고, 달짝지근한 잔칫집 커피도 타 주신 그녀. 설화 속 주인공이 아닌, 현존하는 영등할망의 이야기다.

 

▲ 지난겨울, 영등할망이 지나간 바닷가에서 찍다. 사진=정신지 ⓒ제주의소리

그녀가 네 살이 되던 해인 1936년, 당시 ‘노무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아버지가 자진해서 간 것이라고 할망은 말하나, 장담하건대 그것은, 식민지로 초토화된 제주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그들이 만들어 낸 시나리오에 불과하다.) 그렇게 징용되어간 노무자 가족은 일본 요코하마에 짐을 풀었다. 일본에 가면 먹을 것이 많을 줄로만 알았으나, 제주에서와 마찬가지로 꼬마는 쌀과 보리의 껍질로 만든 떼죽만 먹고 살았다. 게다가 미국의 끊임없는 공격에, 하늘에는 폭탄과 전투기가 날아다녔다. 그녀는 그것을 ‘까마귀’라 기억한다. 아스팔트 바닥은 불에 녹아 흐물거리고, 그 위를 걷다가 몇 번이고 신발 깔창이 땅에 박혀 오도 가도 못했다.

아홉 살이 되던 어느 날, 미국의 심각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까마귀의 불똥세례에 사람들이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 채비에 정신이 없던 어머니는 그녀에게 “저디(저기) 파란이불 진(짊어진) 사람만 쫓아감시민(쫓아가고 있으면), 나가 곧 따라가마.” 하고 동생을 찾으러 갔다. 하지만 키 낮은 꼬마의 시선이 바라본 피난길에는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가 파란이불을 등에 이고 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떤 파란이불을 따라가야 하는지 모른 채 사람들의 발에 치이며 걷다 보니, 끝내 길을 잃었다. 혼자가 되었다.

그렇게 넉 달을 걸었다. 밤중에 길을 걷다 보면,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처럼 정말 짐승도 나온다. 그때마다, ‘어흥~’하고 이빨을 드러낸 짐승들과 눈싸움을 했다.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그녀는 앞만 보고 걸었다. 한 번은, 숲 속을 걷다가 폭탄에 맞아 팔 하나를 잃은 채 피를 흘리고 있는 한 일본군 아저씨를 보았다. 커다란 바위에 기대고 앉아 그는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꼬마는 마음속으로 빌었다. ‘이디 왕(이리 와서), 나영(나랑) 놀자.’하고 그가 말을 걸어주기를. 하지만 그는 끝끝내 꼬마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래서 꼬마는 또다시 걸었다. 걷다 지치면 홀로 앉아 소꿉놀이를 했다. 뭐를 먹어야 하는지도 몰라서 아무거나 먹고 아무 데서나 잤다. 소꿉놀이니까, 풀도 먹고 이슬도 먹었다. 나무 밑에서도 자고, 돌 위에서도 잤다. 그렇게 작은 생명을 이어가는 놀이 아닌 놀이를 해야만 했다.

 

▲ 영등할망은 설화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자식들을 위해 빌고, 농사와 물질이 잘 되기를 기원하는 이 섬의 모든 할망이 영등할망의 딸이다.  / 사진=정신지 ⓒ제주의소리

그러던 어느 날, 초원에서 풀을 뽑으며 놀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콕콕 찔렀다. 돌아보니 머리가 하얗게 센 한 일본인 할망이 서 있다. 길을 잃었느냐고, 집이 어디냐고 물으며 꼬마의 작은 손을 잡고 할망은 마을로 향했다. 지쳐서 더는 걸을 수 없는 그녀를 등에 업고, 할망은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녔다. 하지만 꼬마의 임자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할망 역시 생계를 이어나가느라 죽을힘을 다하고 있었지만, 틈이 나면 꼬마를 찾아와 먹을 것을 주고, 그것을 꼬마는 ‘지꺼졍이네(기뻐서)’ 좋다고 받아먹었다.

몇 주나 지났을까. 할망 손을 잡고 한 마을에 들렀다. 마을이라 할 것도 없이 집들은 모조리 불에 타고,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우연히 할망이 ‘이 집 알아지겠느냐?’ 묻던 그 집. 가끔 놀러 오던 사촌 오라비의 집이 아니던가! 할망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여기가 우리 집이라 말했다. 그러자, 아무도 없는 그 집 안에 꼬마를 넣어놓고,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근 채 할망이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내가 가서 너희 어멍아방을 찾아오겠노라 하고.

그렇게 또 아무도 없는 집에서 사흘을 견뎠다. 하지만 이번에는 외롭지 않았다. 어떻게 먹는지는 몰랐지만, 부엌에 가니 눈에 익은 보리쌀도 있었고, 동네 고양이란 고양이는 죄다 모아놨을 지도 모를 만큼, 수많은 고양이들이 꼬마 곁을 지켜주었다. 며칠 후, 밖에서 달그락 달그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문이 활짝 열리더니, 바람처럼 누군가가 달려 들어온다. 엄마다! 어멍이다! 만나자마자 오열하며 꼬마의 엉덩이를 내리치던 어머니. 꼬마는 반가워할 새도 없이 울었다. 호되게 내려치던 엉덩이가 아파서, 놀라서, 반갑고 서러워서, 그냥 ‘죽어지게(죽도록) 울었다’. 그 말을 하는 영등할망도 울었고, 나도 울었다.

 

▲ 할망이 손주사진을 보여주겠다며 나를 집으로 초대하신다. 그제야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시작했다.  / 사진=정신지 ⓒ제주의소리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할망이 말했다.
“꼭 어멍 같기도 하고 할망 같기도 하고, 나 살려준 그 일본 할망 게(말이야). 살아시민(살았으면) 촞앙이라도(찾아서라도) 가보켜(가보겠어). 우리 어멍도 아방도, 살아시민 뭐라도 해드릴 건디(텐데). 이제 나만 남앙(남아서) 몬딱(전부) 죽어부렀주게(죽어버렸지).”

할망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지나가던 옆집 할망이 틈을 비집고 내 옆에 앉았다. 영등할망이 존댓말을 쓰는 것을 보니, 옆집 할망은 그녀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가보다. 이야기를 다 들은 옆집 할망이 말문을 열고 조용히 한마디 하신다.
“게난(그러니까), 다 잘 되싱게게(다 잘 됐네).”
그 짧고 굵은 한 마디에 온 세상이 평화로워진다. 지팡이를 들고 일어난 옆집 할망이 뚜벅뚜벅 천천히 집을 향해 걸어갔다. 영등할망은 나에게, “이야기 허젠허민(하려면) 아직도 멀어서(멀었어). 한도 끝도 어서게(없어). 우리 집에 강(가서) 손지(손자) 사진이라도 볼탸(볼래)?”하고 말씀하셨다.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 마치 기다리던 영화를 보러 가는 길처럼 느껴졌다. 영등할망의 한도 끝도 없는 이야기는, 다음 편에도 계속된다. 오징어와 땅콩을 사 놓고, 개봉박두다. <제주의소리>

<정신지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정신지는 ?

   

이 여자, 택시 기사들과 대화 나누길 즐기는 ‘수다쟁이’다. ‘역마살’도 단단히 타고났다. 거기에다 ‘촌스러움’까지 좋아하는 독특하고 야무진 여자다. 그녀의 이름은 정신지(32). 파주·부산 출신의 부모님 아래 서울서 태어나 여섯 살에 제주로 이민(?) 왔지만 스무살에 다시 서울로 나갔다가 일본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지역연구학’이라는 인문학을 전공했다. 그동안 세계 17개국의 섬·지방·대도시를 떠돌며 사람과 집단, 그 사회에 대한 이해를 넓혀왔다. 지난 봄, 일본의 국립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에서 문학박사 과정도 수료했다. 이제 12년간의 지구촌 유목 생활을 마치고, 태어난 곳은 아니되, 자신을 성숙하게 키워준 ‘진짜 고향’ 제주로 지난 봄 돌아와 부모님이 살고 있는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에 짐을 풀었다.  매주 한차례 <제주의소리>를 통해 제주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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