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와 이백, 그리고 노자의 흔적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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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혁의 중국횡단기] 18 두보초당과 청양궁

두보(杜甫)는 하급관리직으로 잠시 관직에 머물기도 했지만 거의 평생을 실의와 좌절 속에서 방랑 생활을 하며 궁핍하게 지냈다. 본래 하남성(河南省) 양양(襄陽)에서 출생한 두보가 성도(成都)에서 생활한 것은 759년에서 763년, 그의 나이 49세에서 51세까지 3년가량이다.

참혹한 안록산의 난을 겪고 난 후 중원에 대기근이 들자 관직을 버리고 방랑하는 신세가 된 두보는 이곳 사천 지방까지 흘러들어와 성도 서쪽교외 완화계(浣花溪)의 초당사(草堂寺)에 묵었다. 이듬해 760년 마침이 지방의 절도사로 있는 옛 친구의 도움으로 초당사에서 조금 떨어진 완화계 서쪽에 초당을 짓고 살게 되었는데, 이 완화초당이 바로 지금의 두보초당이다.

 

▲ 두보초당 풍경. ⓒ양기혁

냉혹하고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고 울분을 토로하던 그도 전란과 기근을 벗어나 여기에서 비교적 평화롭고 안온한 전원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편안하고 행복했던 이 시기에 두보는 약 240여 수의 시를 남겼다고 하는데 아래 시‘강촌(江村)’도 그 당시의 한가롭고 편안한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시다.

江村
淸江一曲抱村流, 長夏江村事事幽
自去自來梁上燕, 相親相近水中鷗
老妻畵紙爲碁局, 稚子敲針作釣鉤
多病所須惟藥物, 微軀比外更何求

강촌
완화계(浣花溪) 맑은 물은 마을을 휘감아 구비구비 흐르고,
긴긴 여름날 마을은 한가롭고 그윽하다
제비는 처마 밑을 제멋대로 드나들고
물 위의 비둘기들은 무리지어 떠다닌다.
늙은 아내는 종이에 바둑판을 그리고
어린 아이는 바늘을 두들겨 낚시를 만들고 있다.
그저 약이나 좀 먹었으면 할 뿐
이 미천한 몸이 달리 바라는 바가 없다.

원래 보잘것없는 초막집에 불과하던 두보초당이 지금은 20만㎡에 이르는 거대한 정원으로 잘 가꾸어져 있었다. 밖으로 돌아 나가는 길에는 중국 문학사에 등장하는 시인과 문장가들의 동상들이 길 양쪽에 늘어서 있고, 바닥의 블럭에도 정치가와 사상가들의 이름과 생애를 기록하여 발걸음마다 마치 중국 문학사와 사상사의 향연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출구 표시가 보여 밖으로 나왔는데, 들어간 곳과 전혀 달라 지나가는 사람도 별로 없고 차량도 드물게 지나가고 버스는 보이지 않는다.

 

▲ 뒤에 검정색 동상이 굴원, 앞의 흰색 동상은 왼쪽이 두보, 오른쪽이 이백이다. ⓒ양기혁

 

▲ 왕유(王維, 701~761, 盛唐), 유신(庾信, 513~581, 北朝), 포조(鮑照, 414~466, 南朝). ⓒ양기혁

 

 

▲ 진자앙(陳子昻, 661~702, 初唐), 황정견(黃庭堅, 1045~1105, 北宋), 왕안석(王安石, 1021~1086, 北宋). ⓒ양기혁

 

▲ 왕발(王勃, 650~676, 初唐), 양형(楊炯, 630~693, 初唐), 삼소(三蘇, 北宋)-소식(蘇軾, 1036~1101), 소순(蘇洵, 父),소철(蘇轍, 弟). ⓒ양기혁

청양궁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 택시를 타면 될 것 같은데 빈 택시가 보이질 않는다. 차가 좀 많이 지나갈 것 같은 삼거리 쪽으로 걸음을 옮겨 택시를 기다리는 데 앞에 삼륜차가 눈에 띄어 다가갔다. 삼륜차는 오토바이 뒷좌석에 두 사람 앉을 정도의 공간을 만들고 덮개를 씌운 영업용 간이 택시라 할 만한 것이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대머리 청년에게 청양궁 가는 데 얼마냐고 물으니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인다.

“스콰이(10원)?”내가 묻자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기꺼이 뒷좌석에 올라탔다.
삼륜차는 앉을 공간이 넉넉했고 지붕과 옆으로 덮개가 되어 있어서 두보초당 올 때 탔던 그냥 오토바이보다 한결 낫다. 청양궁에 도착하여 10원을 지불하고 청년에게 카메라를 보여주며 사진 한 장 찍고 싶다고 하자 그는 허허 웃기만 한다.

청양궁(靑羊宮)은 노자를 기리는 도교사원이다. 천산 천지에 세워진‘복수관(福壽觀)’은 최근에 건축되어 마치 관광객을 상대로 기념품 판매하듯이 관광코스로 끼워져 있었는데, 여기 청양궁은 천년이 넘는세월 동안 명맥을 이어 오며 민간신앙으로 중국인들과 호흡을 같이해
온 곳이었다. 10원짜리 입장권에는 이미 주(周)나라 때에 이 사원이 건립되어 당나라를 거쳐 명, 청 시대에 크게 번성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들어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입장권 외로 입구에서 따로 파는 초나 향 같은 것을 사들고 가서 제단 앞의 향 피우는 곳에 꽂아놓고 절을 하며 기원을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원 안 곳곳에는‘주역(周易)’의 태극문양과 괘(掛)가 그려져 있고‘, 老子도덕경(道德經)’의 구절들이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청양궁. ⓒ양기혁

 

▲ 청양궁. ⓒ양기혁

청양궁 내에는 관광객뿐만 아니라 예복을 입고 수련하는 젊은 사람들과 여러 사람이 모여서 가야금처럼 보이는 악기를 타며 길게 늘어지는 특유의 음악을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경내의 맨 끝에 당태종 이세민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

7세기 당 태종 이세민은 이름이 이이(李耳)로 알려진 노자가 당나라 왕조의 성(姓)인 이 씨의 조상이라고 선포하고 도교의 교주이며 최고의 천신으로 받들어 노자를 존숭하게 하였다. 과거시험에 논어의 비중이 줄어들고, 도덕경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현종 때에는 가정에도 도덕경을 한권씩 갖추게 했고, 그 자신이 도교에 입문해 도사가 되었다. 도교는 황실의 종교가 되어 크게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양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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