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훈의 제주담론] 12 2012 대선 앞두고 광해, 다시 호출되다 

   

최근 영화 <광해>가 흥행몰이 중이다. 이미 1천만 관객을 돌파한 역대 일곱 번째 한국영화가 되었다. 엊그제 필자도 그 숫자를 채우는 데 아주 늦게 동참했다. 저승에 있는 광해군이 안다면, 묘호조차 받지 못한 비운의 왕으로 역사에 남은 자신의 처지를 400여 년이 지나서도 논란의 주인공으로 재삼 떠올리는 후손들을 보면서 어떤 회한이 일까? 궁금하다. (물론, 감독의 광해 드러내기 방법은 두 개의 왕을 등장시켜, 진짜 광해에 비추어 가짜 광해를 대안화하기 때문에 오히려 불쾌할지도 모르겠다.)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장르인 소위 팩션(Faction) 영화다. 광해군 8년 되는 해를 배경으로 《승정원일기》에서 사라진 ‘15일간의 기록’이라는 가상의 시간대를 설정하여, 가상의 ‘팩트(?)’를 픽션화한다. 역사에서 누락된 15일간의 민중왕 광해를 그려내는 것이다.

광해군은 제주와도 인연이 깊다. 그는 1637년(인조 15년)에 강화도에서의 오랜 유배생활 끝에 절도의 유배객으로 제주에 오게 된다. 광해군은 1623년, 재위 15년 만에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된 후, 몇 번을 옮겨 다니며 강화도의 작은 섬 교동도에 있다가, 제주도로 옮겨졌다. 당시 조정에서는 광해군에게 유배 지역을 알리지 못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다를 건널 때는 배의 사방을 모두 가려 밖을 보지 못하도록 하여 제주에 유배시키는 것을 비밀리에 행하였다고 한다.

배가 제주도에 도착한 후 비로소 장막을 걷어 경호역인 별장 이원로(李元老)가 제주도라고 말하자, 광해군은 매우 놀란 눈으로 “어째서 여기에! 왜 어째서!”라고 되풀이 말하며 개탄했다고 전해진다. 1637년 6월 6일 어등포(구좌읍 행원리)로 입항하였고, 다음날 성내로 들어와 망경루 서쪽에 있는 적소에 위리안치하였다고 한다.

 

▲ 광해군 적소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현재 동문로 기업은행 자리와 중앙로 국민은행 중앙점 자리라고도 하는데, 제주시에서 세운 <광해군 적소터> 표석은 국민은행 앞에 서 있다.

1638년(인조 16년) 심연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인조가 광해군에게 여름과 겨울에 의복을 보내도록 명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1640년(인조 18년) 9월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시방이 광해군을 잘 돌보았으나, 결국 1641년(인조 19년) 7월 1일 적소에서 지난했던 생을 마감한다. 이때 그의 나이 67세였다. 광해군이 사망하자 제주목사 이시방은 제관을 적소로 데려가 직접 습렴(襲殮)하였으며, 제주도민들은 조정에서 예관이 도착할 때까지 예를 갖추어 호상(護喪)하였다.

인조는 예조참의를 제주에 파견하여 광해군의 시신을 수습, 빈소를 관덕정으로 옮겨 장례를 지내고, 8월 18일 제주를 출항, 경기도 양주에 묻었다. 《제주도민요해설》(성문사, 1963)에는 “칠월도 초하루는 대왕이 돌아가신 날, 볕이 쨍쨍한데도 비가 내리고 있다.”는 민요가 수록되어 있어, 광해군이 돌아간 음력 7월 1일에는 반드시 비가 내린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동안 역사의 뒤안에 있어 간간이 문제적 역사해설서에서나 얼굴을 보이던 광해가 다시 호출되었다. 2012년 대선을 코앞에 두고 말이다. 그것도 진짜와 가짜, 두 명의 왕을 등장시켜 광해의 시대를 그린 영화로. 조선시대 국왕 중 가장 문제적인 왕 중의 한 명인 그이기에 그의 호출 역시 논쟁적이고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역사 속의 누군가가 호출되었을 때는 반드시 그 시대정신이 있는 법이다. 광해의 호출은 그가 살았던 시대가 우리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본질적인 공통점을 갖기 때문이리라. 상업적으로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려면, 오늘 우리들의 시대와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할 무엇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언인지를 영화는 우리들에게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였던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이 지은 조선시대의 빼어난 야사집인 《연려실기술(燃藝室記述)》제19권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광해군>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광해군의 휘는 혼(琿)이며, 선조의 둘째 아들이요, 공빈(恭嬪) 김씨가 낳았다. 을해년에 나서 처음에 광해군으로 책봉되었다가 만력(萬曆) 기유년에 왕위에 올랐고 천계(天啓) 계해년에 폐위되니 왕위에 있은 지 15년이었다. 강화에 방치되었다가 갑자년에 이괄의 난리로 인하여 태안(泰安)으로 옮겼고 반적(叛賊)이 평정된 다음 강화에 돌아왔다.

병자년(1636) 겨울에 교동도(喬桐島)에 옮겼다가 정축년 2월에 제주(濟州)로 옮겼다. 신사년에 죽었는데 인조 19년 67세였다. 양주(楊州) 적성동(赤城洞) 해좌(亥坐)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공빈의 무덤과는 소 울음소리가 서로 들릴 만한 거리였다.

○ 신해년에 존호(尊號)를 체천희운준덕홍공(體天熙運峻德弘功)이라고 올렸고 병진년에 존호를 서이입기명성광렬(敍彛立紀明誠光烈)이라고 올렸다.

○ 폐비(廢妃) 문성군 부인(文城郡夫人) 유씨(柳氏)는, 판윤(判尹) 자신(自新)의 딸로 병자년에 나서 계해년 10월에 죽었는데, 향년 48세이며 적성동에 장사 지냈다. 광해의 무덤과 같은 언덕이면서 무덤은 다르다.

○ 폐세자(廢世子) 지(祬)는 무술년에 나서 경술년에 관례(冠禮)를 거행하고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계해년에 폐위되었다. 뒤에 강화에 보냈더니 7월에 땅굴을 파고 몰래 빠져 나왔으므로 사헌부에서 논계(論啓)하여 사사하였는데 나이는 26세였다. 양주 수락산(水落山) 옥류동(玉流洞)에 장사 지냈다.

○ 폐세자 빈(嬪) 박씨는 무술년에 났고 계해년 5월에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한국고정종합DB, 고전번역총서)

폐위된 뒤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행적과 일가의 시말을 간결하게 정리해 놓은 글이다. 이 기록으로 보아 광해군과 왕비, 아들과 며느리까지 제명에 살지 못하고, 멸절당했음을 보여준다. 무엇이 이토록 철저히 이들을 파괴시켜야 했을까? 전쟁 상황이나, 민중의 혁명으로 혁파된 왕조도 아닌데, ‘광해’, 그는 용맹과 지략을 갖춘 뛰어난 왕재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불행한 조선의 왕으로 불명예스럽게 역사에 남았다.

역대 조선의 왕들 중 시대를 넘어 현대의 우리들에게까지 기억에 남는 왕들은 그리 많지 않다. 꼽으라면, 당연히 한글 창제자이자 성군으로 불리는 세종과 개혁군주였던 정조 정도 아닐까? 필자는 조선의 왕 중 비록 재위기간을 다 채우지는 못했지만, 공과가 극명하게 갈리는 광해군 역시 그들에 견줄 만한다고 생각한다.

폐주(廢主), 소위 폐위된 국왕을 이르는 호칭이다. 폐주였던 광해군은 비운의 국왕이었지만, 재위기간 동안의 그의 공과(功過)는 요즘 날이 갈수록 새롭게 주목을 끌고 있다. 특히 명청 교체기의 틈바구니에 낀 동아시아 대격변의 국제정세 속에 소위 ‘중립외교’로 알려진 그의 ‘등거리외교’ 전략은, 요즘 강대국의 틈새에 끼인 우리나라의 현실과 대비되면서 재조명받고 있으며, 또한 재위기간에 경기도 일원에서 처음 실시한 ‘대동법’은 폐단이 극에 달했던 방납제(防納制)를 혁신하는 새로운 조세제도로서 위민군왕으로서의 광해의 면모를 다시 보게 하는 치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최근 오항녕 교수(전주대 역사문화학과)는 최근 출간된 그의 책《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에서 광해군의 재위기간을 잃어버린 15년이라 표현하면서, “그는 본보기가 될 거울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망칠 위험한 거울입니다.”라고 정면으로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이처럼 광해군은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그 평가가 극적으로 갈리는 문제적 인물이다. 과거에는 동복형과 이복동생을 죽이고 대비를 폐한 패륜을 저지른 폭군, 오늘날에 와서는 임진왜란 이후 명-청을 상대로 실리적인 중립외교를 펼쳤으며, 백성을 살리려는 애민성군으로 평가되는 두 얼굴로.

사실, 기록만을 통해 본 광해는 준비된 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특히 역대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이 주변 강대국들에 휘둘려 제 목소리 한번 내지 못하는 외치(外治)에서도, 명(明)나라에 대한 국가적 자세를 ‘근사대지예(謹事大之禮)’라 떠받들던 사대국(事大國)의 국왕으로서의 한계를 넘어, 능란한 등거리외교를 구사했던 국왕이었다는 점에서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도드라진 국왕이기도 했다.

이러한 광해군은 조선시대 내내 폭군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 왔는데, 광해군을 역사상 처음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들은 유감스럽게도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와 ‘다카와 고조(田川孝三)’라는 일본인 학자들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만선사관론자(滿鮮史觀論子)이자 청조옹호론자(淸朝擁護論子)들로, 중국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조선이 만주와 일체라는 논리를 펴고자 그 근거를 찾다 보니 광해군을 평가하게 된 것이다.

후금, 즉 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던 광해군을 띄워서 만주와 조선 반도의 역사를 하나로 엮어보려 했던 것이다. 일제는 결국 만주를 침략한 후, 폐위된 청조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를 데려다, 만주국이라는 일제의 괴뢰국을 세운다. 이를 근거로 오항녕 교수(전주대 역사문화학과)는 광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친일식민사학의 폐해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처음 광해의 가치를 발견했다고 해서, 광해를 새롭게 해석해내고 평가해내는 것에 흠이 되는 일은 아니다. 문제는 광해의 역사적 실체를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내고 평가해내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폐주(廢主)?, 광해의 시대, 그의 궤적

광해군 재위 당시 동아시아 정세는 동아시아 국제대전이라 부를 만한 <임진왜란>의 격동이 한차례 지나간 후, 급격하게 그 세력이 재편되고 있었다. 명은 황제의 태업과 환관들의 부패와 횡포, 그로 인한 잦은 민란의 발생, 밖으로는 북로남왜(北虜南倭), 즉 왜구와 몽골, 후금의 공격에 시달리며, 지방 세력들의 권력투쟁으로 인한 군대의 부패, 또한 임진왜란에 무리하게 병력을 파견하여 국력을 소모한 후폭풍으로 나라가  급격히 쇠락해 가는 상황이었다.

후금은 임진왜란 당시 만주에 대한 명의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 건주좌위(建州佐衛)의 수장(首長) ‘누르하치’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광해군 8년) 스스로 한(汗)의 위(位)에 올라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하고, 흥경(興京-현재의 중국 랴오닝성 허투알라)에 도읍하면서 새로운 동아시아의 강자로 급부상하는 상황이었다.

일본은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중에 죽고, 한반도 원정에 실패하면서 다시금 중앙의 정권을 탈취하기 위한 다이묘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다이묘 중 유일하게 전쟁에 참가하지 않고, 핑계를 대고 은거해 있으면서 군사를 비축해 두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에 나갔던 출병 다이묘들을 회유하여 자신의 휘하에 모으고, 각지의 다이묘들과 혼인 동맹을 맺으면서 그 힘을 더욱 키워 전후 전국을 통일하고, 급기야 1603년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의 자리에 올라 마침내 250여 년간 일본을 통치하는 <에도 막부>시대를 열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국토는 처참하게 유린당하고, 그 피해에 손도 대지 못하면서, 백성은 도탄에 빠졌으며, 국가존망까지 치달았던 ‘대환란’을 겪었던 조선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광해는 후금의 성장을 주시하면서 북방의 성곽과 병기를 수리하는 한편, 조총청이라는 화기도감(火器都監)을 두어 총포를 제작하고, 조총부대를 새로이 창설해 군사적으로 방비하였다. 일기에 따르면, 광해군은 당시 조정대신들이 명분만을 쫓아 실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한다.

중국의 일의 형세가 참으로 급급하기만 하다. 이런 때에 안으로 스스로를 강화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써서 한결같이 고려(高麗)에서 했던 것과 같이 한다면, 그럭저럭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의 인심을 살펴보면 안으로 일을 힘쓰지 않고 밖으로 큰소리치는 것만 일삼고 있다. 조정의 신하들이 의견을 모은 것을 가지고 보건대, 무장들이 올린 의견은 모두 (압록)강에 나가서 결전을 벌이자는 의견이었으니 매우 가상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지금 무사들은 어찌하여 서쪽 변경은 죽을 곳이라도 되는 듯이 두려워하는 것인가. 고려에서 했던 것에는 너무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부질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강홍립 등의 편지를 받아 보는 것이 무엇이 구애가 되겠는가. 〈이것이 과연 적과 화친하자는 뜻이겠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끝내는 반드시 큰소리 때문에 나라 일을 망칠 것이다.(《광해군일기》신유년 6월 6일) 

1616년(광해군 10년) 명과 후금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고 명의 원군요청이 있자, 그는 임진왜란 이후 나라의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핑계를 대어 미루다가 조정대신들의 반발에 결국 강홍립에게 병사 1만을 주어 파병하면서 “우리는 대의명분상 어쩔 수 없이 출병하는 것이고, 우리의 힘은 약하니 후금을 적대해서는 안 된다.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연려실기술》 권21, <폐주광해군고사본말> 심하지역)는 밀지를 내려 후금에 어쩔 수 없는 전쟁임을 알려 투항케 하는 등 군사적 마찰을 최소화하는 중립외교를 펼쳤다.(이는 후에 인조반정의 중요한 명분 중 하나로 지목된다.)


또한 일본과는 1609년 기유조약(己酉約條)을 체결하여, 왜란 이후 중단되었던 외교관계를 재개하고, 포로로 끌려갔던 조선인을 귀환시켰다. 또한 그 와중에도 일본의 앞선 조총기술을 받아들인다. 

▲ 조선 후기 김후신(金厚臣)의 그림으로, 강홍립 등이 금에 투항하는 장면을 그린 <양수투항도>.『충렬록(忠烈錄)』의 일부분이다.

내치(內治)의 업적을 보면, 광해군 원년(1608), 양반층과 중간상인들의 폐단이 극에 달했던 방납제를 개혁하는, 조선시대 조세혁명이라 불리는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한다. 대동법은 그야말로 조세혁명이었다. 공납을 쌀이나 포로 받는 정책을 실현시킨 것인데, 특산물에 대해 양반들과 방납자들이 중간에서 취하는 ‘유통비용’을 절감시킴으로써, 돈 있는 자는 ‘더’, 없는 자는 ‘덜’ 내는 효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당시로는 상상하기도 힘든 조세 개혁이었다. 대동법은 율곡 이이에 의해 처음 주창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해 시행되지 못하였고, 광해군에 의해 처음 실시되었던 것이다. 물론 경기지역에 한해 시범적으로 실시되었지만, 양반기득권층의 반발은 심했다. 찬반양론의 격돌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순차적으로 확대, 결국 숙종 때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실시되기에 이른다.

또한 1611년에는 조세제도의 바탕이 되는 농경지의 실제 경작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토지측량제도인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국고를 튼튼히 했으며,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궁성을 중건했다. 이는 실추된 왕권 강화를 위한 상징적 조치이기도 했다.(왜란을 겪으면서 정궁인 경복궁과 창덕궁은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이 때문에 정릉의 양반가를 개조해 궁궐 대신 사용했다. 그러므로 궁성의 복원과 신축은 충분히 명분이 있는 일이었지만, 당시 전후의 피폐한 상황에서 무리한 궁성 복원과 신축은 국가적 역량을 소모하고 백성의 노역을 가중시키는 것으로서, 임란부터 얻은 백성들의 군왕에 대한 신망을 거두게 하는 구체적 요인이기도 했다. 궁성의 중건은 인조반정의 또 다른 명분이 되기도 한다.)

▲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이 복원했다고 전하는 창덕궁 <인정전>.

특히, 허준의《동의보감(東醫寶鑑)》을 간행한 것은 그의 애민의지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다른 왕이었다면 동의보감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을까? 광해군 즉위 직후인1608년, 선조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망령되이 약을 써서 선조를 죽게 했다.”는 죄로 유배 길에 올라야 했다. 광해군은 신료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귀양 중인 허준이 《동의보감》을 완성할 수 있게, 도성을 출입하고 내의원의 의서를 열람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동의보감》은 전란으로부터 시작된 굶주림과 전염병 때문에 인구가 줄어들고 있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선조의 명으로 시작되었다. 왕명을 받은 허준은 당대의 인재들과 함께 편찬 작업에 들어갔으나 나중에는 단독으로 작업했다. 14년에 걸쳐 총 240여 종의 의서들을 참고하여 쓴 책이 《동의보감》이다.

전란의 와중에서 부상자가 속출하고, 전후에도 빈발하는 질병 때문에 의약 전반에 대한 수요는 높아졌지만, 그에 대한 의료진과 약재의 공급은 턱없이 부족했다. 특히, 중국산 약재는 값이 비싸 구하기 힘들었으며, 가난한 백성들이 의약의 혜택을 받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허준은 이 같은 현실에서 값비싼 중국산 약재 대신 조선의 토산 약재를 이용하여 치료하기 쉽게 하고, 구하기 쉬운 약재의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의약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또한 지극히 방만하고 번잡했던 중국계의 의학서적을 짜임새 있게 우리나라에 맞게 정리했다. 그렇게 탄생한 《동의보감》은 광해군의 후원 없이는 출간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임란 당시 병화로 소실된 서적의 간행에도 주력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을 재간하고, ≪국조보감(國朝寶鑑)≫·≪선조실록(宣祖實錄)≫을 편찬, 보급했다. 한편, 임란의 경험을 토대로 후금과의 외교관계가 악화될 상황에 대비하여 실록의 보존을 위해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사고(史庫)를 설치하였다.

왕이 되기 이전의 ‘광해’, 즉 ‘세자 광해’ 또한 그 치적이 만만찮다. 조선의 정궁이었던 경복궁, 일제 때 훼철된 후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복원 중에 있는 서울 한복판의 경복궁은 왜군이 불태운 것이 아니다. 서울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蒙塵)을 떠나는 선조의 행차에 분개한 한양의 백성들이 태워버린 것이다. 어쩌면, 조선은 그때 멸망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도성을 떠나 피난지 평양에서, 그동안 선조가 내키지 않아 미루던 광해의 세자 책봉이 서둘러 이루어지고, 의주로 가는 길에 영변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분조(分朝)를 위한 국사(國事) 권섭(權攝)의 권한이 광해에게 위임된다.

도피해버린 국왕을 대신해 얼떨결에 세자에 책봉되어 졸지에 분조(分朝)를 경영하게 된 것이다. ‘분조’란 ‘조정을 나눈다’는 말로, 임금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라는 왕명에서 나온 소조정(小朝廷)이다. 분조를 이끈 광해는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를 돌면서 의병을 격려하고, 백성들을 돌보는 일을 수행한다. 심지어 호남지역까지 몸소 내려가 독려한다. 국왕이 해야 할 일을 왕세자가 한 것이다. 이는 정말 위험천만한 임무였음에도 불구하고 광해는 이 일을 훌륭히 해냈으며, 몽진으로 인한 백성의 민심을 다시 되찾는 데 크게 기여한다. 백성들은 이러한 광해를 크게 따른다.

여기까지가 국왕 광해의 통치행적이다. 도대체 조선의 왕 중 이만한 치적을 가진 왕이 몇이나 될까? 외교와 군사, 전후 복구와 정비, 전쟁 중의 분조활동 등 청년기부터 재위시기까지 일관되게 왕다운 왕이었으나, 그는 왕으로 죽지 못한 비운의 조선 왕이 되고 말았다.


광해의 발목을 잡은 적통승계의 명분론

이런 그의 비극은, 이러한 통치행위에도 불구하고 왕조시대의 적통승계논리에서 비롯된다.  이른바 정비(正妃)의 왕자가 아니라 후비(后妃)의 왕자라는 서자의 비극, 조선의 신분계급의 비극과 왕실의 적자승계 전통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그 아비이자 조선시대 왕 가운데 가장 무능했던 왕으로 평가되는 선조의 적통콤플렉스에서 시작된 이 비극은, 결국 광해군의 정치생명을 끝내는 요인으로 작용, 끝까지 그의 발목을 잡아맨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27대 왕 중 적장자가 왕이 된 경우는 단 7명에 불과하다. 또한 적장자 승계자가 반드시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던 것도 아니다.

선왕인 선조는 중종(中宗)의 서자였던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이었으니, 서자의 셋째가 왕이 될 것은 꿈에도 모를 일이었다. 선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선왕인 명종이 34세라는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후 선조는 재위기간 동안 자신의 정통성에 대한 약점을 늘 의식했는데, 세자인 광해가 왕재인 것을 인정하면서도 끝내 적통왕자가 왕위를 잇기 바란 데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준비된 왕재보다 적자혈통에 혈안이 되었던 왕이 뿌린 씨였다. 선조는 죽기 직전까지 영창대군으로 세자를 교체하려는 의도를 내비쳤다. 하지만, 결국 선조는 광해군의 왕위계승을 인정하는 선위교서(임금이 자리를 물려주면서 내리는 교서)를 내린다. 당시 영창대군은 2살이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선조 사망 직후 영창대군을 보위하려던 영의정 유영경의 모략 때문에 선조의 선위교서를 받지 못해, 인목대비의 언문 교지로 겨우 왕위를 넘겨받은 처지가 되고 만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광해군. 그는 늘 불안정한 왕위를 걱정해야 했다. 왕위 계승자로서의 정통성의 결여 때문에, 또 그것을 물고 늘어지려는 세력들 때문에 늘 전전긍긍해야 했다. 결국 이러한 정통성의 불안은 무리한 왕권 강화에 대한 강박관념을 지니게 했고, 그 결과 대북파의 정치적 야욕에 휘둘리면서, 소위 ‘폐모살제(廢母殺弟)’의 패륜을 저지른 폐주로 역사에 남고 만다.

‘폐모살제’, ‘부모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다’는 이 살벌한 죄명은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그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비시킨 일을 가리킨다. 폭군 광해군의 근거가 되는 움직일 수 없는 빌미를 주고 만 것이다. 사실 ‘폐모살제’의 원조는 조선 3대 국왕인 태종 이방원이다. 그는 자신의 왕위를 위해, 태조의 뜻을 어기고 두 번이나 속칭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태조가 책봉한 이복형제인 세자와 그 아우, 조선의 설계자라 불리는 정도전과 개국공신들, 동복형제인 자기 형을 죽이고 왕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 후에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아들인 세종의 장인까지도 주살한다. 그런 그에 대해서는 성군 세종의 시대를 열기 위한 것이었다고 평가하는 조선 사대부들이 그의 후손인 광해군은 패륜으로 낙인찍고, 심지어 폐주로 만들어 왕조 말까지 한갓 광해군이란 명칭으로 남게 했다. 참으로 야속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광해군은 즉위 초, 자신의 왕위 등극을 직접적으로 엄호했던 대북파뿐만 아니라 서인과 남인, 즉 당파를 초월해 고르게 인재를 등용하면서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을 복구하고 대동법을 시행하는 등 많은 업적을 쌓았다. 광해군은 당쟁의 폐해를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이를 초월하여 탕평의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남인인 이원익(李元翼), 서인이었던 이항복(李恒福), 남인이었던 이덕형(李德馨) 등 명망 깊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실로 서인, 남인, 북인을 모두 아우르면서 어진 정치를 행하려 했다.

하지만 집권주도세력이지만 소수파였던, 이이첨과 정인홍 등이 주축인 ‘대북파’는 조선시대 언론을 담당한 기관인 삼사(三司-司憲府·司諫院·弘文館)에 포진해 있으면서, 취약한 왕권을 강화한다는 명목 아래 여러 가지 무리수를 둬가면서 서인 및 남인 등과 당파적으로 충돌한다.

이들은 광해군의 왕위에 대한 불안감과 콤플렉스를 자극해, 지속적으로 정적들을 숙청해 나갔는데, 맨 먼저 1608년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을 유배 보내 사사한다. 그리고 1612년(광해군 4)에 일어난 ‘김직재 옥사’로 선조의 손자인 진릉군(晋陵君)이 유배 후 사사되고, 김직재, 김백함 부자가 처형당했으며, 김제, 유열 등 1백여 명의 소북파 인사들이 대거 숙청당했다.

또한 1613년 ‘칠서의 옥’ 또는 ‘계축사화(癸丑士禍)’라 불리는 사건을 통해,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8세밖에 안 된 영창대군을 제거하고,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과 세 아들을 죽여 버리며, 이를 빌미로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여, 1618년 인목대비를 폐비시키고 서궁에 유폐시킨다. 이 사건으로 즉위 초기 폭넓게 기용하였던,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을 비롯한 서인, 남인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고, 대북파가 정권정국을 독점하게 된다. 이후에도 ‘신경희 옥사’를 통해 능창군마저 제거해버린다. 이 능창군은 나중에 반정의 왕으로 옹립된 능양군(인조)의 동생이다.

 

▲ 경운궁(덕수궁)의 편전인 석어당은 궁 내의 유일한 2층 건물로 임란 당시 선조가 피난으로부터 환도하여 승하할 때까지 16년간 거처한 곳이다. 1618년(광해군 10년)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폐위시켜 경운궁에 유폐시키고 경운궁을 서궁이라 낮춰 불렀다. 그러나 1623년 반정의 아침, 인목대비가 이 건물 앞마당에 광해군을 꿇어 앉혀 36죄목의 죄를 물어 폐위시킨 뒤 강화로 유배 보낸 장소이기도 하다.

대북파의 정적 제거를 위한 이러한 일련의 옥사들은 광해군을 ‘폐모살제’의 혼군(昏君)으로 몰아갔고, 이는 반정의 결정적 명분이 된다. 명에 대한 군사파병과 관련된 ‘재조지은’과 함께. 그러나 영창대군이나 능창군을 죽이는 일은 광해군의 재가 없이 이이첨과 그 수하들이 벌인 일들이었다. 인목대비만은 대북파의 지속적인 사사 요구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이 끝내 거부함에 따라 유폐로 마감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광해의 거부에 의해 목숨을 부지해 5년 동안 서궁에 유폐되었던 인목대비가 반정 직후 반정군의 대신·제장들이 달려가 인조의 왕위를 속히 결정할 것을 청하자, “먼저 이혼(李琿 - 광해군)의 부자의 머리를 가져와서 내가 직접 살점을 씹은 뒤에야 책명을 내리겠다.”고 일갈했다는 것이다.(《광해군 일기》, 계해년(1623년) 3월 13일자 내용 중).

뛰어난 왕재였던 광해를 끌어내린 것은, 그 왕재를 꽃피울 권력의 자리인 ‘왕위’의 불안감과 붕당(朋黨)의 시대였다. 


반정(反正), 조선을 치세로 되돌려 놓았을까?

반정(反正)이란, 왕이 실정(失政)했을 때 그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을 세우는 일을 말한다. 이때의 ‘반(反)’은 정통으로 돌아가는 것, 어긋난 정도(正道)를 회복한다는 뜻이다. 반정은 공자의 <춘추(春秋)>를 해석한 책인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나오는 ‘발난세반제정(撥亂世反諸正)’, 즉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바른 세상으로 되돌려 놓는다.’는 구절에서 비롯된 말이다. 왕조를 교체하는 것을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 하고, 왕조의 정통성은 유지하되 왕위만 교체하는 것을 반정이라 했다. 조선시대의 이러한 반정은 1455년(단종 3년)의 세조 반정(또는 세조찬위), 1506년(연산군 12년)의 중종반정과 1623년(광해군 15년)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반정이 있다. 

1623년(광해 15년) 3월 12일 3경(밤 11시~1시), ‘이서(李曙)’는 장단(長湍)에서, ‘이중로(李重老)’는 이천(伊川)에서 군사를 일으켜 홍제원(弘濟院)에서 ‘김류’의 군대와 합류한 반정군(反正軍)을 ‘능양군(綾陽君)’이 친히 거느리고, ‘이괄(李适)’을 대장으로 하여, 문무장사 2백여 명, 군사 1천여 명이 창의문(한양도성의 북소문, 자하문)으로 들어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밖에 도착하니, 궁궐방어를 맡았던 훈련도감 대장 이흥립(李興立)은 이미 반정군과 내통하여 이들을 맞이한다.

그러자 궁 내의 대신 및 재신(宰臣)들은 군대의 함성소리를 듣고 모두 흩어져 도망갔다. 인정전 서쪽 뜰에 반정군이 줄지어 시위하자, 궁 안의 시위 장졸은 모두 흩어졌다. 광해군은 북쪽 후원의 소나무숲 속으로 나아가 궁인들이 야간에 이용하는 사다리를 타고 궁성을 넘어갔는데, 젊은 내시가 업고 가고 궁인 한 사람이 앞에서 인도하여 사복시 개천가에 있는 의관 안국신(安國信)의 집에 숨었다. 광해군은 서인이 일으킨 반란임은 꿈에도 모르고, 정탐하러 갔던 국신의 처가 돌아오니 “혹시 이이첨이 한 짓이 아니던가.” 하였다. (<광해군일기>, 계해(1623년) 3월 12일 기사 요약)

반정은 성공했다. 앞서 인용한《연려실기술(燃藝室記述)》에 상세히 나오듯, 광해군과 왕세자는 폐서인 되어 귀양길에 오르고, 측근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 대신들은 여지없이 목이 잘린다. 40여 명이 참수당하고, 200여 명이 숙청당한다. 이제 정국은 서인의 세상이 되었다.

▲ 인조반정을 그린 부분은 아니지만, 반정의 밤도 이와 같았으리라. 사진은 영화 <광해>의 한 장면

다음으로 반정 이틀 후인 1623년(광해 15년) 3월 14일, 인목대비는 유폐되었던 경인궁의 석어당 앞마당에 광해군을 꿇어앉혀 폐위시키면서, 그 죄목을 일일이 지적하며 교지를 내린다. 그 죄목 중, 앞부분에는 예의 ‘폐모살제(廢母殺弟)’에 대한 죄과 등을 지적하고, 그 다음으로 이어진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죄에 대한 다음의 내용을 보면, 가히 명의 왕녀에 버금가는 사대의 극치를 보인다.

(전략) 우리나라가 중국을 섬겨온 지 2백여 년이 지났으니 의리에 있어서는 군신의 사이지만 은혜에 있어서는 부자의 사이와 같았고, 임진년에 나라를 다시 일으켜준 은혜는 영원토록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선왕께서 40년간 보위에 계시면서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시며 평생에 한 번도 서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으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광해는 은덕을 저버리고 천자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배반하는 마음을 품고 오랑캐와 화친하였다.

이리하여 기미년에 중국이 오랑캐를 정벌할 때 장수에게 사태를 관망하여 향배(向背)를 결정하라고 은밀히 지시하여 끝내 우리 군사 모두를 오랑캐에게 투항하게 하여 추악한 명성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온 중국 사신을 구속 수금하는 데 있어 감옥의 죄수들보다 더하였고, 황제가 칙서를 여러 번 내렸으나 군사를 보낼 생각을 하지 아니하여 예의의 나라인 우리 삼한(三韓)으로 하여금 이적 금수의 나라가 되는 것을 모면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가슴 아픈 일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천리(天理)를 멸절시키고 인륜을 막아 위로 중국 조정에 죄를 짓고 아래로 백성들에게 원한을 사고 있는데 이러한 죄악을 저지른 자가 어떻게 나라의 임금으로서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으며, 조종의 보위에 있으면서 종묘·사직의 신령을 받들 수 있겠는가. 이에 그를 폐위시키노라.(<광해군일기> 계해년 3월 14일 기사 발췌)

글의 내용 대부분은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죄악시하고 있다. 이는 반정 이후 정국을 주도할 서인집단의 시각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다가올 대전란의 서장이도 하다. “우리 군사 모두를 오랑캐에게 투항하게 하여 추악한 명성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였다.”는 대목은, 자기 백성들의 목숨에 대한 애정은 티끌도 없는, 소위 숭명사대(崇明事大)의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선조가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시며, 평생에 한 번도 서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으신 적이 없었다.”는 이 사대의 극치를 ‘천리(天理)’로 보고 있다. 이러한 인목대비의 정세판단은 서인을 중심으로 한 인조정권의 이정표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친명배금’의 기치를 내건 반정파의 짝사랑과는 달리, 명은 의외의 반응을 나타낸다. 1623년(인조 1년) 4월, 반정이 일어난 사실을 명 조정에 알리고, 인조의 즉위를 승인받기 위해 정사(正使) 이경전(李慶全)을 대표로 하는 사절단인 주청사(奏請使) 일행이 파견된다. 하지만 북경에 도착한 그들은 경악한다. 사신들을 면대한 명의 대표가 “광해군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 왜 명조에 알리지 않고 거사를 일으켰느냐?”고 힐문하고 다그쳤던 것이다.

당시 명 조정은 광해군의 등거리외교의 속내는 모른 채,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1618년 명의 원군요청에 부정적이었지만 결국 군대를 보냈던 것을 긍정적으로 본 것이다. 또한 그 이후에도 이어진 재지원군 파견 요청을 실제적으로는 거부하면서도 명의 힐책을 피하는 수완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조반정은 그들에게 충성스런 광해의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명은 당장 후금과의 대결관계에 있었으므로, 조선을 확실히 자기 편으로 하는 한편, 조선을 명과 후금과의 전쟁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실리를 택하여 인조의 즉위를 조건부로 승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서막이었다. 광해군이 그토록 막고자 했던 전란으로 조선을 밀어 넣게 된 것이다. 바로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이 그것이다.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고, 시대착오적인 친명반청정책은 또 다시 조선의 국토를 전장터로 내주고, 민중의 삶은 도탄에 빠트린다.

그로부터 13년 후인 1637년 1월 30일 혹한의 한겨울, 조선 제16대 국왕 인조는 아침 일찍 말을 타고, 왕세자와 시종·대신들과 남한산성 서문을 빠져나와, 당시 경기도 광주 송파 나룻가 ‘삼전도’로 향한다. 청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의 예를 갖추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이다.

삼전도에 도착한 인조는 청장 용골대의 명에 따라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절하는, 이른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한 번 절할 때마다 이마를 땅바닥에 세 번 부딪치기를 세 번 반복하는 것)를 행하며, 황제의 앞에 조아렸다. 역대 한반도의 군왕 중 가장 치욕적인 배례를 행한 것이다. 이어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는, 이른바 정축화약(丁丑和約)을 선언함으로써 45일간의 병자호란은 끝이 났다.

 

▲ 서울 잠실동 석촌호수 서호 언덕의 <삼전도비>. 1895년 이후 115년 만에 제자리를 찾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사진).

그 후 청나라는 수많은 백성들과 2만 5천의 조선 여인을 포로와 인질로 잡아갔으며, 소현세자, 봉림대군, 대표적인 척화파였던 3학사(윤집, 오달제, 홍익한)를 볼모로 끌고 갔다. 또한 삼전도 나루 입구에 소위 삼전도비(三田渡碑)라 불리는 거대한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를 세우게 하였다. 우리 민족으로서는 치욕적인 기념비가 아닐 수 없다.

동북아시아 국제정세의 격변기, 실리적 외교를 추구하여 보국안민하지 못하고, 쓰러져 가는 명에 대한 맹목적 중화사대와 유교적 명분론에 매몰된 몽매한 국왕과 서인권력 중심의 신하들에 의해, 조선은 제대로 싸움 한번 하지 못하고, 명의 재조지은의 굴레를 뒤집어썼다. 광해가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상황을 스스로 재촉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 세력은 이후에도 중화사대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명이 멸망해버린 이후에는 아예 자기들의 중화라는 소중화의 왕국을 세워나간다. 왕조 말까지 말이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이후 조선이 멸망 할 때까지 300년 가까이 ‘조선의 권력’이 된다. 서인당파는 후에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는데, 인맥과 정책으로 보면, 서인의 주류는 노론으로 이어진다. 또한 이 노론의 중심세력이 정조 이후 세도정치의 주역이 되며, 조선 말엽 100년 간 나라를 도탄에 빠트린다. 더욱이 이들은 나라를 팔아먹는데도 주역이 되어, 1910년 한일합방 시에 일제에 적극 협조한 공로로,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고 일제하의 귀족이 된다. 은사금을 챙긴 일제수작자 명부를 보면,  총 76인 중 당파별로 본다면 북인 2명, 소론 2명, 기타 12명, 나머지 56명은 모두 노론이다.

▲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제주의소리

이들은 일제가 물러나고, 해방 후 친일청산이 좌절되자 다시 득세한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친미파가 된다. 그리고 군부독재권력과 결탁, 현재까지도 한국사회의 도착적 보수우익의 핵심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은 장구한 초지일관의 전통이 있다는 것이다. 역사상 ‘한반도의 지도자’는 의미가 없는 ‘사대’의 오랜 전통을 지키고 있다는 것 말이다. 친명(숭명)사대-친일사대-친미사대로 이어지는 이 흐름은 다음 누가 와도 ‘(?)사대’가될 것이다. (계속)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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