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의 숨, 쉼] 당장 꽃이 피지 않는다고 해서...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아빠로서 자식들에게 보다 다양하고 넓은 세계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야 다 같지 않겠는가? 나의 절친 괸당도 절호의 기회가 있어 미국으로 열흘간의 가족여행을 떠났다. 아이들에게 보다 넓은 세계, 보다 다양한 문화 그리고 필요악인 영어에 대한 기대를 싸들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아방의 기대감과는 달리 아들은 기를 쓰고 체험해야할 영어 앞에서도 무덤덤,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이 나야 할 눈 역시 차만 타면 잠자는데 썼다고 하니 아방의 가슴은 무너져 내리다 못해 구멍이 파일 정도가 되었던 모양이다. 화산처럼 끓어오르는 화를 어찌어찌 누르고 나의 절친 괸당 아방 아들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는데
 “야, 이놈아, 너 도대체 앞으로 어떵 살젠 햄나?”
그제야 눈을 반짝이며 아들이 대답을 하더란다.(아들의 대답을 듣고 일시적으로 실어증에 걸렸다고 함.)
 “아버지 퇴직금 타면 그걸  빌려서 사업을 해서 돈 벌면 돼요.”
이 아들을 공부시키려 월급의 많은 부분을 학원비와 과외비로 투자하고 있는 터라 아방은 더더욱 기가 막혔을 터이다. 그는 설마 열네 살짜리 아들이 아방의 퇴직금을 노리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탄을 늘어놓았다.

 그 애길 들을 때는 ‘참, 요즈음 아이들’하고 혀 한번 끌끌 차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 전 학습지가 도대체 뭐하는 물건인지 모르고, 학원조차 자기하고는 상관없는 곳이라고 생각하며 행복한 초딩시절을 보냈던 우리 아들 입에서 나온 믿을 수없는 말을 한번 들어보시라.

 동네 누나에게 털어놓은 역시 열네 살 울 아들이 꿈이다.
  “건물 하나 지어서 세나 받아서 그냥 즐겁게 살고 싶어요.”
나 역시 너무 뜻밖이라 말문이 막혔다. 여기서 몇 가지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들어온다.
 
 첫 째 아방과 나는 물론 주위 사람을 샅샅이 수색(?)해보아도 건물주로서 세나 받아먹으며 사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일중독에 가까운 아방은 365일 가운데 300일 이상 부지런히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니 참 기가 막힐 노릇이다.

 두 번째로 드는 의문, 즐겁게?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즐겁게일까? 궁금하지 않은가?
나의 이런 의문들을 예의 동네 누나인 대학생이 나름 논리 정연한 분석으로 풀어주었다. 아들이 다니는 중학교에 사는 아이들 가운데 모 아파트 아이들이 많다는 것, 그 아이들의 부모들 중에는 실제로 건물을 몇 채씩 소유하고 있고, 세를 받아서 생활하며 여행도 가고,  보통사람들보다 풍요롭게 생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 자기 친구들 가운데도 몇 사람 있다는 것.

개인적으로 조금은 위로가 되었지만 문제는 이제부터가 아닌가? 구멍 뚫린 철학과 인문학의 자리가 휭 하니 보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은근히 아들에게 떠 보니 아들은 그냥 별 생각 없었다며 머리를 긁적이더니만 더 추궁(?)을 하니 자기는 부자로 살 거란다. 그러고 보니 가닥이 잡힌다. 평소 자주 차를 마시는 나의 차탁에는 미야자와 겐지의 <비에도 지지 않고> 라는 시가 붙여져 있다. 그런데 언젠가 아들이 이 시를(읊지 않고) 휙 훑더니만 몇 행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다. (이 사건은 내 정신세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원문 …들판의 솔숲 그늘/ 삼간초가에 살며/ 동쪽에 병든 아이 있으면/ 가서 간병해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면/ 가서 그 볏단을 져 주고…

바꿈 …큰 도시의 큰 집에 살면서/ 아픈 사람 있으면 얼른 병원에 보내주고/ 힘없는 늙은 사람에게는 도우미를 보내주면 되고…

 왜 가난하게 살면서 위로만 해 주냐는 거다. 자기는 돈 많이 벌어 부자로 살 거란다. 아들은 어찌 보면 부자가 된 뒤에 어떻게 돈을 써야할지 나름의 철학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아들에게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하며 어떻게 쓰면서 사는 것이 즐겁게 사는 것인지를 가르쳐 주어야할 때가 된 것이다.

 얼마 뒤 아들과 나는 나란히 달빛을 받으며 걸어서 동네 서점에 갔다. 가서 소화력 잘 갖춘 인문고전 몇 권을 사 품에 안고 돌아왔다.

 요즘은 낯설게만 느껴지는 인문학이지만 한때 우리는 지식인의 장식품처럼 인문학 책을 가슴에 품고 다닌 적이 있었다. 스무 살 시절에 그걸 읽고 이해했는지 안 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은 내 삶의 뿌리였다. 정체모를 것들에 걸려 넘어졌을 때 눈물을 쓱 닦고 일어서 다시 살게 했을 뿐만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난 상처들을 덧나지 않게 잘 아물리고, 영혼의 뼈와 살을 더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준 것은 인문학의 힘이었다고 믿는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면서 살아내는 우리의 삶이 실상은 그렇게 보일 뿐이다. 세속적 차원에서 본다면야 분명히 드러나겠지만 우주적 차원에서 본다면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것이 실패인지 성공인지.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내 나름의 기준은 '뿌리가 얼마나 튼실한가'다. 그것은 존재감을 느끼는 기준이기도 하다.

 모두가 다 그러기야 할까마는 그런 점에서 본다면 지금 아이들의 꿈은 마치 행사용 화분에 심어진 꽃이나 나무 같다. 행사용 꽃이나 화분에서는 비바람을 이겨내며 살아낸 것들끼리만 느낄 수 있는 교감 같은 게 없다. 살아있는 것들에게서 느껴지는 경이로움도 없다. 산다는 것은 매 순간 가슴이 뛰어야 하는 일이므로.

  바깥의 나무들이 비바람에 휘청거리면서도 쉽게 꺾이지 않는 것은 우리가 볼 수 있는 나무의 키보다 뿌리가 훨씬 더 땅속 깊숙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다.

 그런데 그것도 옛말이고 요즈음은 뿌리보다 몇 배는 키가 크고 잎사귀에 윤기가 잘잘 흐르는 나무들도 많다. 어디에? 꽃집에 그리고 각종 행사장에……그 나무와 꽃들은 뿌리가 약하기에 수시로 온갖 약물을 투여해 주어야한다. 마치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일부 젊은이들 같지 않은가? 하다못해 환상이 깨질까 두려워 환각제까지 달고 살아야 버틸 수 있는 삶이 그들의 삶이다.

 기초 인문학(?)인 자장자장, 곤지곤지, 도리도리(천지만물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가 담겨 있다고 함)를 열심히 하고 자란 우리 아들도 휘청거리게 하는 세상이 요즈음 세상이다. 어느 시대보다도 우리 아이들을 유혹하는 화려한 꽃과 나비들이 많다.

소중한 나의 분신들이 화려한 행사장에서 쓰이다 버려지는 삶으로 살게 하고 싶지 않다면 빨리 화려한 꽃을 피우라고 윽박지르는 일은 이제 그만 멈추면 좋겠다. 그리고 천천히 내 아이의 뿌리를 살펴볼 일이다.

내 아이의 방황과 일탈을 방관해서도 안 되지만 너무 빨리 속단 하지도 말자. 어쩌면 그놈도 기를 쓰고 뿌리를 내리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므로.

어느 시인의 말처럼 지금 당장 꽃이 아니라고 슬퍼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언젠가 피울 내 아이만의 꽃을 믿고 지켜봐주고 응원해주는 일이 필요하다. 지금! /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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