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몰라요", "왜요" 가만 두고 볼 일 아니다
사춘기 "몰라요", "왜요" 가만 두고 볼 일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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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섬의 숨, 쉼] 폭풍 같은 청소년 인문학 부흥을 꿈꾸며


가까이는 나랑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청소년부터 멀리로 내 생업의 터전인 학교를 오가며 지켜본 청소년까지 , 몰아 잡아 요즘의 청소년들을 보면 나는  이 두개의 문장으로 이들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 몰 라 요 "
" 왜 요 "


올 봄의 일이다.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우리 집에 기거하는 기달왕자님이 수학여행을 간다는 것 같은데 정작 본인으로부터는 아무 정보를 얻지 못했다. 언제 가는지... 수학여행비는 얼마인지... 어디로 가는지 궁금한 내가 재차 물을 때마다 기달왕자님의 역시 일관성 있는 대답은 "몰라요"였다.

그러던 어느 날 수학여행 일정을 홈페이지에서 검색해보면 된다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며 위풍당당한 기달왕자님을 난 꼬옥  안아주고 감격에 겨워 말했었다." 장하다 내 아들!"

그런데 며칠 전 내가 만난 어떤 중학교 선생님에게 이런 "몰라요" 현상을 하소연했더니 더 기막힌 경우를 말씀해주셨다.

담임을 맡고 있는 학생과 상담할 일이 있어 이 것 저 것 물어봐도 한결같이 "몰라요" 하더란다.

그래서 같은 톤으로 질문하다 기습적으로 "야, 너 이름 뭐냐?"라고 물어봤는데 역시 대답은 같은 톤의 " 몰라요"였다며 허탈해 하셨다.

이쯤 되면 "몰라요"라는 대답은 정말 모른다는 원래의 의미 외에도 생각하고 싶지 않음, 나랑은 상관없는 일임 , 지금 말하고 싶지 않음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진 새로운 사회적 언어로 정의 내려야 될 것 같은 상황이다. 아니면 습관적이지만 무의미한 대응 언어 혹 추임새 정도로 이해해야 하는 건가?

그 후로도 가끔 내가 청소년 들을 가까이하는 분들을 만날 때 마다 '몰라요' 현상에 대한 의견을 구했더니 모두들 한숨을 쉬시며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해주셨는데, 그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도대체 이 아이들이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쉬지 않고 머리를 맴돌게 되었다. 가령 오늘 학교는 늦지 않았니? 숙제는 다 했니? 같은 질문도 "몰라요"라고 한다면, 도대체 누가 알 것인가? 그 아이의 '몰라요' 일상을.

또 하나, "몰라요" 못지 않게 잘 쓰는 말이 "왜요"다.

어느 교장선생님이 전해주시는 일화 하나.

아이들이 뛰노는 운동장에 쓰레기들이 나풀나풀 춤 추고 있었단다. 그래서 '내가 먼저 이 쓰레기들을 치우면 아이들도 따라하겠지...'라는 흐뭇한 상상을 하며 기꺼운 마음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런데 일분이 지나고 오 분이 지나고 십 분이 지나도 엄마 닭 쫒는 병아리처럼 뿅뿅뿅 달라붙어야 할 어린 병아리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기다리다 못해 지나가는 병아리 붙잡고 부드러운 소리로 말을 걸었다.

" 자.. 이 쓰레기 나랑 치울래?"
그런데 이어 들려오는 대답에 교장선생님은 하루 종일 우울했다고 한다.
그 대답은 "왜요" 였다.

말하자면, 우리 생각으로는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알아야하는 기본 인성들이 아이들에게는 "왜요?"라는 질문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관계하며 살아가는 사회에서 필요한 배려 봉사 양보 질서 같은 기본 덕목들이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의 대상이 된 것이다.

왜 이럴까를 부족한 머리 쥐어뜯으며 고민한 결과 내 나름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 결론을 내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이는 역시 기달왕자님이시다.

즉 요즘의 청소년들은 정말로 모르고 정말로 왜 그러해야하는지가 궁금한 것이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알고도 모르는 척, 혹은 소심한 저항으로 들리는 그 많은 "몰라요", "왜요'가 이들에겐 진정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기달왕자님과 나의 갈등 사례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음을 고백하겠다)  그리고 그 저변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요즘 청소년들은 가상의 세계엔 열광하지만 정작 실체의 삶은 덜 진중하게 생각 한다는 것이다.

'몰라요', '왜요' 현상에 대한 원인은 사회구조의 변화, 시대적 배경 등등 여러 가지에서 찾아볼 수 있겠지만 그 연구의 몫은 사회학자들의 몫일 것이다.  다만 인문학을 공부하고 사랑하는 나의 입장에서 , 또 청소년을 키우는 엄마의 입장에서 '몰라요', '왜요'를 해결할 방법은 폭풍 같은 청소년 인문학 부흥임을 소리 높여 외치고 싶다.

내가 성장하던 때에는 누구나 알고, 동의하는 얘기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것은 삶의 기본적인 덕목으로 내면화 되었다. 이렇게 내면화된 이야기들의 반복 학습을 통해 아이들은 실천 여부와 상관없이 어떤 것이 옳고 어떤 행동은 옳지 않음을 알아나갔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많은 책을 보고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것은 조금 자랑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난 절반은 진심으로 절반은 폼(^ ^)으로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끼고 다녔다. 데미안에 나오는 "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삭스라 한다" 라는 구절은 폼 재기 딱 좋은 구절이었다. 뭔가 있어 보이고 어려워 보이고...

하지만  폼만은 아니었다. 가끔 삶이 힘들 때 그 알을 깨고 나온 새는 분명히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요즘 청소년들은 내가 자라던 그때와는 다른 것 같다 그래서 이 아이들에게 데미안 얘기를 하면 이게 어느 나라 언어냐며 내 얼굴을 쳐다 볼 것만 같다.(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이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왜 이려냐며 힐난하는 대신 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알려주고 싶다. 너희들이 말하는 "몰라요", "왜요" 에 대한 정답들이 다 인문학 속에 있음을. 다만 그 정답들이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숨은 그림 찾기처럼 되어있어 조금 수고로움을 더 해야 발견할 수 있음도 알려주고 싶다. 

처음 출발은 힘들 수도 있지만 가다보면 가속도가 붙어 인문학도 재미가 있고 즐거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그 끝에는 그렇게도 아이들이 갈망하는 '즐겁고 행복한 삶'에 대한 정답이 있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은 덤으로 얻을 수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사실 이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리고 나는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이 뜻에 공감하는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 힘을 모아 폭풍 같은 청소년 인문학 부흥운동을 벌였으면 좋겠다.

며칠 전 중문고등학교에서 인문학 수업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참 즐거웠는데 마음 한구석으로는  14살 어린나이에 몸을 던진 꽃 한 송이 때문에 가슴 아팠다. 혹시 그 꽃 한 송이에게 자신을 사랑하는 인문학의 에너지를 던져주었다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안했을지도 모른다는 소용없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 바람섬(홍경희). ⓒ제주의소리

깊어가는 가을, 순식간에 쌀쌀해진 날씨에 옷깃을 여미며 종종 걸음을 걷다가도 문득 멈추어 생각한다. 정말 이젠 필요한데... 미룰 수 없는 일인데.....어찌해야 할까, 폭풍 같은 청소년 인문학 부흥운동.  

<제주의소리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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