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돈 칼럼] 강정구 교수 사건을 보며

   
6. 25를 소재로 강원도의 한 오지 마을 ‘동막골’에서 펼쳐지는 동화 같은 이야기 '웰컴 투 동막골'이 관객 800만을 넘어섰다. 대략 남한 전체 인구에서 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이 이 영화를 보았다는 계산이다.

전투 중 본대에서 낙오된 인민군과 국군, 그리고 포격을 받아 추락한 미군 조종사가 바깥세상과는 철저히 격리되어 전쟁이 일어난 줄도 모른 채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던 낙원 ‘동막골’에 모여든다. 이들의 조우는 위태롭고 살벌하다. 그들의 눈에는 적의와 살기로 가득하고, 일촉즉발의 긴장과 위기감 속에 불안한 동거가 계속된다.

그러나 어린이처럼 맑은 감성으로 천진난만하게 살아가는 동막골 사람들에게 감화를 받고, 같이 농사일을 거들며 그들은 차츰 서로의 이질감과 적대감을 극복하고 본래의 선성을 회복해 간다. 연합군의 공격 소식을 접한 이들은 급기야 한데 뭉쳐 연합군에 대항해 싸우고, 동막골의 평화를 지켜낸다.

   
대립도 미움도 상쟁도 없는 이상적인 꿈의 공간, 동막골의 평화를 위해 국군과 인민군이 친구가 되어 공동의 적인 연합군을 상대로 싸운다는 플롯의 설정에 친북 좌파적인 영화라고 낙인을 찍은 것은 일부 수구 인사들과 언론들 뿐, 800만이 넘는 사람들은 그저 스스럼없이 영화의 재미에 빠져들었다.

이 사람들에게 남과 북은 더 이상 적이 될 수 없으며, 언젠가는 사이좋은 친구로 살아야 할 상대이다. 누대에 걸쳐 민족의 심성 깊은 곳에 아로새겨진 정서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것이다. 그까짓 이념이 다 무엇이든가. 이들에게 사회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체제 이념은 얼마나 창백하고 허무맹랑한 것인가.

이념의 상극은 ‘분열시키고 지배하라’는 외세의 음험한 책략 속에서 빚어졌다. 반세기 이상이나 지속된 그 상극의 골은 깊어 이 아름다운 강토를 붉은 피로 물들였다. 외세의 간섭으로 분단되기 이전엔 동막골의 사람들처럼 본래는 우리는 다 순박하고 착한 이웃들이었다. 공동체의 평화와 안녕을 위협하는 외부 세력에 대해선 공동의 전선으로 연대해 물리치려고 했다. 판타지로 채색된 영화는 화해와 상생이라는 민족 공동의 염원을 담고 있기에 그만큼 더 절실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한국영화의 야사에 코미디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반공영화의 주인공들 가운데 북쪽 사람은 최대한 사악하고 흉측한 캐릭터로 묘사되어야 하는데, 어느 영화에선가 ‘북괴’ 간첩으로 캐스팅된 인물이 너무 선하고 잘 생겼다고 해 사전 검열에서 잘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보수우익 인사들이 볼 때 명백히 북을 ‘고무 찬양’한 이 영화는 무삭제 필름으로 전국 상영관에 배포되었고, 엄청난 관객이 주인공들의 갈등과 대립, 화해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키며 스크린에 흠뻑 매료되었다.

   
6. 25를 ‘북한이 시도한 통일내전’이라 한 사회학자 강정구 교수의 주장을 놓고 반시대적인 색깔 논쟁이 재연되고 있다. “만경대 정신을 노래한 강정구는 평양에 가서 살라”고 하며 악담에 가까운 막말을 토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인간에 가할 수 있는 가장 저열한 인신공격이고 언어폭력이다. 북한을 ‘고무 찬양’했으므로 국가보안법을 걸어 구속수사 해야 한다고 법석을 떤다.

역사의 무덤에 벌써 매장했어야 마땅할 냉전 수구이데올로기가 시퍼렇게 되살아나 건강한 학문적 토론의 장을 말살하고 있다. 논지 전개의 논리적 정합성을 따져 묻는 이성의 밝은 눈은 찾아볼 수 없고, 핏발 선 눈으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다른 사람에게 붉은 색깔을 칠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강 교수가 정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국가 정체성을 위협하고 있는가. 우리 헌법 첫줄에는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민주공화국, 즉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대한민국의 정체를 규정한다. 자유민주주의는 사상과 양심,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치 체제이다. 그렇다면 정작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위태롭게 하는 자들은 사람의 머리 속에 든 관념과 사상, 가슴 속에 든 양심을 재단하려는 악법에 기대어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말할 국민의 고유한 권리를 박탈하려는 그들 자신이다.

   
북한은 더 이상 우리의 적이 아니라 친구가 될 수 있음을 영화 ‘동막골’은 보여주고 있다. 강 교수가 북한을 ‘고무 찬양’하여 법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 반국가단체이자 적인 인민군을 미화하고 고무 찬양한 이 영화의 제작자와 감독은 물론 내용에 공감한 관객들도 모두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이 시대의 진보와 보수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헤겔이 말하지 않았든가. 인류의 역사는 자유의식의 진보의 역사라고. 진보는 시대의 변화를 적극 인정하고, 인간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의식의 확대를 실천하려 한다. 이에 반해 보수는 현실에 안주하여 기존의 가치를 옹호하려는 입장이다. 수구는 보수에서 한 발 더 과거로 퇴행하여 시대의 변화를 부정할 뿐 아니라 낡고 오래된 가치를 고수하려는 입장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보수는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의 차이를 수용하고 존중한다. 그러나 사이비 보수와 수구는 나와 생각이 다르면 무조건 적대시 하고 억압해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려 한다.

문명사는 탈냉전과 탈이데올로기의 방향으로 도도하게 전개되고 있다. 전후 세계를 양분했던 극한적인 체제 ‧ 이념의 대립은 무너지고, 상호 공존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역사의 물줄기를 역류시키려는 움직임은 문명을 거부하는 야만의 몸부림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보이는 수구기득권자들의 집단히스테리적 징후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이들은 분단 상태의 영구적인 고착화로 인해 야기되는 남북한 긴장과 대립이 화해와 공존, 종국에는 통일로 향한 길보다 잃을 것이 훨씬 더 적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통일은 존재 기반의 완전한 상실로 비춰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분단을 악용한 독재정권과의 유착을 빼놓고는 그들이 지금까지 누려온 부와 권력의 형성 배경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북한에 대한 남한의 모든 협력과 지원을 ‘친북 좌파의 소행’으로 헐뜯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풍에게 진보를 묻다’라는 ‘세설’에서 김선우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초가을 단풍이 내게 던져준 것은 뜻밖에 진보라는 말이었다. 진보란, 공생하는 법을 향한 지극한 마음씀일 터. 자신의 보색을 기꺼이 수용한 단풍의 미감 같은 것.....한결 이윽해졌을 단풍을 놀러 길 나설 채비를 하는 차에 슬픈 소식을 들었다. 한국전쟁에 대한 한 사회학자의 학문적 견해에 대해 결국 사법처리가 진행된다는 소식이다. 죄명은 국가보안법이란다. 세상에, 국가보안법이라니! 강원도 산골의 고즈넉한 절집에서 '웰컴 투 동막골'을 보던 주민들이 떠오른다. “근데 있잖어. 쟈들하고 친구나?” 미소를 번지게 하던 그 대사의 주인공들인 북한군과 남한군이 정말로 친구가 되는 그 영화를 800만이 넘는 남한 관객이 보았다고 하지 않는가. ( 10월 21일자 한겨레신문)

▲ 김현돈 편집위원. 제주대 교수
누가 ‘동막골’의 평화를 거부하는가?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말할 텐가. 예술은 허구이지만 예술의 진정성은 동시대 사람들의 꿈과 이상을 정직하게 반영하는 데 있다. ‘동막골’은 2005년 한국 영화가 보여준 허구적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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