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멍 보멍 들으멍](23) 백 사람에게 베풀 할망 사주…그 손은 약손 / 정신지

*이 글은 11월3일 자에 실린 ‘꼬깃꼬깃 담뱃갑 속에 묻어뒀던 노부부의 삶은…’에 이은 두 번째 글입니다.

 

▲ 올해 나이 여든넷. 백 사람에게 베푸는 사주를 타고났지만, 아직 하나도 베풀지를 못했다는 할망.  할망은 여든넷의 나이에도 정치얘기를 하실만큼 사회에 눈이 밝다. 할망은 곧 있을 대통령 선거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다가“들러먹젠만 허곡 졸바로 베푸는 대통령이 어서”(훔쳐 먹으려고만 하고 제대로 베푸는 대통령이 없어)라고 일침을 놓으셨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한 번 가면 나그네, 두 번 가면 손님인가보다. 얼마 전에 만난 약초 캐는 노부부 생각이나 다시 한 번 그들을 찾았다. 저녁 식사 중이던 할망이 반갑게 문을 열어 나를 맞아주신다. 또 찾아와 주어 반갑다 웃으시며, 들어와 밥이라도 먹고 가라 손짓하신다.

키 작은 밥상 위의 고등어조림에서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난다. 반찬은 한 가지이지만 따뜻한 쌀밥을 후후 불어가며 맛있게 잡수시는 할망과 하르방. 그 사이에 끼어 한 숟가락 먹고 싶은 마음 간절했지만, 입맛이 없다. 웬만하면 먹겠는데, 도저히 그게 안 된다. 같이 먹자며 할망이 그릇도 꺼내오셨건만, 방금 먹고 왔다고 거짓말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런 것이 며칠째 나는 겨울을 맞이하기 위한 신고식을 단단히 치르고 있다. 가을철 전염병으로 알려진 ‘쯔쯔가무시증’에 걸려버린 것이다. 콩 타작을 한 것도 아니고, 귤을 따러 다니는 것도 아닌데, 며칠 시름시름 앓다가 병원에 가니 쯔쯔가무시증이란다. (*쯔쯔가무시증: 들판의 쥐, 족제비 등의 털진드기가 사람 몸에 옮겨 붙으면서 발병. 감기몸살증세와 비슷하나 감기약으로는 턱도 없으니, 고열과 두통 등이 지속되면 당장 병원행이다. 가을철 제주에서 야외활동을 하는 분들은 각별히 주의하시길.)

이름조차 생소한 병에 걸려 두통으로 엎치락뒤치락 하며 종일 누워있기를 일주일. 할망 하르방들이 경험해 온 것에 비교하면 정말 별것 아닌 아픔일 테지만, 누구나 아프면 서러워지는 법이다. 지금껏 만나 온 할망 하르방 생각에 멍하니 혼자 센티멘털해 진다. 그래서 정신이 멀쩡해졌을 때 즈음 자리를 털고 일어나 무턱대고 찾아간 곳이 약초 할망댁.
 
본의 아니게 할망의 맛있는 고등어조림은 못 먹었지만, 할망과 이불 밑에 다리를 넣고 귤을 까먹으며 옛날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몸과 마음에 금세 기운이 돈다. 할망 손은 약손이라 하지 않는가.

 

▲ 할망이 약초를 캘 때 가지고 나가는 도구. 이제 다리가 아파서 먼 산으로는 다니지 못하신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어, 할머니 머리 파마하셨네? 잘도 고운신게(정말 예쁘시네).”
“얼마 전에 행 왔쪄(하고 왔어). 고와(예뻐)? 만 칠천 원이나 준거라!”
“에이, 할아버지. 또 담배 태우셤수과(태우셔요)? 하루에 몇 개씩 피우시멘 마씨(피우시는 거에요)?”
“심심허난 게(심심해서 말이야). 하루에 한 갑밖에 안 태운다.”

말이 없어도 너무 없던 노부부와의 첫 만남이 인상적이었던 내게, 두 번째 만남은 달랐다. 담배를 태우던 하르방도 내게 곧잘 말을 하시고, 할망의 웃는 모습도 전과는 사뭇 다르다. 몸이 편찮으신 하르방이 담배를 다 태우시고는 그대로 이부자리에 드신다. 그런 하르방을 보며 할망은 말한다. “저 하르방은 걱정이 어신(없는) 하르방이라. 사주가 경(그렇게) 타고 나서. 집에 쌀이 이신지(있는지), 돈이 이신지 아무것도 몰랑(모르고) 여든 넘게 살았주. 나만 곱곱해서(답답했어). 나는 백 사람신디(에게) 베풀멍(베풀면서) 살라는 사주랜 허는디(사주라는데), 어이고 원. 아무신디도(아무에게도) 줄 것이 어서게(없어).”

커피를 마시며 할망과 수다를 떤다. 그러다가, 곧 있을 대통령 선거에 관해 할망이 먼저 말씀을 꺼내셨다.
“어떵(어찌 된 게) 졸바른(올바른) 사람이 하나도 어서(없어). 대통령 뽑아 노민(놓으면) 국민 꺼 들러 먹을 생각만 허고(국민 것 훔쳐 먹을 생각만 하고). 지금 대통령도 보라게(봐봐). 잘 허켄(잘 하겠다고) 맹세 받앙(받아서) 뽑아 노난(놓으니), 우리 돈들만 몬딱 뽈아당(전부 가져다가) 이녁만(자기만) 행복시럽게 살고. 국민신디 보탬이랑마랑(보탬은커녕)….”

갑작스러운 할망의 정치토크에 신이 난 나는, “할머니를 정치판으로!”라고 장난을 치며, 그녀가 정말 정치를 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준비라도 되어 있는 듯 대범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 설탕을 많이 넣어 이가 모두 녹을 것만 같은 그녀의 특제 커피. 마시고 있자면 이내 중독이 된다. 잊을 수 없는 그 맛!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부락에도 봐라이(봐라). 정치에 뜻을 세왕이네(세워서) 부락을 운영허젠 허민(운영하려 하면), 모든 것을 분명하게 정리를 해사주(해야지). 돈도, 이걸 어디다 쓰는지 확실히 밝혀야지. 경(그렇게) 하지도 않고 뭐시영 고르민(뭐라고 말을 하면)…. 경 행(그렇게 해서) 분명하게라도 고라지민(말을 하면) 좋은디, 잘 곧지도 못허여게(말하지도 못해). 이장이민(이장이면) 이장이, 전에 사람 하던 것을 잘 물려 받앙(받아서) 책임을 져사주(져야지). 요즘 시국에 놈(남) 살려줄 사람이 어디 이서(어디 있어)? 도지사도 대통령도 이녁만 잘 살아보젠 게. 영 행 바라보민(이렇게 보면), 다 이녁 욕심이여(모두 자기 욕심이야). 큰 사람으로 나시민(낳았으면), 요거만치라도(이만큼이라도) 사람을 속이민(속이면) 안 되지. 나댕기지 않고(나다니지 않고) 조용히 사는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하니까. 사람들이 점점 박허여(야박해져).”

그러면서 그녀는 말했다. 옛날엔 ‘없이’ 살았지만 ‘고치(같이)’ 살았다고. 이래저래 옛이야기를 하다 보니, 따스한 아랫목에 4.3사건의 기억이 불쑥 하고 찾아든다. 서른이 넘어 이 마을로 시집을 오셨다던 할망은, 지난번 내게 아무런 연유도 말씀해 주지 않으셨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으셨겠지 했거늘. 나그네가 아닌 손님이 되어 찾아온 나에게, 그녀는 조심스레 쌓아둔 기억의 보따리들을 하나씩 풀어놓으신다.

제주시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스물에 시집을 갔었다. 하지만 4.3사건이 터진 다음 해에 남편을 잃었다. 그 후 십여 년을 힘들게 살았으나, 살길이 막막해져서 이 마을로 다시 시집을 오신 거라고. 하지만 시에서 살던 그녀에게 산골 마을의 사람과 삶은 너무나도 거칠기만 했다. 인연이 있어 오긴 온 것이라 말씀하시지만, ‘나가 이디 잘못 와젼(내가 여기 잘못 왔어).’ 을 되풀이하시는 할망은 쌓인 한이 참 많아 보인다.

결혼 초 그녀는 모진 생활을 견디다 못해 시집생활을 관두고 친정으로 내려가려고 결심했다. 하지만 여기서 부터 드라마다. 그녀가 집을 나가겠다고 하자, 하르방이 ‘아니 살앙 가켄허믄 나 죽어불켜(시집 안 살고 가겠다고 하면 나 죽어버릴거야)’ 선언을 하신 것이다. 외골수에 말수도 적은 하르방이 죽어버리겠다고 하자, 시어머니도 난리가 났다. 아들 죽는다고 제발 가질랑(가지는) 말라며 그녀를 붙잡았다. 그녀 역시, ‘살인자 될까 무서워’ 돌아갈 결심을 꺾었다고.
“‘어떵(어떻게) 세상을 살지?’ 허멍(하면서) 기가 막혔지만, ‘아이고’ 허멍 마음을 뜬거라(접은 거야)”라고 그녀는 말한다.

 

▲ 한 번 가면 나그네이지만, 두 번 째 그녀를 찾은 나는 손님이 되어있었다. 반겨주시고, 배웅도 해주시는 할망의 모습이 짠하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할망은 막둥이로 태어났다. 부모도 형제도 일찍이 돌아가시고, 자식도 네 명이나 먼저 세상을 떠났다. 다음 세상에 가면 만날 사람도 많다. 하지만 할망은 천국도 지옥도 없다고 하신다. 가끔가다 꿈에 먼저 간 사람들이 나올 적이 있는데, 그때엔 항상 살아생전에 입던 옷을 입고 나온다고. 그러니 사람은 죽어서 다시 태어나도 분명 살던 대로 또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전생도 후생도 없다.

…세상에 올바르게 산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남의 것 하나도 안 해다 먹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란다. 길가다가 배고프면 남의 밭 고구마라도 하나 씹어 먹는 수가 있고, 어려우면 자연히 그러는 것이 인간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거다. “낼사(내일에야) 죽어질지 모르지만, 현재에 남의 것 얻어먹기나 하고, 줄 것이 어성으네 헌 것(베풀 것이 없어서 하는 것). 그것이 근심이라. 얻기만 하고 줄 것이 없는 것.”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원체 어려운 일이란다….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며, 말씀하는 내내 그녀는 몇 번이고 내게 미안해했다. 하지만 할망의 말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을 베풀고 있지 않은가? 백 사람에게 베풀며 사는 사주를 타고났다는 그녀는, 정말 그렇게 살고 있다. 단지 그녀 자신만 그 사실을 모를 뿐. 세상 모든 할머니의 손은 약손이라지만, 약초를 캐며 살아온 여든넷 할망의 손은 그 약이 백배로 쓰고, 분명 백배로 듣는다. 그러니 나는 이제 싹 다 나았다.<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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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지는 ?

   

이 여자, 택시 기사들과 대화 나누길 즐기는 ‘수다쟁이’다. ‘역마살’도 단단히 타고났다. 거기에다 ‘촌스러움’까지 좋아하는 독특하고 야무진 여자다. 그녀의 이름은 정신지(32). 파주·부산 출신의 부모님 아래 서울서 태어나 여섯 살에 제주로 이민(?) 왔지만 스무살에 다시 서울로 나갔다가 일본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지역연구학’이라는 인문학을 전공했다. 그동안 세계 17개국의 섬·지방·대도시를 떠돌며 사람과 집단, 그 사회에 대한 이해를 넓혀왔다. 지난 봄, 일본의 국립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에서 문학박사 과정도 수료했다. 이제 12년간의 지구촌 유목 생활을 마치고, 태어난 곳은 아니되, 자신을 성숙하게 키워준 ‘진짜 고향’ 제주로 지난 봄 돌아와 부모님이 살고 있는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에 짐을 풀었다.  매주 한차례 <제주의소리>를 통해 제주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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