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멍 보멍 들으멍](24) 못 다한 이야기, 끝나지 않은 아픔 / 정신지

 

▲ 길을 걷다 우연히 만난 사진들. 4.3의 아픔을 직접 체험한 세대들이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아픔은 경험이다. 그것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몸과 마음의 고통, 그 밖의 증세들로 아파하는 것의 경험이다. 그리고 그 경험들은 늘, 우리의 시대와 생활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아픔의 경험을 알아 가는 것일까?

의사에게 듣는 병의 이야기는 그 해답의 중요한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가족이나 친구, 혹은 커뮤니티와 ‘아프다’는 말을 공유하고, 혹은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파고들어 이야기를 나누며 그 속에서 서서히 병의 경험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어디가 아픈가, 어떤 병인가, 어떻게 병에 걸렸나, 어떤 치료를 하고 있는가.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자신과 타인의 이야기를 ‘주고받음’을 통해 이루어지고, 그리하여 우리는 서서히 아픔의 의미를 알아간다. 그렇게 아프고 치료하며 사람들은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다.
 
얼마 전, 제주에서 첫 상영회가 있었던 오멸감독의 영화 ‘지슬’을 보았다. 4.3사건을 다룬 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아팠다. ‘걸으멍, 보멍, 들으멍’을 연재하며 만나 온 할망 하르방의 목소리가 화면 속의 이야기들과 겹치며 마음이 아팠고, 무언가를 이해하려 애쓰고 있는 머리가 아팠다. 아마도, 영화를 보았던 모든 이들도 각각의 아픔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렇게 오멸감독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4.3사건이라는 아픔을 다시금 경험한다. 영화가 끝나고 막막한 마음으로 택시에 탔는데, 타자마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기사님이 내게 물으셨다.
“이 시간에 무슨 영화 합디까?”
“예. ‘지슬’이라고, 4.3사건에 관한 영화마씨(영화에요).”
“아, 그런 영화가 있수과(있어요)? 지슬이렌허민(지슬이라면), 감자 아니꽈(아닙니까)?”

그렇게 택시 안의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올해 51세라는 기사님은 당신이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주변인들이 겪어온 4.3에 관한 짧고 굵은 이야기들을 하시며 천천히 길을 달렸다. 그러다가 그가 말했다.
“내가 가장 아쉬운 게 뭐냐면, 4.3사건으로 웃어른들이 돌아가시고, 4.3때 집이 불에 타멍(타면서) 족보도 다 어서졌덴 해부난(없어졌다고 하니), 내가 누군지를 진짜로 알 길이 없다는 거. 그러다 보니, 내 가족이 어떵 행(어떻게 해서) 오늘까정(오늘까지) 이 땅에 살아졈신지(살게 됐는지) 그 역사를 확실히 모르는 거 마씨. 어머니도 나신디는(나에게는) 잘 곧젠 안 허시고(잘 말씀하지 않으시고). 겐디(그런데), 어르신들이 4.3에 관해서 곧는(말하는) 말씀들을 들어보민(들어보면), 진짜 아픈 건…(잠시 침묵)…, 허이고. 그냥 아픈거주마씨(아픈거죠). 니꺼 나꺼 있수과게(네 것 내 것 있습니까)? 아픈 거사 아픈 거주(아픈 것이야 아픈 것이죠).”

기사님 말이 정답이다. 아픈 건 그냥 누구에게나 아픈 것. 나 역시 할망 하르방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의 목소리들을 글로 옮겨왔지만, 적힌 것은 늘 빙산의 일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제 강점기를 겪고, 4.3사건을 겪고, 전쟁을 경험해 오신 어르신들의 경험담을 나누어 들으며, 나는 상실과 고통 속에서도 희망과 따스함이 묻어나는 일상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하지만 새하얀 종이에 미처 다 적지 못하고 쌓여만 가는 그들의 아픈 기억들은 한없이 깊고 길다. 그 연유로 가끔 내 마음을 꽉 하고 조여와 나를 아프게 하는 것들이, 영화‘지슬’을 보고 나서 더더욱 선명해진다.

▲ 길을 걷다 우연히 만난 사진들. 4.3의 아픔을 직접 체험한 세대들이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아픔의 경험은 이해한다고 해서 과거의 기억을 없애주거나 변화시켜주지 않는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처방전도 우리의 몸과 마음을 아프기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픔의 경험을 알아간다는 것은, 단지 새롭게 다가올 다른 형태의 아픔을 짐작하게 하고, 현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또 다른 경험이 되어줄 뿐.

영화가 그랬고 기사님과의 짧은 대화가 그랬다. 하지만 주고받음의 연속이 언젠가 또다시 일어날 아픔에 관한 예방주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간 적지 않고 있던 할망 하르방의 끝나지 않은 세월의 이야기들을 몇 토막 더 적어두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누군가 바쁘게 움직이지 않으면 아픈 채 그냥 사라져 버릴 4.3의 흔적과 그 아픔의 숙제들. 나의 단편적인 기록들이 그 아픔의 경험에 무엇을 시사하는지 솔직히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전한다. ‘아프다, 아프다’ 말씀하시는 어르신들의 남겨진 기억들을 힘들게 끄집어내어 내 귀로 들었으니, 빙산의 일각일지언정 전하는 것이 급선무다.

“4.3때 모슬포에 있었어요. 알뜨르 비행장. 일본 공수들이 비행기 상할까봐 창고를 만들어 놔 신디(놓았는데) 그디(거기) 사름들(사람들) 몰아넣고 막 죽이고, 우리 아는 사름들 다 죽었죠. ……나도 유치장 생활을 했죠. 취수(고문)도 받아났고. 막 거꾸로 매달아가지고 물 끓인 거 코에 담고 넣고. 고춧가루 넣고. 허이구, 참말로(정말)……. 죽이지 않은 것뿐이지 온몸은 다 죽은 거나 다름없었죠. 멀쩡했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다……. 내 나이 스물 둘이난, 그때 결혼할 때였는데. 신혼이고 뭐고, 죽는 줄로 알았어.”(2012년 7월 21일 자, 담뱃가게 할망의 말씀 중에서. 84세)

“내가 9살 때 4.3사건이 났어. 제일 처음 피난 간 디가(피난 간 곳이) ㄱㅇ초등학교라. 누가 먹여줄 사름(사람)도 없고, 쫄쫄 굶엉게(굶었지). 거기서는 하룻밤만 자고, 다들 뿔뿔이 흩어졍(흩어져서) 괸당들(친척들) 사는 해변가로 강 살아서(가서 살았어). 마을 사름들 뿔뿔이 헤어졍이네(헤어져서). 어신(없는) 사름들은 옆집사름 괸당신디(친척에게) 촞아강(찾아가서) 인연 인연으로 다 살았주(살았지). 맨손으로 가시난(갔으니), 쏠도 없곡(쌀도 없고) 뭐도 없곡….
우리는 ㅅㅅ읍에 강 살아신디(살았는데), ㄱㅇ초등학교에서 도망 나오자마자 해변에 이신(있는) 학교를 몬딱(전부) 불태워 부런 게(버렸어). 초등학교 선생들 다 심어당(데려다가) 죽어버리고.
우리는 어리니까 건들지 않고, 열다섯 스물 난 사람들은 다 죽여부런(죽여버렸지). 젊은 사름들 몬딱 죽어분거(다 죽어버린거). 여자만 다 살았주. 겐디(그런데) 여자신디도(여자한테도) 경비 허렌 허멍(하라고 하면서) 목총·죽창을 만들어서 그걸로 찌르렌 행게(찌르라고 했어).
순경이라는 사름들이 있어신디(순경이라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자기는 안 죽이고 우리한테 마을 사름들 죽이라고 시켜부렀단 말이여. 싫다고 하면 ‘빵’하고 죽어. 왜놈들 신디는(일제때 일본인들한테는) 반박이라도 허곡 말이라도 해났주(했었지).
일제(일본강점기)때 군인들이 우리 부락 물이 좋으니까 큰 대대의 본부가 와나서(왔었어). 여기가 본부라나서(본부였었어). 우리는 꼬마여시난(꼬마였으니까), 군인들이 사탕도 주곡(주고), 가마솥에 밥 해가지고 나눠주고, 누룽지 남으민(남으면) 몰래 그거 심어당(가져다) 먹고 했지. 아이덜이(아이들이).
겐디(그런데) 4.3사건은 말도 못해, 아주…. 일제(일본강점기) 때는, 젊은 사름들 심어당(잡아다가) 고생만 못 견디게 시키고, 질(길) 만들고, 비행장 만들고 시켜났주만(시켰었지만), 무조건 ‘빵빵’ 사름들 죽이진 않았단 말이여. 4.3사건은 말도 안 되는 거라…….”(2012년 8월 4일 자, 돌담 쌓는 하르방의 말씀 중에서, 74세)

▲ 길을 걷다 우연히 만난 사진들. 4.3의 아픔을 직접 체험한 세대들이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 길을 걷다 우연히 만난 사진들. 4.3의 아픔을 직접 체험한 세대들이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이제 삶이야 그때 생각허민(생각하면)…. 놈이(남의) 방 하나 빌엉(빌려서) 몇 명이 모다졍(모여서) 살아시냐 게(살았느냐고). 웃뜨리(윗 들, 중산간 지역을 말함) 집덜은(집들은) 폭도(할망은 당시 무장대를 폭도라 불렀다)들 살까봐 경찰들이 다 불살라 불곡(불태워 버리고). 해변은 덜 했지. 그딘(거기는) 순경들이 근무하니까. 우리도 갈 때 쏠 가졍(쌀 가지고) 쇠에 싣겅 갔주(소에 싣고 갔지). 소개허영(소개疏開해서, 소개는 전란이나 화재 등에 대비해 주민이나 시설물을 분산하는 것을 말함) 해변가에 순경네 집을 빌엉 살아서(빌려 살았지). 폭도 들까봐(폭도가 들이닥칠까봐) 그디 무서왕(거기 무서워서) 아무도 안 살아신디(안 살았는데), 우리는 갈 디가 어시난(갈 곳이 없으니) 그디 살아서(거기 살았어). 친정 부모 동생, 할머니까지. 어느 날 폭도가 들엉으네(들어와서) 먹을 걸 몬짝 가져간(다 가져갔어). 겐디(그런데) 우릴 베령 성이네(우리를 보고 서서는) 죽이진 않해라(않더라), 그 사름…….”(2012년 9월 1일 자, 손녀와 둘이 사는 농사꾼 할망 말씀 중에서, 80세)

“나 열아홉에 4.3사건이 낭(나서), 몬딱(전부) 내비려 뒁 갔주게(내버려 두고 갔지). 5일 만에 온다고 하니까 그냥 갔주. 겐디 5일은 무신(무슨)……, 몇 달 썩(씩) 지낭 살당 보난(지나서 살다 보니) 사름들 다 죽고. 결혼한 나 새신랑도 잡혀강 죽어불곡(잡혀가서 죽어버리고). 그 난에 사람들이 형편 없이 죽어서, 허이고…….
경해도(그래도) 그때는, 아무것도 어서도 아져당 밥행 먹으랜 허고(가져다 밥해서 먹으라 하고) 나물도 나누멍(나누면서), 아무것도 안해도 굶으민 안 되니까 남은 사름들이 혼디 모다졍(함께 모여서) 고치(같이) 살아서.
그래도 살아진 것을 행복으로 살았지. 몇 해 지낭(지나서) 한 스물다섯 나가난(되니까), 그때가 참말로 살기 어려왕이네(어려워서), 밀체도 먹고 감자뿌리도 먹고 아니 먹어본 것이 어서.”(2012년 11월 3일 자, 약초 캐는 할망 말씀 중에서, 83세)

“산에 올라가민 몬딱 폭도렌 행(산에 올라가면 모두 폭도라고 해서) 산 사람들 다 죽이라고 해나서(했었어). 겐디(그런데) 우리가 공산당이 뭣산지(무엇인지) 빨갱이가 뭣산지 알게 뭐냐게! 우린 뭔 일인가 했주(무슨 일인가 했지). 나는 감자구덩이에, 형님은 통시(화장실)에 곱앙(숨어서) 겨우 살아서. 나 눈앞에서 사람이 세 개나 죽었저게(세 명이나 죽었지). 잊질 못허여.”(2012년 7월 14일 자, 동갑내기 부부 하르방 말씀 중에서, 84세) / <제주의소리>

<정신지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