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훈의 제주담론] 14-① 영화 ‘지슬’과 지역문화 ‘창조시대’의 개막, 무엇을 할 것인가?

▲ 이 영화로 인해 우리는 4·3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문화어’를 얻었다. 바로 ‘지슬’이다. 육짓말로 ‘감자’라 불리는 제주섬의 ‘지슬’, 지슬은 4·3 당시 살기 위해 마을을 버리고 들로 산으로 동굴로 피신해야 했던 제주도민들에겐 삶을 이어가게 했던 일용한 양식이었다.

제주에서 자주 볼 수 없는 개봉영화 시사회에 초대를 받았다. 그동안 오멸 감독이 만드는 영화들에 어떤 도움도 되어 본 적이 없는 필자로서는 매우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나중에 개봉하면 볼까 하다가 제주도 감독이 제주에서 만든 4·3영화라는데, 이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하고, 거기에다 개봉도 내년이라는데, 안 볼 수야 없지 않겠는가 하면서 미안함을 무릅쓰고 영화 관람에 참석했다.

이 글은 그 시사회에 참석했던 후기다. 솔직히 필자는 그의 영화를 보고 나서 눈물이 났다. 그것은 영화의 내용 때문이기 이전에, 이 척박한 섬 땅에서 영화라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존재감에 대한 고마움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 후기격인 글에 보이는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들이 앞의 예의 미안함에서 기원한 것은 아니다.


제주도(島)표 영화감독 ‘오멸’의 네 번째 장편독립영화 ‘지슬’을 보다

영화 ‘끝나지 않은 세월 II-지슬’. 런닝 타임 108분의 독립영화 한 편이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에 내걸리면서 파문을 일으켰다. 제주섬에서 태어나 자라고 제주섬에서 영화 만드는 젊은 감독 ‘오멸’의 영화가 지난 10월 13일 막을 내린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 영화진흥기구(NETPAC·넷팩)상을 비롯해 시민평론가상, 한국영화감독조합상-감독상, CGV무비꼴라주상까지 휩쓸며 4관왕의 타이틀을 차지했다. ‘세상에나, 제주에서 웬 영화제작?’하는 분들은 ‘깜놀’할 뉴스일 수밖에.

‘오멸’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지슬’은, 제주 최초로 4·3 장편극영화 <끝나지 않는 세월>을 만들고, 본격적인 영화작업을 시작하려다 갑작스런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故 김경률 감독의 뜻을 잇겠다는 의미에서, 그에 대한 오마주로서 <끝나지 않는 세월 Ⅱ-지슬>로 제목을 확정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그동안 문학, 미술, 연극 등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생산된 4·3예술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영화가 발을 내딛게 된 예술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그만의 역사해석과 영상언어로 4·3의 예술적 해석의 영토를 넓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영화 ‘지슬’은 ‘신위(神位, 영혼을 불러 앉히기 위해 위패를 모심)’, ‘신묘(神廟, 영혼을 모시는 굿)’, ‘음복(飮福, 제사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 ‘소지(燒紙, 지방지를 태우는 것)’ 네 개의 시퀀스로 전개된다. 이러한 극 전개의 전략은 “4·3사건 당시 돌아가신 분들의 제사를 지낸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찍었다.”는 그의 인터뷰 발언에서 드러난다. 즉, 필름으로 빚어, 영화로 올리는 ‘제사’다. 그가 그토록 제주에서 개봉을 하고 싶어 하는 의도의 배경이다. 영화가 제사인 한 제사상은 제주섬에서 차려야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초반부터 시작되는 흑백의 롱테이크로 이어지는, 약간은 인내가 필요한 인트로를 지나, 카메라가 연무 속에서 잡아 낸 민가 마루 위에 어지럽게 흩어진 제기(祭器)들을 먼저 만나야 한다. 이 장면은 사실 이 영화가 ‘제사’로 만들어져야 하는 모든 상황을 웅변하는 시퀀스이기도 하다.

즉, 영화가 다루는 상황, 소재로서의 당시 동광리의 4·3으로 인한 마을의 일상은 ‘제사’가 제대로 치러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즉, 그러한 제사 불가능의 상황으로 상징되는 것이 바로 역사로서의 4·3이다. 제사는 연례행사로 일상적인 생활의 문화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정상적 상황과 비정상적 상황은 ‘제사가 치러지는 일상’과 ‘제사를 치를 수 없는 상황’으로 나뉜다. 비극의 역사적 사건은 제사가 정상적으로 치러질 수 없는 상황의 총체이다. 그러므로 제사를 올리는 마음으로 이 영화를 만든 감독에게 이 상황은 4·3영화가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영화는 1948년 겨울, 본격적으로 중산간마을에 대한 초토화작전이 시작된 4·3 당시 실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그해 11월 15일, 제주섬의 북서부지역 중산간마을인 안덕면 동광리에 토벌대 군인들이 들이닥쳐, 마을 주민들을 학살하고, 사흘 뒤 마을을 불태워버린다. 주민들은 토벌대의 공세를 피해 일단 산으로 들어가 숨어서 목숨을 부지해야만 했다. 그렇게 동광리 주변의 무동이왓, 삼밭마을 주민들까지 120여 명이 속칭 ‘큰넓궤’로 알려진 동굴로 숨어든다. ‘큰넓궤’는 제주말로, 말 그대로 크고 넓은 동굴이라는 뜻이다. 현재 세계유산으로 빛나는 제주 천연의 용암동굴들은 4·3 당시 주민들에겐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생사의 기로에서 목숨을 부지하게 해준 최고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 동광리 큰넓궤에 피신한 주민들이 지슬을 하나씩 손에 들고 허기를 달래고 있는 장면.

영화는 사실적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소위 사건을 그대로 재구성하는 리얼리즘 영화는 아니다. 그렇다고 팩션적이지도 않다. 다만, 그는 흑백사진 또는 수묵화가 지닌 단색 톤으로 사건 전체를 감싸 안고, 그 속에서 자신의 영화언어로 요리를 해낸다. 3번의 독립영화에서 학습된 결과라고는 믿기 어려운 일취월장의 재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동굴로 피신했던 상황과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육지에서 파견되어 온 토벌대의 내․외부를 카메라는 마치 영상시를 읊듯 시종 훑어간다. 그의 시선은 “영화 한 편으로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다.”는 그의 인터뷰 대사에 잘 나타나 있다.

영화 한 편으로 4·3의 역사적 맥락들과 다양한 사건의 추이들을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영화는 ‘꼴라쥬(Collage, 특정한 이미지를 골라, 잘라 붙이는 미술의 한 기법)’다. 그 역시 ‘꼴라쥬’를 택했다. 토벌대와 일단의 피신주민들 그리고 동굴이라는 공간에서 말이다. 통시적 역사 서술에서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현대 역사학의 줄기는 미시사라는 새로운 방법론으로 귀착되었다. 즉, 작은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면서 전 역사적 의미 맥락을 규명해낸다는 전략인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미시사적 리얼리즘 영화(?)로 부를 만도 하겠다.

삶과 죽음의 경계, 추적과 피신, 토벌과 생존의 모든 경계에서 카메라는 그 상황과 결과들을 이미지의 전모를 잡아주지 않는다. 이 영화는 직접적이지 않다. 어쩌면 부러 직접적인 시선을 피해, 발끝 손끝을 보여주는 것으로 신체 전체의 행위를 유추하게 하는 연출전략을 취한다. 이러한 연출은 그가 의도했던, 한 편의 영화가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의도는 정제된 흑백의 콘트라스트 속에서 적절하게 안착된다.


확실히 그의 영화언어는  ‘찰리 채플린(Charles Spencer Chaplin)’  그리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의 영화들과 약간씩의 DNA를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의 곳곳에서 보이는 그의 언어실험들은 앞으로의 만들어질 그의 영화의 미래를 예견하게 하는 단초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그만의 영화언어를 이미 체득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전해 주기에 충분하다.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그의 색깔과 스타일들이 존재한다. ‘자파리’ 같이 찍었다는 그의 이전 독립영화들에서의 스타일과 시선이, 사실 전혀 톤이 다른 듯한 이 영화에도 충분히 녹아 있다.

▲ 4.3의 상황을 극명하게 상징하는 대결의 구도, 생사여탈권을 가진 총 가진 남자(군인)와 보따리 하나를 가슴에 품었을 뿐 자신을 지킬 아무것도 지니지 못한 가장 약한 존재인 피신자인 여자(주민)이 몰려 오는 토벌군떼를 배경으로 황량한 눈밭(섬땅) 위에 마주 서있다.

피신 동굴에서의 상황에서조차 그는 당시 주민들의 표정 하나하나를 꼴라쥬하면서 해학적 상황들과 대사들을 끌어낸다. 극히 불편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의 연출은 서정성과 예기치 않은 코미디적 아이러니의 언어를 놓치지 않는다. 특히 시종일관 외국어처럼 던져지는 제주외국어처럼 던져지는 제주말은 타지역 관객들에겐 오히려 의미를 모르는 이미지로 비쳐질 수도 있을 정도로 느껴진다. 말과 이미지의 변주 속에 섬사람들이 살아난다.

또한 빈번한 롱테이크들(감독은 영화제작상의 여건과 상황을 언급하기도 했지만)은, 영화사상 ‘롱테이크의 미학’을 통해 기억의 탐색과 시간예술의 도구로서의 영화의 가능성에 주목했던, 영상시인이라 불릴만한 타르코프스적인 이미지를 연신 떠오르게 한다. 물론 이런 테크닉은 그의 시선과 호흡 속에서 그만의 색감을 성공적으로 찾아낸다.

또한 이번 영화에서는 그가 제주자연의 아들임을 보여주는 자연에 대한 태도들도 영화 속에 녹아든다. 마치 1901년 제주를 찾아 한라산의 높이를 최초로 측정했던 독일의 지리학자 '지그프리드 젠테(Siegfroied Genthe)'의 “이상하게도 흙, 집들, 해변, 사람 등 이 섬의 모든 것은 검은 색인 것 같았다.”는 묘사처럼, 특히 눈 내린 겨울을 택함으로써 화면의 흑백 톤으로 제주의 자연은 더욱 간결화 되고, 겨울이라는 계절이 주는 본연의 을씨년스러움과 흑백 톤의 결합은 영화 전체의 이미지를 마치 배병우가 포착한 제주자연의 이미지를 활동사진으로 풀어 놓은 듯하다.

그리고, 영화 중반부 오름과 어린 소녀의 젓 가슴이 오버랩된 장면들은 그의 제주자연에 대한 오랜 신화를 시각화시킨 개인적 리포트이기도 하다. 제주자연이 앞으로 그의 영화에서 중요한 위상을 점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게 한다.

▲ 배병우, 제주의 오름 사진, 2000년.

4·3에 대한 새로운 시선

4·3과 관련한 모든 일들이 지리멸렬한 요즘, 4·3의 새로운 예술적 차원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것은 바로 오멸의 영화를 통해서였다. 이 영화는 시공간적으로는 1948년 11월 동광리의 큰넓궤에서 벌어진 50일간의 4·3을 다루고 있지만, 토벌대 속에서 4·3 당시 9연대 정보참모로 악명 높던 마약중독자 탁성록 대위, 중도적인 김익렬 연대장을 내쫓은 후 후임으로 와서 광기에 어린 토벌을 지휘하다 암살된 박진경 중령, 그리고 당시 제주도민들의 치를 떨게 했던 서북청년단을 상징하는 인물 등 4·3 당시의 전형적인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럼으로 해서 이 영화는 4·3 당시 토벌대 인물군상의 다양한 전형성을 한 작품 내에서 획득해낸다.

영화 초입부, 그리고 중간에는 마을을 태우는 음향과 함께 등장하고, 영화의 후반부에는 동굴 속 양측의 대결에서 화면 전체를 감싸는 고추를 태운 매운 연기가 바로 이 영화 전체를 하나로 묶는 4·3사건이다. 영화의 마지막, 매운 연기 속에서 동굴로 진입하지 못한 토벌대는 마구잡이로 총을 쏘아 대며, 연신 눈물을 흘린다. 주민들 역시 그들의 진입을 막기 위해 고추를 태워 연기를 피우지만, 그 연기에 거의 질식사할 것처럼 눈물을 흘리고 기침을 토해내며 기절해간다.

이 매운 연기가 바로 역사로서의 4·3이다. 개인사를 넘어서서 각 개인들을 무대 위의 단역으로 등장시켜 왜소하게 만들어 버리는 소위 그 잘난 ‘역사의 작난(作亂)’인 것이다. 마치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신들처럼, 인간의 바람과 삶의 존재성 따위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하는 그런 범접할 수 없는 위계로서의 역사라는 것 말이다. 이데올로기가 배제된 채 역사의 연무 속에서 흘리는 눈물은 매운 고추 때문에 흘리는 것이겠지만, 개인으로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역사의 대하에 휩쓸린 인간의 군상 그 자체다. 이 영화로 치러지는 제사는 바로 그들에 대한 것이다.

▲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동굴 속 장면. 고추를 태운 연기가 자욱하다.

오멸 감독은 GV(관객과의 대화)에서 밝힌 바와 같이, 토벌대는 군대라는 하나의 조직이고 주민들은 다양한 개체들의 합이지만, 감독은 집단으로만 읽히는 군대를, 그 안에 다양하게 포진해 있는 군상들을 포착함으로써 해체한다. 즉, 잔악한 토벌대 내부에도 결국 인간이 있음을 발견하고자 했고, 그들의 상황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고 그동안의 다양한 증언들에서도 드러나듯 주민들은 하나같이 개체화된 상황과 기억으로 이미지화되어 있지만, 동일한 시간대, 동일한 공간에서 하나의 집합체로, 즉 희생자집단화할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특히 동굴 속 블랙아웃된 전체 화면의 구석구석에서 말소리의 원근감에 따라 움직이며 점차 커져 가는 화면의 연출은 바로 집단화한 주민들의 상황을 은유한다. 주민들 각각의 사정과 이야기들은 웅웅거리는 그냥 ‘소리’가 되고, 주민들의 무리지은 모습과 합쳐지면서 오 감독이 표현하고자 했던 ‘집단으로서의 주민들’의 영상화에 성공한다.

엔드크레딧마저 끝나고 막이 내린 후 마련된 GV 시간, 맨 먼저 마이크를 잡았던 한 관객은 “너무나 먹먹해서 영화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고 털어놨다. 사실, 영화에 대한 먹먹함은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방금 나를 관통한 108분이 마치 교통사고가 일어난 후의 멍한 상태(?)인 것처럼, 판단 불가능, 이건 뭐지 하는 해석 불가능, 잠시 가슴을 정제시켜야 하는 시지각과 뇌촉수와의 이격에서 오는 당혹감 등 뭐라 말하기 힘든, 그래 그 관객의 표현처럼 ‘먹먹함’이라 해두자, 이런 감각이 먼저 작동한다. “역사라는 것이 이렇게 접근되는구나!”, “아, 그래, 이런 방식도 있었지.”, “예상은 했지만 이런 식이었어.” 등등의 만감의 시간대가 엄습한다.

제주의 4·3은 그동안 문학에서 시작되었다. 4·3부활의 신호탄이라 불리는 소설가 현기영 선생의 <순이삼촌>에서부터 말이다. 그리고 수많은 작품들이 4·3문학의 연대기에 상재되었다. 시, 소설, 희곡 등 다양한 장르에서, 그리고 미술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의 그 유명한 강요배 화백의 <제주민중항쟁전>의 연작들과 매년 4·3 때마다 탐미협 작가들이 개최하는 <4·3미술제>를 통해서 말이다. 그리고 놀이패 한라산의 ‘4·3마당극들’도 십수 편을 헤아린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야속하게도 딱 둘만 기억한다. 현기영과 강요배의 4·3작품들이다. 그 외의 작품들은 기타 4·3작품이다. 사실 최초의 4·3작품들을 뛰어넘은 작품들이 아직 많지 않기 때문이다. 둘만 기억된다는 것은 둘의 예술적 성취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재탕 삼 탕이 늘어가는 것이 최근의 4·3예술판이다. 어쩌면, 4·3예술의 생산성은 시작할 즈음에 멈추어 있는 듯하다.

최근 4·3은 확실히 새로울 것이 없다. 삭제되었던 역사의 진실이 햇빛을 받으면서 호기심과 분노, 새로움과 전취한 역사의 열기가 지리멸렬해지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다한 것일까? 4·3과 관련해서 새로운 문화적 사건들은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 늘 그러듯이 평화재단이 주최하는 몇 바퀴나 돌고 돈 ‘뻔한 역사강좌’나,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전혀 대중영향력이 없는, 교수님들끼리의 심오한(?) 그들만의 리그인 심각한 ‘4·3세미나’나, 유족들이 연례로 개최하는 늘 그저 그런 위령제 등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을 것 같던 4·3예술판에, 오 감독의 ‘지슬’은 다시 4·3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4·3체험세대도 4·3운동세대도 아닌, 신예의 젊은 감독이 제주의 재래식 ‘돔베칼’ 같은 4·3영화를 들고 대뜸 턱 밑에 들이댄 것이다. 그런데 그 들이댄 솜씨가 녹록지 않다. 재탕 삼 탕의 4·3판에서 그만의 비틀기와 스타일로 “나는 4·3을 이렇게 그려봤어, 어때?”하고 말이다.

그동안의 4·3작품들이 대부분 4·3은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실의 충격성, 진상의 복원과 진실의 기록이라는 측면에 매진해온 것에 반해, 그의 절제된 화면들, 역사영화의 고전적 스타일에서의 탈피 등은 그의 여러가지 제작여건 등 상황에서 온 결과론적인 평가일 수 있지만, 새롭다. 또한 새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기존 4·3작품들과는 다른 예술적 성취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건 발발 후 60년, 동양 셈법으로 일생을 나타내는 한 갑자가 지났는데도, 4·3해결이 끝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해결보다는 지리멸렬로 흐르는 4·3의 큰 맥락에서, 오멸의 ‘지슬’은 4·3의 현재에 대해 묻는 듯하다. ‘4·3이 뭐야?’ 그의 답은 나왔다. 이 영화를 통해서. 매운 연기 속의 두 집단의 눈물의 상징화를 통해서 답을 냈다. 이전 4·3작품들에선 내지 않았던 답이다.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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