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철의 제주해안 따라가기(20)] 금등두모해안

지금 ‘판포’라 불리는 ‘엄수개’를 지나면 금등해안으로 이어진다. ‘금등리’ 바다는 예전 ‘판포’에 속하는 바다밭이었으나, 이 곳에 시체가 자주 떠 밀려와서 시체를 치우는 조건으로 ‘판포마을’에서 내주었다고 한다. 제주의 ‘삼다’ 중에 ‘여다’가 있는데, 여기뿐 만 아니라, 곳곳에 시체를 치우는 조건으로 내준 바다 밭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제주 남자들이 험한 바다에서 많이 죽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 금등리 해안 모습, 빌레용암으로 이루어진 넓은 조간대가 특징이다. 오른쪽은 해안식물인 갯강활.ⓒ홍영철
금등리 바다 부터는 육상양식장들이 줄지어있고, 바다는 파호이호이 용암의 넓고 평평한 암반들로 이어져 있다. 넓고 평평한 암반들 사이사이에는 모래사장이 형성되어 있고, 크고 작은 원담들과 소금밭이었던 모래사장이 줄지어 있다. 특히 ‘부시름수빌레’라는 바다로 멀리 나간 암반을 중심으로 모래밭이 좌우로 펼쳐져 있고, 그 곳에는 복잡하게 보일 정도로 원담이 여럿 남아 있다. 그 중 ‘새원’은 60m정도로 길고 현재도 뚜렷이 남아 있고 갯것이 하는 마을분들도 간간이 눈에 띈다.

▲ 바다로 멀리 나간 부스럼수 빌레와 부스럼수 빌레를 의지하여 만든 새원.ⓒ홍영철
마치 구좌읍 종달리 갯벌과 유사한 형태로 바닷물이 멀리 나가는 이곳은 소금밭으로도 유명하다. 평평한 암반들을 제외하면 서해안의 염전과 같은 지형이다. 돌담을 쌓아서 물이 많이 들어올 때, 물을 가두어 놓고 천일염을 만든다. 돌담과 바닥은 진흙으로 메워서 바닷물을 가두었다. 하지만 제주는 일조량이 적고, 태풍이 불 때는 바닷물이 들어오므로 완전한 천일염을 만들지 못하고, 일정한 염도가 되면 삶아서 소금을 생산했다. ‘부시름수빌레’라는 지명도 나무가 많았다는 데서 얻어진 지명인데, 지금은 전혀 나무가 없는 것으로 봐서 소금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땔감으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고지도에 보면 이 지역 바닷가에는 울창한 숲으로 그려져 있다.

▲ 금등리 소금밭, 담을 쌓고 찰흙으로 막아서 소금을 만들었다. 오른쪽은 금등리 해안가에 연달아 있는 육상양식장의 폐수로.ⓒ홍영철
금등리 바다밭을 지나면 두모리 마을로 이어진다. 두모리는 한자로 머리 ‘두(頭)’에 털 ‘모(毛)’를 쓴다. ‘두모’라고 이름 지은 이유는 이 곳의 제주의 머리라고 생각해서라고 한다. 그러면 끝은 어디일까? 마칠 ‘종(終), 이를 ‘달(達)’ 종달리다. 마치 제주를 하나의 생명체로 본 것 처럼, 머리와 꼬리가 있다. 금등리 마을을 지나다가 폭낭쉼터에 있는 돌 조각상을 만났다. 아주 오래된 것인 듯 하여 자세히 보았다. 높이가 50cm정도 되고, 윗부분이 직사각형으로 파여져 있다. 마치 비석을 세웠던 자리처럼 보인다. 보통 거북이 모양으로 만들어서 ‘귀부’라고 불리는데, 자세히 보니 거북이 모양과도 비슷하다. 지나던 마을 분이 ‘돌코냉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돌코냉이’는 돌로 만든 고양이인데, 방사탑처럼 마을의 기가 약한 곳에 세워서 수호신 역할을 하며, 고양이 또는 개의 머리형상을 하고 있다. 이 곳의 석물은 애월읍 신엄리에 있는 돌코냉이와 크기와 형태가 유사한 점도 있으나, 모양새가 조금 달라서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 두모리 마을입구 폭낭쉼터에 있는 석상, 마을 어르신은 돌코냉이라고 불렀다.ⓒ홍영철
마을 분을 만난 김에 이 마을에 있다는 ‘거머들당’의 위치를 물었다. 마을길을 한참 헤맨 끝에 바닷가에 있는 ‘거머들당’을 찾았다. 자료에 있는 사진과 달라서 가까이 다가가서 확인한 후에야 이 곳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마도 최근에 보수를 한 듯 돌담이 새로 만들어졌는데, 안을 들여다보니 작은 돌멩이가 7개 놓여져 있고, 지전과 빛 바랜 물색이 걸려져 있다. 자료에서 말하는 모습과 같다. ‘거머들당’은 ‘두모본향당’ 또는 ‘할망당’으로도 불린다.  제단 위에 있는 돌멩이 들은 궤의 구멍을 막은 돌들인데, 소박하고도 독특하다. 여기에 모신 신위는 ‘지장보살할망’과 ‘서광보살할망’, ‘맹진국할망’을 모신다고 한다. 그런데 궤가 7개가 된다는 점은 모신 신위와 맞지 않아서 의문이 든다.

▲ 두모리 거머들당의 모습, 신당의 내부에는 일곱 개의 작은 돌로 궤가 덮혀있다.ⓒ홍영철
‘거머들당’에서 동쪽으로 보니 두모리 포구가 보인다. 두모리포구는 옛기록에 의하면 전선(戰船)을 댈 만큼 큰 포구였다고 한다. 이 포구는 ‘내수여’라는 바다로 멀리 나간 빌레에 의지하여 만들어졌는데, 그래서 다른 이름으로 ‘코짓개’라고도 불린다. 기록처럼 포구의 안쪽에서부터 ‘내수여’코지 까지 상당히 길다. 전선(戰船)을 대기에 충분한 조건이 될 듯하다.

포구의 한 쪽에는 새로 복원된 듯한 도대불과 두모연대가 얼마간 떨어져서 자리잡고 있다. 도대불은 예전 등대로 윗부분에 생선기름이나 송진을 놓고 태워서 배들이 포구를 찾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고, 연대는 외적의 침입시 인근의 연대로 알려서 침입에 대비하는 역할을 했다. 두모연대는 명월진소속으로 동쪽으로는 금등리의 대포연대와 서쪽으로 우두연대와 서로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둘 다 최근에 보수된 듯한데, 예전의 기록을 보면 두모연대가 먼저 만들어졌고, 연대 위에 도대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복원한 것을 보면 분리되어 있는데, 연대는 예전의 자리에 만들고, 도대불은 바다쪽으로 옮겨졌다. 두 가지가 다른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듯하여 아쉬움이 남는다.

▲ 두모리 코짓개에 있는 두모리 도대불. 오른쪽은 두모연대의 모습, 예전에는 연대위에 도대불이 있었다.ⓒ홍영철
두모리 ‘코짓개’를 돌아나오면서 마지막으로 ‘해신당’으로 갔다. ‘코짓개’의 포구 안쪽 가운데에 있어서 멀리서도 눈에 띈다. 콘크리트로 초소건물처럼 만든 곳에는 ‘해신당’이라고 쓰여진 비석이 있다. 좁은 콘크리트에 덮혀 있어서 답답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신당들로 콘크리트 시대가 되면서 곤욕을 치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을사람들이야 튼튼한 집을 짓는다는 소박한 생각에서 그랬을 것이지만, 신들은 구멍 뚫린 돌담 사이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그리워할 것 같다.

▲ 두모포구 중간 쯤에 해신당이 있다. 중앙의 비석에는 해신당이라고 씌여있다.ⓒ홍영철
※ 홍영철님은 제주의 새로운 관광, 자연과 생태문화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대안관광을 만들어 나가는 (주)제주생태관광(www.ecojeju.net )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제주의 벗 에코가이드칼럼’에도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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