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훈의 제주담론] 17

2012년에만 제주도 이주민이 3,000여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2009년까지 제주는 출향인구가 이도(移島)인구보다 많았었다. 인구이동에 반전이 일어난 것은 2010년부터다. 2010년에 이도인구가 437명으로 늘더니, 2011년에는 2,343명, 올해는 8월까지의 통계 상 3,022명으로 늘어난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타 지역 주민들의 제주 이주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필자는 작년 세화리 동녘도서관의 요청으로 제주문화 관련 강의와 답사안내를 맡을 기회가 있었다. 강의 중간에 이주민 분들은 손을 들어 달라 했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날 강좌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육지부에서 새로 이사 온 이주민들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최근에 이주민들이 많아졌다는 이야기는 접했지만, 지역현장에서 눈으로 확인하게 되자 필자에게는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섬에서만 쓰는 족보용어가 있다. 바로 입도조(入島祖)란 말이다. 또한 입도한 지역에 따라 육지부의 용어와 다르게 쓰이는 씨족성의 본관명도 있다. 이를테면, 조천 김씨(김해 김씨), 신촌 홍씨(남양 홍씨), 애월 문씨(남평 문씨) 등 본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에서만 통용되는 입도본관명이 따로 있는 셈이다.

제주대학교에는 직업 때문에 이주하게 된 이주민 교수들이 꽤 된다. 필자가 알기에도 이미 이주 20여 년이 넘어가는 분들이 대화 중에 자신을 가리켜 ‘나는 육지꺼’라는 자괴감 어린 표현을 쓸 때가 있어서 놀라기도 한다. 그만큼 제주도에 동화되기 힘들다는 표현인 셈인데, 필자는 우스갯소리로 이쯤 되었으면 ‘입도 1대조’라고 표현해도 된다고 억지주문을 하곤 한다. 그래도 교수 자리라면 지식권력을 가지고 있는 상위계층임에도 불구하고, 20여 년이 지나도 ‘육지꺼’라고 자신을 표현해야 하는 현실이라면, 이주의 문제를 심각하게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는 말일 것이다.

▲ 신천 강씨 입도조묘. 강영(康永)은 여말선초의 무신으로 이성계의 후비인 신덕왕후의 사촌오빠였다.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후 전라감사의 직을 박탈당하고 제주로 유배되었다. 제주에서 제주 고씨를 배필로 맞아 새로 가정을 일구고 학문과 교화에 힘쓰다 제주에 묻혔고, 신천 강씨의 제주 입도조가 되었다.

이주민이 세운 나라, 한국의 고대국가들

이주민 하면, 먼저 ‘단일민족국가’라는 한반도의 역사적 이미지가 떠오른다. 요즘 들어서 뭇매를 맞고 있는 이 표현은, 사실 오랜 민족문화의 문화적 정체성의 표현에 다름 아닌 것임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혈연적 순혈주의로서의 민족’을 공격할 때 쓰이는 단골메뉴이기도 하다. 어쨌건, 단일민족과 이주민, 경상도·전라도와 이주민, 지역민과 이주민, 토착주민과 이주민 등은 항시 대칭적 이미지로 떠오르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용어다.

그러므로 이주민은 우리와는 ‘곱 가르기’, 즉 정체의 구별 짓기 대상인 것처럼 느껴지며, 우리 민족이나 지역사회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 용어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태평양 서부의 열도와 섬들로 나아가는 길목인 반도라는 지리적 환경은 오랜 역사기간 내내 이주민들의 빈 땅이었고, 이주의 회랑이었다.

사실, 현재 단일민족국가라고 이야기되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의 역사 초기, 한반도의 고대국가들의 건국사는 이주민의 역사다. 역사적으로 보면, 단일민족이라는 순혈주의로 표현되는 민족의식도 사실은 이주의 권력집단이 토착세력을 규합하는 과정에서 정통성을 확립하고 지배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역사나 건국신화에 나타난 고대국가들은 한결같이 북쪽에서 남하한 영웅들이 토착집단과 결혼동맹이나 정치체의 결합을 통해 나라를 세운다.

역사상 최초의 고대국가인 고조선의 경우, 《삼국유사》에 의하면, “하늘나라의 상제인 환인(桓因)에게 환웅(桓雄)이 태백산정의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천부인(天符印)과 3,000명의 무리를 이끌고 내려왔다.”라고 한다. 이것이 우리 역사 기록에 나타난 이주의 첫 기록이다. 환웅이 3,000명의 무리를 이끌고 완전히 이주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신단수에 내려온 환웅세력은 범과 호랑이토템을 지닌 토착세력과의 결합을 통해 고조선을 세운다. 이 과정에서 곰족과 호족 중 어느 족을 자신의 토착세력으로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신화가 바로 단군신화이다. 호랑이와 곰이 마늘을 먹고 21일 동안 동굴 속에서 참아내는 경합을 한 결과, 이주족인 환웅족과 결합한 것은 토착족 중 곰토템족이었고, 그들 사이에서 단군왕검이라는 이주토착 결합세력이 새로운 정치체를 창출하고 고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이다.

고조선이 붕괴하고 난 뒤에 열린 열국시대(列國時代), 각국의 건국신화에서도 이주민의 고대국가건설은 이어진다. 마치 로마가 멸망하고 나서 유럽에 수많은 나라들이 세워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5세기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비> 비문에는 “옛적 시조 추모왕(주몽)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었다.”라고 적혀 있다. 고구려는 북부여의 서자였던 주몽이 남하하여 졸본부여의 군장 연타발의 딸인 소서노집단과 결합하면서 세워진다. 소서노(召西奴) 집안은 졸본부여(卒本夫餘)의 5부족 가운데 하나인 계루부(桂婁部)의 실력자 집안이었다.

처음 북부여 왕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인 우태와 혼인했지만, 비류와 온조 두 왕자를 남기고 일찍 죽는 바람에 과부가 되고, 그때 주몽을 만나 고구려의 창업을 돕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건국 이후 부여에서 주몽의 전처인 예씨부인과 아들 유리가 찾아오면서,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 두 왕자와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남하하여 비류백제와 온조백제를 건국한다. 이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신화를 보면, 북부여에서 이주해 온 주몽집단이 토착세력인 소서노세력과 결합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권계승에서 밀린 소서노는 다시 두 왕자를 데리고 남하하는 이주세력이 되어 한반도의 중부로 이주해 와 그곳의 토착민들과 다시 결합하여 나라를 세우게 된다. 이주세력이 토착세력을 밀어내고, 토착세력은 다시 타관의 이주세력이 되어 그곳의 토착민들과 다시 나라를 만드는 기구한 역사이기도 하다.

신라의 경우도 박혁거세를 수장으로 하는 이주 정치세력이 사로 6촌장의 초치로 지도자가 되며, 결국 신라의 시조가 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일찍이 고조선의 멸망 후 유민들이 지금의 경주지방에 내려와 산곡 간에 6개의 촌락을 이루고 살았다. 이것이 진한의 6부였다. 촌장 중 한 명인 소벌공이 나정이라는 우물 곁에 있는 숲에서 큰 알을 발견하는데, 그 알에서 박혁거세가 나왔다. 6부의 촌장들은 혁거세의 신이함을 받들어 왕으로 추대하고 나라를 여니, 그것이 신라라는 이야기다. 이 역시 난생신화지만, 기존의 진한 6부족을 새로운 이주세력인 혁거세세력이 통합해 건국했음을 알게 한다.

그런가 하면, 가야의 경우는 “9간(九干)들이 구지봉에서 구지가를 부르며 맞이한, 하늘에서 내려온 금빛상자에 담긴 6알 중 맨 첫째인 수로(首露)를 왕으로 추대”하여 나라를 연다. 9간으로 상징되는 씨족연합토착세력과 북쪽에서 이주해 온 김수로세력과의 결합을 통해 군장으로 추대되어 개국한 것이다. 심지어 왕비인 경우도 인도의 아유타공주인 허황후를 맞아 혼인을 하게 된다. 이건 아예 지배집단 자체가 이주의 권력집단으로 이루어졌다는 얘기다.

탐라의 경우도, 신화상으로는 고·량·부 삼신인(三神人)이 지중용출(地中湧出)했다고 전해지나, 고고학적 발굴자료와 역사적 상황들을 종합해 볼 때, 용담동 철제장검 집단 등 선진문명을 가지고 이주해 온 정체세력이 탐라섬의 토착세력과 결합, 탐라국을 세운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토착세력을 규합하고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연고권을 강조한 것이 ‘지중용출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처럼 한국역사에 등장하는 고대국가 대부분은 이주세력과 토착세력의 결합으로 건국하고, 그 정통성을 확보해 나라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고려시기에도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의 멸망으로 인해 대규모 이주민들이 발생했는데, 고려가 이를 거두었던 역사적 사실들은 고대국가들이 백성들의 통합을 위한 제반 정책을 시행하게 했던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보인다. 그리고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단일민족국가로 통합되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제주의 경우도 탐라국 이후 고려에 편입된 시기에도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100여 년에 이르는 원지배기에 몽골족들이 다량으로 제주에 이주해 오며, 그 이주민과의 사이에 반몽반탐라인의 후손들이 태어나면서 혈연적·문화적으로 한반도와는 사뭇 다른 문화상을 만들어낸다. 특히 조선시대 제1의 목장도가 된 데는 천혜의 자연환경도 있지만, 몽골의 선진적인 양마기술이 기원이 되어 목축이 번성하였을 정도다. 결국, 한반도나 제주도나 이주의 역사가 곧 문명의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이주는 예외적이고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 한국의 역사 전반에서 볼 때 아주 보편적 현상이라는 말이다.

▲ 하원동 왕자묘. 최근에 ‘탐라왕자묘’라고 명칭을 못박아 버렸는데, ‘탐라왕자’의 묘라는 증거는 없다. 왕자묘에 대한 기록은 이원진의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 김석익의 《심재집(心齎集)》 등에도 실려 전하나, 탐라왕자의 묘라는 말은 없으며, 제주학계에서도 탐라왕자로 확증한 바 없다. 하지만 2000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명칭을 ‘탐라왕자묘’로 박아 버렸다. 일찍이 역사학자인 ‘김태능’이나 ‘김인호’ 등은 이 묘를 원이 망한 후 귀양 온 바이바이태자의 묘로 추정했다.


원 직할령과 원악유배지, 중세 제주도 이주의 역사

탐라 건국 이후, 해외인의 제주섬에 대한 이주가 가장 먼저 대규모로 이루어진 것은 <삼별초의 난>이 진압된 직후부터 원(元)의 직할령으로 지배당한 100여 년간, 원에서 온 관리인 다루가치(達魯花赤)와 양마기술자인 하치(哈赤), 그리고 원이 장기적으로 주둔시킨 군사들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100여 년의 탐라지배 기간 동안, 탐라에 관무와 군무로 파견되어 왔지만, 오랜 기간 체류하면서 탐라국 성립 이후 최초의 대규모 이주민의 역사를 열게 된다.

그들은 탐라여인들과의 사이에서 반몽반탐라인의 후손들을 낳아 마을을 이루기도 했지만, 원의 패망에 따른 고려의 반원정책에 강력하게 항거해 <목호의 난>을 일으켰다가, 최영 장군이 이끄는 고려의 토벌군들에게 최후를 맞는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대는 이어졌다. 1530년(중종 25)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제주목조에 “조(趙), 이(李), 석(石), 초(肖), 강(姜), 정(鄭), 장(張), 송(宋), 주(周), 진(秦)의 10성은 원(元)에서 귀화한 성씨”라는 기록은 이들을 말함일 것이다.

하원동 왕자묘. 최근에 ‘탐라왕자묘’라고 명칭을 못박아 버렸는데, ‘탐라왕자’의 묘라는 증거는 없다. 왕자묘에 대한 기록은 이원진의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 김석익의 《심재집(心齎集)》 등에도 실려 전하나, 탐라왕자의 묘라는 말은 없으며, 제주학계에서도 탐라왕자로 확증한 바 없다. 하지만 2000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명칭을 ‘탐라왕자묘’로 박아 버렸다. 일찍이 역사학자인 ‘김태능’이나 ‘김인호’ 등은 이 묘를 원이 망한 후 귀양 온 바이바이태자의 묘로 추정했다.

그 후에도 탐라가 원과 고려의 유배지로 활용되면서 이주는 확장된다. 기록상 최초의 유배는 1275년 여몽 연합군이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면서 탐라를 점령하자마자 그해와 2년 후인 1277년에 원의 도적, 죄인 등 1백 70여 인을 유배 보낸 데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고려 역시 유배지로 활용하였고, 원이 멸망한 후 명(明)나라도 초기에 일시적으로 제주를 유배지로 활용하였는데, 명이 평정한 운남의 바이바이(百百)태자와 그 아들 육십노(六十奴) 그리고 가솔들을, 그 후 원의 왕족 달달친왕 등 80여 호를 보낸다. 《여지》에 “양(梁), 안(安), 강(姜), 대(對)씨 등은 운남(雲南). 명(明) 초 운남(雲南)을 평정하고 양왕(梁王)의 가속을 옮겨 제주에 안치하였다.”라고 기록된 이들이다.

고려를 뒤엎어 왕조를 개창한 조선은 제주섬을 본격적인 유배지로 활용했다. 섬으로 떨어진 격절성은 극악한 죄인을 유폐시키기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소위 절도안치(絶島安置)의 <원악유배지(元惡流配地)>가 된 것이다. 조선왕조 내내 제주에 유배 온 유배객 수는 김봉현의 《제주유인전(濟州流人傳)》에 따르면, 500년 동안 200여 인이 넘는다.

조선 건국 이후, 제주섬에 대한 초기 이주는 이성계의 왕조 개창에 극렬 반대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신(絶臣)들, 군역을 피해 온 승도들, 형기를 마친 절도범들의 이도(離島) 조치 등으로 섬을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세종연간에는 섬의 인구가 6만 3천여 명으로 불어나 식량의 자급자족이 이루어지기 힘들었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급기야 성종대에 절도범의 이도 중단이 이루어지면서 왕조 말까지 제주는 오로지 정치범의 유배지로만 이용됐다.

특히 연산군조 이후 사화와 당쟁의 시대에는 본격적인 원악유배지로 제주가 활용되면서 200여 인이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유배객들 중에는 해배(解配)되어 돌아간 이도 많았지만, 이 섬에서 결혼해 자손을 남기고 생을 마감하거나, 첩을 얻어 살다가 자손을 남기고 돌아간 경우도 많았다.

이런 유배의 여파로 문화적 충돌이 나타나기도 했는데, 바로 ‘웃드르 촌놈, 알드르 보재기’의 문화대립이 그것이다.

고고학 발굴상으로 보면, 신석기시대 이후 제주의 문화상은 섬을 환상(環狀)으로 빙 두른 해안을 중심으로 분포가 나타난다. 즉, 오래전부터 해안의 용천수가 나는 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처럼 제주의 오래된 마을들은 옛날부터 바다와 인근의 농토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마을을 이루어 반농반어의 생업이 중심이 된 촌락사회를 이어가고 있었다.

해촌을 가운데 낀 바다와 농토들은 이미 선주민들이 장악하고 있던 터라 이주해 온 사람들은 중산간의 빈 땅을 찾아 마을을 열고 생활해야만 했다. 또한 이주민들은 바다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전무했기에 바다는 그들의 생업의 터전이 될 수 없었다. 자연스레 토착원주민은 해촌에, 이주민들은 중산간에 마을을 이루어 살 수밖에 없었다.

 

▲ 제주시 제주성지 내의 오현단(五賢壇) 전경. 조선시대 유배객이었던 충암 김정,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목사였던 규암 송인수, 안무사 청음 김상헌 다섯 분을 귤림서원에 오현으로 배향했다가 고종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귤림서원(橘林書院)이 문을 닫아 버리자, 1892년 김희정이 중심이 되어 옛서원터에 5현을 상징하는 조두석(俎豆石)을 세우고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올렸다. 오현단은 제주유배문화의 상징적인 공간이다.

특히 원 지배기 이후 <목호의 난> 와중에도 살아남은 반몽반탐라인들은 중산간의 광활한 목초지대에 생활터전을 두고 있었는데, 그들의 생업기술은 과거 원의 하치들에 의해 전수된 양마기술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활터전은 중산간지역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유배인들의 경우도 유배기간 중 제주여인과 가족을 이룬 이나, 해배되어 이들이 돌아간 이후에 소위 입도조로 남은 제주여인과 그 자식들은 섬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중산간의 초지를 농토로 개간하거나, 숯을 굽는 것 등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중산간 지역에 집성촌을 이루어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생업기술에서부터 삶의 방식까지 해촌과 산촌은 문화적 이질성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 상대를 얕잡아 보는 문화적 비하, 대립적 양상, 하나의 문화적 차이로 나타나게 된다.

대표적인 것으로, 바다를 끼고 살았던 해촌사람들이 산촌사람들을 향해 ‘웃드르(중산간 지대를 부르는 말) 촌놈(바다에 대해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비하적인 표현)’으로 불렀고, 중산간을 기반으로 했던 산촌사람들은 해촌사람들을 ‘알드르(아래 동네, 즉 해촌) 보재기(전복을 잡는 사람-포작인을 사투리로 부르는 말로, 문자도 모르고 전복이나 잡을 줄 밖에 모른다는 비하적 표현)’라고 부르며 서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심지어 서로 혼인조차 거부하기 일쑤였다. 신앙적으로도, 알드르마을들은 바다를 생업의 터전으로 했기에 잠녀들은 요왕신(龍王神, 해신), 어부들은 선박의 수호신인 선왕신(船王神ㆍ도깨비)을 모시고, 갯당, 돈짓당 등에 다녔다. 웃드르마을들은 본향당신이 대부분 농경신인 할망당(여신당)이거나, 산신(주로 목축업을 하는 마을)이었다. 또한 마을의 남성들만 모시는 포제(脯祭, 유교식 마을제)도 중산간 마을에서 발달한다. 이러한 웃드르마을과 알드르마을의 문화적 대립과 상호 비하하는 인식은 일제시대까지 이어졌고, 현재에도 마을주민들의 오랜 정체성 속에는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조선왕조 말기, 이주민 봉기를 부른 화전세(火田稅)

19세기 조선은 삼정[(三政), 조선시대 국가 재정의 3대 요소인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 정부 보유 미곡의 대여 제도)]의 문란(紊亂)으로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지고, 전국이 민란(民亂)의 시대로 진입하게 되는데, 제주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주도에도 각종 세폐(歲幣)로 인해, 이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란이 빈발했다. 1862년 강제검·김흥채 등이 주동한 <임술(壬戌) 농민봉기>를 시작으로, 1890년에 김지가 주동한 <경인(庚寅) 민란>, 1896년에는 강유석과 송계홍 등이 주동한 <병신(丙申) 민란>, 1898년에는 방성칠이 주동한 <무술(戊戌) 민란>, 1901년에는 이재수의 난이라고 속칭되는 <신축(辛丑)민란>이 발생했다.

이 중 이주민 세력이 주도하여 봉기한 민란이 <방성칠 난>이다. 방성칠 난은 1898년 모슬포에서 발생하는데, 모슬포 중산간 지역 화전민(火田民)들의 화전세(火田稅) 문제가 불거져 터진 민란이었다. 당시 화전민의 대부분은 이주민들이었다. 이들은 한반도에서 살기 힘들어 결국 제주로 이주해 왔는데, 이곳에서 역시 탐관오리들의 학정으로 견디기 힘들게 되자 봉기했던 것이다.

 

▲ 방성칠이 살았었다는 화전마을인 영남마을. 이 마을은 4·3사건 당시 16가호의 주민 90여 명 중 피신하지 못한 50여 명이 희생되는 불운을 맞았다. 마을 주민의 70%가 몰살당하면서 폐촌되어 버려, 현재까지도 복구되지 못한 채, 마을의 유적들만 남아있다. 마을의 정자목과 4·3유적지임을 알리는 잃어버린 마을 표석이 보인다.

방성칠(房星七)은 1894년 동학농민정쟁 당시 동학에 호응하여 남학당을 일으켰다. 수천 명이 남학운동을 벌이다 실패했고, 그해에 제주도 대정군 광청리 일대로 남학교도 수백 명이 집단 이주하여 화전민으로 정착해 살았다. 당시 대정군은 화전 개간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대부분의 화전경작지는 둔전인 국영목장 내의 토지들이었다.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려면, 마장세(馬場稅, 목장세)와 화전세(火田稅)를 내야 가능했다. 화전민인 이들 대부분의 이주민들은 육지에서 들어와 토지도 소유하지 못한 채 비참하게 살아가는 형편이었다. 그런 와중에 당시 탐관오리였던 목사 이병휘는 이 마장세와 화전세를 이용해 가렴주구를 서슴지 않았다. 이에 1898년 2월, 방성칠을 앞세운 광청리 일대 화전민 수백 명이 제주목 관덕정에 모였다. 그들은 화전세와 마장세, 호포(戶布, 호별세)가 지나치며, 사환[(社還): 환곡(還穀)]제도에 관리들이 농락이 심해 폐단이 극에 달했으므로 이를 시정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목사는 약속을 이행치 않고 오히려 방성칠을 잡아넣으려 획책했다. 이에 방성칠과 화전민들은 분노하여 각 마을에 통문을 돌려 집집마다 장정 한 명씩을 모아 봉기한다. 민군은 제주읍성으로 쳐들어가 제주목사 이병휘(李秉輝)와 대정군수 채구석(蔡龜錫)을 구타하여 성 밖으로 쫓아낸 후 제주읍성을 점거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하지만 방성칠과 남학교도들이 독립 국가 건설을 내세우고, 방성칠의 일본복속설이 퍼지면서 민란지도부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으며, 관군의 교란책이 먹히면서 제주도민과의 결속력이 약화되어 막을 내리게 된다. 이는 마치 고대국가 개창의 면모를 보여주는 듯하다. 시대는 19세기였지만, 고대국가 건국기에도 이런 과정을 통해 이주집단이 토착민들을 통할했으리라 짐작되는 장면들이다.

해남촌, 전라도 이주민의 대폭적인 증가

해방 후 제주에 다시 이주의 물결이 몰아친다. 1960년대에서 70년대에 이르는 시기, 흔히 <해남촌>으로 상징되는 전라도 주민들의 이주 물결이다. 필자의 어린 시절만 해도, 전라도 이주민에 대한 반감은 대단했다. 마치 그들을 재외국민화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일례로 필자의 외가는 해촌마을인 남원이었는데, 방학은 어김없이 그곳에서 보냈다. 그때의 경험은 지금도 생생하다. 제주도에는 올레 진입공간에서 이미 주인의 재택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정낭’이라는 기호문화가 있었다.

정낭이 아무것도 걸쳐 있지 않으면 재택, 하나면 곧 돌아올 것, 둘이면 잠시 동네외출, 셋이면 원거리 출타 등의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전라도 이주민들이 대부분이었던 엿장수들 중 몇몇이 이런 제주 전래의 문화를 역이용해, 주인 없는 틈을 타 물건을 탈취해가는 사건이 빈번했다. 그러므로 외방에 갈 때도 툇마루 아래 신발들을 늘여 놓아, 마치 집 안에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기도 했다.

이는 필자가 어린 시절 직접 겪었던 일화이기도 하다. 또한 어른들은 전라도 사람들은 늘 경계해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 덕에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필자의 오해는 군대에서 전라도 친구와 만나기 전까지 사라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영향력이 강했던 지침이었던 것이다. 이주민의 생존본능과 그로 인한 충돌을 침소봉대한 안타까운 기억의 단면이다.

1960∼70년대 호남지역을 연차적으로 휩쓴 대한발(大旱魃)은 호남의 주민들, 그중에서도 탈향한 농민들을 제주도로 대거 이주하게 했다. 우리나라는 1967년부터 1978년까지 12년 동안 다섯 차례 한해(旱害)를 입었다(1967년, 1968년, 1976년, 1977년, 1978년). 1967년 8, 9월 동안에는 호남지역에서, 1968년 6, 7월에는 호남과 영남에서 예년 강우량의 20-30% 정도밖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60년 만에 겪는 대한발(大旱魃)이었다(주희춘, 2008.).

특히 1968년 가뭄 때는 제주에서 물을 실어 나르는 초유의 공수작전이 벌어지기도 했다.(목포-제주 간을 오가던 가야호가 하루 120드럼씩 목포시의 급수차량에 옮겨주면, 이 물을 고지대의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당시 신문에는 “일군 땅이 쇳덩이처럼 굳으면서 이농자가 속출하고 있다.”라는 보도가 지면을 장식했고, 급기야 전라남도는 이농자들을 방지하기 위해 경찰까지 동원하는 강경책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 급거 이탈하는 이농자들을 잡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또한 이 가뭄은 농업에만 피해를 준 것이 아니라, 공업용수 부족으로 공장마저 문을 닫게 했고, 수산업에도 타격을 입혔다. 바다의 고기마저 사라진 것이다. 이 연속된 호남의 큰 가뭄은 호남 주민들, 특히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 타지방으로의 이주를 선택하게 했고, “1960〜1970년 어려웠던 시절, 서울, 부산과 함께 전라도사람들의 꿈이 이루어지는 ‘희망의 땅’이었던 곳이 제주도였다.(주희춘, 2008.)”

제주로 대거 이주해 온 전라도 주민들은 자기 소유의 그 무엇도 없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부두노동자나 막일꾼으로 나서면서 제주도의 하층민으로 편입되어 나갔다.

1960∼1970년대 제주도로 들어갔던 호남인, 특히 전라도사람들이 제주사회에서 완전히 정착하기까지 약 40여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제주도라는 낯선 섬에 들어가 그곳의 문화에 적응하고, 경제생활을 해서 일정한 부를 축적하기까지 고난의 연속이었다.(주희춘, 2008.)

▲ 몇 채 안 남은 해남촌 당시 건물.

1960∼1970년대 들어 제주시 사라봉 부근에 허름한 판자촌이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하는데, 바다를 건너온 전라도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정착하면서 형성된 ‘해남촌’이다. 해남촌은 전남 해남 출신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었다. 2~3평 정도의 판잣집이 나중에는 200여 채까지 빼곡히 들어찼다.(염미경, 2011.) 처음에는 제주항 부두 옆의 건입동 주변에서 시작되어 나중에는 사라봉 아래까지 공간적으로 확장된다. 그러나 이 해남촌에도 80년대 중반 도시개발에 따라 이주명령이 떨어지고 이들은 신산모루, 화북동, 공설운동장 주변으로 각자 흩어졌다. 다음 글은 생존을 위해 제주로 이주해 온 전라도 이주민들의 당시 삶의 애환이 서린 생생한 육성이다.

“해남촌 분위기는 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니까 안 좋았어. 다들 어려운 시기였어. 창피한 얘기지만 집들이 다 이렇게 붙어있어 싸니까 개별적인 화장실 같은 게 없었어요. 집집마다 공중화장실을 해놨어. 여러 세대가 다양하다 보니까 줄을 서고… 어렵게. 그때가 70년대 초반까지도 그랬어요. … 삶이 삶이 아니었다니까요. 아니, 공중화장실을 만들었다니까요. 바로 길가에다가. 지나가면 냄새가 났죠. 전부 재래식이었고. 그러는 것이 참 몰상식한 삶이었을 거야. 이와 같은 시절이… 이제는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고. 그런 다음에 빌딩이 막 3층 4층 들어서고… 그때 길이 꼬불꼬불한 샛길이었어. 여인숙도 있고 그랬는데 이제는 흔적이 없어. 전부 길 뚫어져가지고, 그 건입동 사무소에서 올라가는 길 있지? 옛날에는 그 길이 겨우 사람 다니는 길이었어.”(‘호남향우회 관계자와의 심층인터뷰’, 염미경, <개발과 이주 그리고 주거지 분화>, 2011.) 

 

▲ 박경훈 제주민예초오 이사장. ⓒ제주의소리

마치 19세기 화전민들처럼, 현대판 유민(流民)이 되어 제주를 찾았던 전라도 사람들은 40여 년이 지난 현재 지역사회에 뿌리내려 제주도민으로 살고 있으며, 호남인들의 모임인 <호남향우회>는 도지사 선거에서도 당락을 결정하는 캐스팅보트가 될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 역시 막강해졌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통령 출마 시 지지 열기나, 제주도민들의 부동의 민주당 지지에는 이들 호남 이주민들의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제주도민의 엑소더스였던 일본밀항 열풍 역시 이 시기에 불어 닥쳤다는 점이다. 마치 화가 이중섭이 살기 위해 제주를 피난처로 찾아왔을 때, 정작 제주의 청년들은 살기 위해 군대에 지원해 6·25전장의 한복판에서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어야 했던 것처럼.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제주의소리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