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철의 제주해안 따라가기(21)] 용당용수해안

한경면 두모리와 신창리는 하나의 마을로 합친 것처럼 보인다. 민가가 일주도로를 따라서 이어져 있어서 마을구분이 없다. 원래 지금의 한경면 소재지인 신창리는 두모리에서 일부 분리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한경면 지역은 신창성당 앞에서 시작되는 해안도로가 고산 당산봉 옆으로 나오는 곳을 제외하고는 마을길을 따라 바다를 볼 수밖에 없다. 자연히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걸음걸이가 많다. 하지만, 이렇게 되어있는 곳이 해안도로로 쫙 뽑힌 도로보다 훨씬 재미있다. 마을 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인사하고 묻는 재미는 고향을 하나씩 얻는 기분을 가져다 준다.

▲ 마을사이로 걷다보면 정겨운 옛모습과 만난다.ⓒ홍영철
신창리포구로 향하는 길이 있어서 포구로 내려간다. 이 곳의 예전 지명은 ‘왕깅이물성창’이라고 한다. 큰 게가 있는 용천수가 있는 포구라고 볼 수 있겠다. 제주의 용천수가 대부분 해안가에서 용출하니까 자연스러운 현상이겠지만, 포구에는 대부분 용천수가 있다.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제주는 포구의 조건이 유별나게 좋은 곳이 없어서, 오히려 포구의 입지조건보다도 용천수가 있는 곳을 포구의 입지로 택해서 어로와 물을 같이 해결하는 방법으로 용천수와 포구를 같이 두었는지도 모른다. 신창리포구는 크고 배들도 많이 정박해 있어서, 성산포구나 한림포구와 같은 느낌을 준다. 인공적으로 쌓은 방파제와 매립된 지형이 제주의 포구다운 맛이 나지 않는다. 신창리 포구를 나와서 일주도로로 다시 걷는다.

▲ 신창포구의 모습, 규모가 커서 제주의 포구다운 맛을 느끼기 어렵다.ⓒ홍영철
이 곳 해안도로는 한경면 고산리 당산봉 앞에서 다시 일주도로와 만난다. 비교적 짧은 도로지만 해안절벽이 이어진 애월해안도로와는 또다른 맛을 준다. 평평한 파호이호이용암이 바다멀리 흘러감으로서 넓은 조간대가 드러나고, 군데군데 모래밭이 있어서 많은 바다생물들을 보기에 좋은 장소다. 해안도로를 접어들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우측에 싱계물이라는 표석이 있고, 작은 돌들로 네모꼴로 쌓은 곳이 둘 있다. 하나는 여탕, 하나는 남탕인 노천 용천수 목욕탕이다. 물의 양도 제법 많고 깨끗하다. 여기가 낯선 사람은 남탕과 여탕이 구분이 어려움으로 조심해야겠다. 입구에 작은 글씨로 쓰여져 있다.

▲ 신창 싱계물 여탕의 모습과 싱계물의 내부모습, 물이 풍부하다.ⓒ홍영철
싱계물에서 다시 서쪽으로 10분 정도 가다 보면 작은 포구가 나온다. 여기는 신창리와 용당리의 바다밭 경계가 되는 곳으로 이 포구의 우리말 이름은 ‘솔개’다. 지금은 용당리의 포구로 이용되고 있다. 이 포구는 ‘솔래빌레’옆에 있어서 ‘솔개’라는 이름을 얻었다. ‘솔개’에서 조금 더 가면 아주 작은 배 한 척이 정박해 있는 정말 작은 포구를 만나게 된다. 배는 해안도로와 바짝 붙어서 둥근 돌들 위에 걸쳐져 있고, 물은 하나도 없다. 뱃머리가 향하고 있는 바다쪽은 마치 올래돌담처럼 양옆으로 돌담이 쌓여져 있다. 그리고 더 바다쪽으로는 원담이 가로막고 있다. 이 배가 바다로 나가기 위해서는 시간을 많이 기다려야겠다. 물이 원담을 넘고, 다시 올래처럼 생긴 담을 넘어 배를 띄울 때까지. 하지만, 여기에 정박해 있는 작은 배는 너무나 평화로워 보인다. 올래담을 구불구불 돌아 집에서 몸을 쉬고 있는 아이처럼….

▲ '솔개'라고 불린 용당포구의 모습, 오른쪽은 부게원과 작은 포구, 작은 배가 쉬고 있다.ⓒ홍영철
용당리와 용수리는 이웃하고 있는 마을이다. ‘용(龍)’자 돌림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같은 마을이었거나, 아니면 형제마을이라도 되는 듯한데, 용수리의 ‘수(水)’와 용당리의 ‘당(溏)’ 모두 물을 의미하고 있다. 마을분에게 물어보니 용이 승천했다는 ‘용못’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된 후, 나중에 나누어졌다고 한다. 그 때문이어서 그랬는지 용수리와 용당리와는 이상한 금기가 있다. 용수리와 용당리 사람이 서로 만나서 결혼하면 후손이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용수리와 용당리에서 차귀도를 보면 마치 상여모양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같은 혈족인 마을이어서 이런 금기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제주의 마을에 있는 금기나 아니면 제주지역 전체적으로 있는 금기에는 혹은 미신이라고 몰아 부칠 만큼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머리에 깊게 각인시키는 지혜는 조상들에게 배울 교육적 자산이다.

▲ 용당에서 본 차귀섬, 상여의 형상이라고 한다. 오른쪽은 사람이 누워있는 형상의 눈섬.ⓒ홍영철
신창에서부터 용수리 전까지는 거대한 풍력발전기 4기가 있다. 구좌읍 행원리가 제일 먼저 상업적인 풍력발전을 시작한 이래로 여기가 두 번째 풍력발전단지다. 구좌읍 행원리의 풍력발전기보다 개수는 적지만, 발전용량은 한 기당 3배에 가까이 크다. 그래서 그런지 날개도 훨씬 커 보이고, 탑도 더 높아 보인다. 이 곳이 제주도의 서쪽이라서인지, 노을이 질 때의 풍력발전기의 모습은 더욱 운치있게 보인다. 여기 풍력발전기에서 생산되는 전력은 시간당 1500kw라고 하니 보통 가정에서 3kw전력을 쓰니까, 약 500가구의 전력을 생산하는 셈이다. 풍력발전이 초기에 건설비용이 많이 들지만, 화력이나 원자력이 폐기물처리나 공해문제까지 포함한다면 결코 비싼 가격이 아니다. 그리고 이 풍력발전을 단순히 전력생산에만 한계를 짓지 말고, 이 것을 관광자원화해서 부가소득을 높일 수 있는 방안도 생각할 수 있다.

▲ 한경풍력단지의 노을과 금등에서 바라본 한경풍력단지의 모습.ⓒ홍영철
마지막 풍력발전기를 지나면 용수리 포구가 나온다. 용수리포구 초입에 있는 바다로 향한 쇠머리코지에 우두연대가 있다고 해서 좁은 마을길로 먼저 들어섰다. 우두연대의 우두는 바로 쇠머리(소의 머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당연히 쇠머리코지에 있다. 쇠머리코지의 가장 높은 부분에 자리하고 있는데, 예전 자료에는 많이 허물어졌지만, 형체가 남아있었는데, 지금은 우두연대 터였음을 알리는 비석이 있을 뿐 연대는 아주 없어져버렸다. 우두연대는 동쪽으로 두모연대와 서쪽으로 서림연대와 교신을 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대정읍 일과리의 서림연대는 이웃마을인 한경면 고산리의 당산봉에 가로 막혀 보일 수 없는 곳이다. 하지만 당산봉에 있었다는 당산봉수가 이어주는 역할을 하지 않았는지 추측해 본다.

▲ 우두연대자리 지금은 연대가 없고 터만 남았다. 오른쪽은 우두연대가 있었음을 알리는 표석.ⓒ홍영철
우두연대를 나와서 용수리 포구로 갔다. 용수리 포구에는 2기의 방사탑이 있는데, 포구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있다. 탑 위에는 새모양의 자연석을 세워 놓았다. 이 곳에 방사탑을 쌓게된 이유는 시신이 바다물에 실려 이 곳으로 자주 떠 밀려와서 방사탑을 쌓았다고 한다. 제주의 바다는 여러 해류가 교차하고, 태풍이 통과하는 길목이라 매우 거칠다. 시체가 자주 떠밀려 오는 곳을 시체를 치우는 조건으로 이웃마을에 주는 경우도 있다.

▲ 용수포구 동쪽의 방사탑과 서쪽의 방사탑.ⓒ홍영철
바다는 제주사람들의 삶의 터전이면서도, 거친 바다와 사투를 벌였던 곳이기도 했다. 용수리포구와 마주하고 있는 절부암의 이야기도 그 중의 하나다. 절부암은 조선말기에 이 곳에 살던 어부 강사철이 대나무를 구하러 지금의 차귀도(예전 지명은 죽도)에 갔다가 풍랑에 휩쓸려 실종되었다. 그의 아내인 고씨는 남편을 찾아서 헤메다가 이곳의 나무에 목을 메어 자결하였다. 자결한 후에 남편의 시신이 아내가 죽은 곳 앞으로 떠밀려왔다고 한다. 이 곳에는 표석과 제단이 마련되어있는데, 제단 옆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제주에 부임한 판관 신재우가 이 이야기를 듣고 그 뜻을 기리는 암각을 하도록 명하였는데,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있고, 지금도 매년 음력 3월 15일에 이 마을사람들이 제를 지낸다고 한다.

▲ 절부암 제단, 매년 음력 3월 15일에 제를 올린다. 오른쪽은 판관 신재우가 고씨의 뜻을 기리기 위해 새긴 암각.ⓒ홍영철
※ 홍영철님은 제주의 새로운 관광, 자연과 생태문화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대안관광을 만들어 나가는 (주)제주생태관광(www.ecojeju.net )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제주의 벗 에코가이드칼럼’에도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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