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짜여행가 양기혁의 중국횡단기] (22) 마오쩌둥 생가가 있는 사오산을 가다

꿈결인 듯 정신이 혼미한 중에 차창 밖의 어둠이 걷혀가고 버스가 속도를 줄여가며 멈춰선다. 휴게소인가 싶어 화장실이라도 갔다 와야겠다생각하고 침대에서 통로로 내려서는데, 옆자리의 사내가 창사에 도착했으니 내려야 한다고 말한다. 몽롱하던 정신이 번쩍 깨이며, 그때서야허둥지둥 꺼내놓았던 책이며 손전등, 수첩 등을 배낭 속에 쑤셔 넣고, 배낭을 머리 위로 올려 메고, 통로를 빠져나와 내렸다.

창사는 엷은 아침 안개에 쌓여 있었다. 터미널 가득 버스들이 가지런히 줄을 맞춰 세워져 있는 사이로 나와 일찍 문을 연 상점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한쪽 구석의 쓰레기 더미에선 악취를 풍기고 몇몇 사내들은 등을 보이고 서서 담벼락에 오줌을 갈겨대고 있었다.

상점 있는 곳에 가까이 가자 화장실이 보여 들어가려는데 입구에 앉아 있는 청년이 불러세웠다. “이콰이.” 손가락 하나를 세우며 돈을 내라고 한다. 1원을 꺼내주고 안으로 들어가니 칸막이 없는 화장실에 소변보는 사람은 없고 몇 사람이 허옇게 엉덩이를 드러내고 쪼그리고 앉아 일을 치르고 있었다. 이곳은 급하게 큰일을 치르기 위해서 돈 내고 들어오고, 작은 것은 주변 구석에서 대충 해결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오산 가는 버스를 알아보기 위해서 버스터미널 건물 안으로 들어갔는데 표 파는 창구는 닫혀 있고, 이제 막 출근하기 시작한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일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지나가는 직원에게 물었다.

“워야오취사오산, 짜이절 상처마(사오산 가려는데 여기서 차를 탑니까)?”
“덩이시아, 나비엔 마이피아오(조금만 기다리면 저쪽에서 표를 판다).”

잠시 후 표를 팔기 시작했는데, 사오산행 버스는 8시 출발이다. 표를 사고(26원), 역 주변 거리를 천천히 한 바퀴 돌고 나서 24시간 영업 중인‘컨더지(肯德基, KFC)’에서 햄버거와 커피 한 잔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버스 탈 때까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나서 금방 잠이 들었다. 밤새 침대버스에 시달린 피로가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얼마 지나서 눈을 떴는데 창밖으로 한적한 농촌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물을 가득 채운 논엔 모내기가 한창이다. 기계를 쓰지 않고 손으로 모를 심고 있는데 여럿이 같이 하지 않고 대체로 부부 두 사람이 하거나 혼자서 일을 하고 있었고, 줄을 맞춰 모를 심는 게 아니라 대충 눈대중으로 적당히 간격을 벌려 모를 심고 있었다. 이미 모내기를 끝낸 논들, 모를 심고 있는 논들, 그리고 모내기를 기다리고 있는 논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어서 가히 곡창지대라 부를만 했다.

사오산 역에 도착하니 다시 마오쩌둥의 생가로 가는 미니버스가 이곳을 찾아오는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는 기념관과 생가를 같이 둘러보고 역으로 돌아오는 패키지 요금으로 10원을 받고 버스표 대신 목에 거는 패용증을 나누어 주었다.

▲ 마오쩌둥 기념관에 전시된  그의 어릴 적 모습. ⓒ양기혁

마오쩌둥 기념관은 거대한 공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마오가 징강산(井岡山)과 루이진(瑞金)소비에트에서 공산주의혁명에 몰두하여 있는 동안 고향 사오산에 남아 있다 국민당군에 살해된 그의 첫 번째 부인 양카이후이, 국민당군에 쫓겨 쟝시(江西)소비에트를 포기하고 장정(長征)을 시작할 때 소비에트에 남아 있다 국민당군에 살해된 막내동생 쩌탄, 우루무치에서 신쟝군벌에 체포되어 살해당한 남동생 쩌민,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가 미군의 폭격으로 전사한 장남 안잉(安英) 등 마오와 그 일가의 동상과 부조물들이 울창한 수목과 함께 곳곳에 설치되어 있고, 중국인 관광객들은 헌화를 하거나 향을 피워 추모하는 의식을 빠짐없이 거행하고 있었다.

(*마오쩌뚱은 사범학교 은사인 양창지의 딸 양카이후이, 장강산에서 만나서 임신한 몸으로 장정을 함께한 허쯔전(賀子珍), 그리고 연극배우 출신이며 문화대혁명 사인방의 한 사람으로 처형되는 장칭(江靑)과 세 번의 결혼을 했다고 한다. 14세에 아버지의 강요로 6살 연상의 여자와 결혼을 하였으나 그가 사오산을 떠난 이후로 찾지 않아 통상 양카이후이를 첫 번째 부인이라고 하는 것 같다. 책에 따라서는 양카이후이를 두 번째 부인이 라고 쓰기도 한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모형의 마오 흉상과 같은 기념품을 팔거나 홍군복장으로 기념사진을 찍게 하거나 향을 피우고 기념헌화를 한다든지하여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곳은 관리인들이 열심히 호객을 하고 있는 반면 자료는 빈약하고 관리가 부실하여 시설물이 함부로 방치된 상태로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사오산에 머물렀던 마오의 학창시절을 보여주는 자료들에는 13세의 소학교 시절 쓴 시와 17세 때 사오산을 떠나기 전 쓴 시들이 전시되어 있다.

▲ 마오가 소년 시절 직접 쓰고 가지고 다녔다는 시 구절. ⓒ양기혁

우물찬가
천정은 네모나고,
주위는 높은 담인데
자갈돌이 뚜렷이 보이고
작은 물고기들이 가운데
몰려 있다.
단지 우물물만 마실 뿐이니
영원히 크게 자라지 못하겠구나.
(1906년 가을, 13세 )

(* 동산 소학교는 환경이 아름다워서 동타이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하 천이 흐르며, 좌우로는 논밭이 펼쳐진다. 학교를 둘러싼 담 안으로 하천이 휘감아 흐르고 푸른 나무가 우거져 있다. 봄이 오면 사방에서 울어대는 개구리소리가 열심히 생활하며 진리를 탐구하는 마오쩌둥의 동심을 불러일으켜 그는 이 시를 써내려갔다. 이 칠언절구는 개구리의 형상과 심리묘사를 통하여 국가명운을 主宰하려고 하는 작자의 위대한 포부를 표현하고 있다.)

▲ 마오가 소년 시절 직접 쓰고 가지고 다녔다는 시 구절. ⓒ양기혁

개구리를 노래함 (1910년)
호랑이 웅크린 듯이 강둑에 홀로 앉아
나무그늘 아래서 정신을 함양한다.
봄이 와도 내가 먼저 입을 열지는 않는다.
어디선가 감히 소리를 지르는 놈들이 있다.

(* 1910년 가을 17세가 된 마오쩌둥은 아버지를 설득하여 샹샹현립 고등 소학당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사오산을 떠나 외부의 더 큰 세계로 나아갔다. 떠나기 전 그는 일본 西鄕隆勝의 시 한 수를 다시 써서 아버지가 매일 반드시 보는 장부 속에 끼워 넣었다.)

▲ 기념관을 둘러보기 위해 모여든 인파. ⓒ양기혁
▲ 마오 생가를 방문하기 위해 늘어선 긴 줄. ⓒ양기혁

시인기념관을 한 바퀴 돌고 밖으로 나와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올라 마오쩌둥 생가로 향하였다. 처음 기념관에 같이 들어간 일행은 관람하는 도중 뿔뿔이 흩어지고 버스에 탄 사람은 혼자였다. 기사는 운전을 하면서 지금은 마오 생가를 방문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오후에 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한다. 옆에 같이 타고 있던 아주머니도 근처에서 식당을 하고 있는지 말을 거들었다. 자기 집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쉬었다가 오후에 생가 방문할 것을 권하였다. 창밖으로 멀리 사람들의 무리가 한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버스기사가 웃으며 그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양기혁<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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