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혁의 중국횡단기] (23) 혼탁한 시대 버티다 끝내 목숨 끊은 시인 굴원

생가와 조금 떨어져 웅장한 모습의 마오 동상이 서 있었다. 거기에도 생가에서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마오에 대한 헌화와 참배를 하고 있었다. 단체로 방문한 사람들은 장엄한 음악을 틀어놓고 다양한 추모의식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들 중국인들에게 마오쩌둥은 여전히 절대적 권위를 지닌 신중국의 국부로서 경외와 흠모의 정이 각별함을 느낄 수 있었다.

개혁개방정책의 시행 이후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로 옮겨가면서 마오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그에 대한 평가가 절하되고 있는 분위기이기는 하지만 월등하게 우세한 군사력을 가진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군에 의해 궤멸상태에 이른 공산당과 홍군을 이끌고, 대장정을 성공리에 마치고 살아남아 결국 국민당을 대륙에서 몰아내고 신중국을 탄생시킨 그의 지도력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음이 확실한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빠른 속도의 경제발전은 빈부격차를 심화시키고 그로 인해서 사회불안이 야기되고 정체성의 혼란도 가져오는데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마오의 사상이 이미 폐기된 구시대의 사상이며 구세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유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마오가 추구한 평등한 사회가 다 같이 못사는 사회가 아니라 다같이 잘사는 사회로 가는 길을 찾아가는 좌표가 되지는 않을까.

▲ 해가 저문 뒤 동정호 파릉광장에서 에어로빅을 하고 있는 웨양의 여자들. ⓒ양기혁

아침에 사오산으로 출발한 버스터미널은 서역(西站)이었는데 사오산에서 창사로 돌아온 역은 남역(南站)이었다. 웨양 가는 버스를 타려고 물어보니 다시 동역으로 가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 하루 창사의 네 군데 버스터미널 중에 세 곳을 거치면서 창사 시내구경을 끝내고 웨양으로 향했다.

버스 창밖은 평화롭고 여유롭다. 물의 고장이라 할 만큼 곳곳에 하천과 호수들이 이어지고 있었고, 물이 가득찬 논은 이미 대부분 모내기가 끝나 있었다.

창사에서 웨양 가는 중간쯤에 ‘미뤄(멱라)’라는 작은 도시를 지나는데 전국시대 말기 혼탁한 시대를 살다간 우국충정의 시인 굴원(屈原)이 울분과 비통함 속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하는‘멱라수(汨羅水)’가 이곳을 지나 동정호로 흘러들어간다.

굴원은 초나라 왕족 출신으로 당시 합종연횡의 대세 속에 진(秦)나라에 대항하여 제(齊)나라와의 연합을 주장하다 반대파로부터 모함을 당하고 유배길에 올라 방랑하는 신세가 되었다. 유배 중에 이곳 호숫가를 거니는 초췌한 몰골의 굴원이 한 어부와 만나 나눈 대화인‘어부사(漁父辭)’에는 이상과 현실 속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는 그의 심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동정호 입구. 보기만 해도 웅장하다. ⓒ양기혁

굴원이 말한다.
“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 是以見放.”
(온 세상이 다 혼탁한데 나 홀로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해 있는데 나만 깨어 있으니, 이런 까닭으로 쫓겨나게 되었소.)
어부가 말한다.
“聖人不凝滯於物, 而能與世推移.”
(성인은 사물에 얽매이지않고, 세상을 따라 변하여 갈 줄 압니다.)
굴원이 말한다.
“吾聞之, ‘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安能以身之察察, 受物之
汶汶者乎?”
(내가 듣건대, 방금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을 털어서 쓰고, 방금 목욕을 한 사람은 옷을 털어서 입는다고 합니다. 어찌 결백한 몸으로 더러운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어부는 그에게 세상과 타협하며 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간다.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可以濯吾足.”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으면 되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발을 씻으면 되는 것을!)

(* 창랑지수(滄浪之水)는 후베이성 성도 우한의 한양(漢陽)과 한커우(漢口) 사이를 흐르는 한수(漢水)가 양자강과 만나는 하류지역. 은자들이 많이 찾는 은둔지로 유명함.)

▲ 동정호에서 생을 마감한 두 시인 굴원과 두보는 동정호를 바라보는 느낌을 각별하게 한다. ⓒ양기혁
▲ 호숫가 길따라 놓여있는 옛 중국 시인들의 시비(詩碑). ⓒ양기혁
▲ 동정호 호숫가에 수많은 시인들의 시비(詩碑)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길게 이어지고 있다. ⓒ양기혁

해가 저물 무렵 버스는 웨양에 도착했다. 택시를 타고 가이드북에소개된 동정호 주변의 설연빈관이라는 한 허름한 호텔을 찾아갔다. 웨양에서 가장 저렴한 숙소 중의 하나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동정호와 악양루가 바로 길 건너에 있어서 다니기가 편리했다. 독방이면서 깨끗하고 소박한 방도 마음에 들었다.

어둠이 깊어가는 동정호가 바라다 보이는 주막집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웨양의 밤을 보낸다. 동정호를 둘러보기 위해서 아침 일찍 배낭을 방에 둔 채 맨몸으로 호텔을 나왔다. 어제 저녁에 호숫가를 걸으며 대충 보기는 했으나 아침에 다시 차분히 한번 더 보고 싶었다. 호숫가에는 수많은 시인들의 시비(詩碑)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 옛 중국 시인들의 시비(詩碑). ⓒ양기혁
▲ 호숫가 길따라 놓여있는 옛 중국 시인들의 시비(詩碑). ⓒ양기혁

중국문학사에 등장하는 시인과 시들이 총망라되어 등장하는 느낌이다. 동정호는 많은 시인과 문장가들의 애환이 서려 있고 시적 영감을 주었겠지만 특히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두 시인 굴원과 두보는 동정호를 바라보는 느낌을 각별하게 한다.

기원전 295년 5월 5일 중국에서 시인의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는 굴원이 동정호의 남쪽 지방을 방황하다 동정호로 흘러드는 멱라수에서 투신하여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다. 단오절인 이날을 중국에서는 굴원을 추모하여 ‘시인의 날’로 지정하였다.

▲ 동정호 호숫가에 수많은 시인들의 시비(詩碑)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길게 이어지고 있다. 중국 문학사가 총 망라된 느낌이랄까. ⓒ양기혁
▲ 옛 중국 시인들의 시비(詩碑). ⓒ양기혁
▲ ⓒ양기혁

그로부터 천년의 세월이 흐르고 중당(中唐)시대인 서기 770년 두보는 성도를 떠나 동정호 남쪽 지방을 유랑하는 생활을 하던 끝에 양자강의 한 지류이며, 동정호로 흘러드는 상강(湘江)의 배 위에서 59세로 병사하고 만다. 다시 천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 아침 안개가 자욱한 동정호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불행한 일생을 마친 두 위대한 시인의 혼이 서려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제 악양루에 들어가봐야 할 시간이 되었다. 본래 악양루는 후한말 삼국시대의 오나라 손권이 수군을 훈련시키기 위한 망루로 지어진 것으로 그 역사가 17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당나라 이후 군사적 목적을 상실하고 3층의 누각으로 개조되어 우한의 황학루(黃鶴樓), 난창(南昌)의 등왕각(騰王閣)과 함께 강남의 3대 명루로 꼽히는데 그중에서도 악양루는 원래의 자리에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유일한 고건축물이라고 한다.

호숫가에 세워진 시비에서 보듯이 많은 시인들이 동정호와 악양루를 소재로 시를 쓰고 문장을 남겼지만 그중에서도 시성(詩聖)으로 일컬어지는 ‘침울비장(沈鬱悲壯)의 시인’두보가 굶주림과 병마에 시달리는 말년에 악양루에 올라 남긴 시‘登岳陽樓’는심신이 쇠약해가는 자신의 비장한 심사를 드러내 보여주는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양기혁

<제주의소리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