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의 제주신화 이야기] (52) 가믄장아기 여성 - 가믄장 아내

우리는 제주도의 많은 아내들에게서 여신 가믄장을 만날 수 있다. 백주또 여신이 제주 할머니들과 그 이미지가 맞물려있다면 가믄장은 중장년의 아내들, 어머니들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여성에게 제한되었던 미지의 영역에 들어가 부를 성취하고 많은 사람에게 되돌려 주었던 김만덕은, 밭을 창조적으로 일구고 부자가 되어 거지잔치를 열어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를 나눠주었던 가믄장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잇는다.


남성들보다 더 용감하게 쟁기로 밭을 갈고, 마치 저승과도 같이 까마득한 바다로 자맥질하면서 바당밭을 개척해 내었던 도전적인 제주의 해녀들도 가믄장 여신의 영향을 많이 받은 여성들이다.


보통 남편들의 일이라 여겨지는, 예를 들면 궤를 옮기거나 벽에 못을 탕탕 박으며 선반을 매다는 일, 전구를 갈아 끼우거나 하는 일을 남편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후딱 처리해버리는 제주의 많은 아내들도 가믄장 원형을 닮은 가믄장 아내들이다.

▲ 유통업으로 벌어들인 전 재산을 기부해 제주도민들을 살려낸 김만덕제주시 건입동 에 있는 김만덕 기념관 내의 사진(사진출처/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자료

남성(남편)이 없어도 스스로 완전하다.

가믄장 아내들은 남성(남편)의 도움을 전제로 하지 않고 자신의 노력과 이해를 바탕으로 일한다. 이 여성들은 남성(남편)이 없어도 스스로 완전하다. 의존적인 것을 거부하는 그녀는 무엇보다 경제적인 성취를 위해 매진한다. 그래서 쪼그려 앉아 애기구덕을 발로 흔들며 손으로는 부지런히 밭을 갈고, 마치 저승길과도 같이 까마득한 바다 속으로 자맥질하면서 바당밭을 개척해 나갔던 것이다.

▲ 해녀, 농부, 어머니였던 제주 여인들.

 

▲ 애기구덕(사진출처/네이버카페north62)

제주의 어머니들은 밭에 나갈 때 애기구덕 안에 아기를 눕힌 채 지고 가 밭고랑에 놓아두고 일을 했다. 아기가 깰듯하면 ‘웡이자랑’(자장가) 노래를 불러주면서 발로는 애기구덕을 흔들어주고 손으로는 김을 맸다. 집에서도 그렇게 많은 일을 했다.


 이런 가믄장아기 아내에게는 휴식이 없다. 부지런하고 적극적이며 추진력이 넘친다. 경제력을 성취해내는 것은 ‘자신’을 잃지 않고 살기 위해서, 의존적으로 살아가지 않기 위해서 필수적이라 생각한다. 삶의 목적이 거기에 있고 그런 만큼 삶의 길도 정확히 정해져 있다.


그녀의 삶은 위선적인 가치들을 거부한다.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위세를 떨거나 부러움을 받기 위해서 부자가 되려 노력하는 것도 아니다.


열심히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녀는 설사 부자라 해도 그것을 과시하려 들지 않으며, 낭비와 허영도 없다. 그녀의 방에는 그림도 없고 꽃도 없다. 유머도 없다. 직구다. 간소하고 건조하게 살아간다. 부지런히 살아가는 길에 일탈이란 없다. 


남편이 자신에게 마치 먼 궨당(친척의 제주어)과도 같은 남편이랄지라도

신화에도 나타나듯이 가믄장 원형이 강한 여성은 누구와 결혼했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가믄장 여신은 가장 약한 막내여도 가장 가난해도, 호기심을 가지고 상대와 상황을 바라보고 타성에 젖지 않은 막내마퉁이를 선택했다. 가믄장이 먹고 바라보고 행하는 것을 같이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마찬가지로 가믄장 아내들은 자신이 가치롭게 생각하는 것에 관심과 애정을 보이는 사람이라면, 그가 별로 힘을 가지지 못한 것이라 하더라도 남편으로 선택했었을 가능성이 많다. 합방하고 서로의 발을 감싸며 온기를 나눴으되 그 발이 다소 시원찮을지라도, 꼭 남편에게 충만한 느낌이 들지 않더라도 남편에게 충실하다. 그런 가믄장 아내들은 자신과의 동행에, 그 가치를 배반하는 것들이 아닌 한 갈등에 빠지지 않는다.


그녀의 사랑은 격정적인 남녀 간의 사랑이라기보다는 인간애에 가깝다. 이런저런 감정들에 우왕좌왕하지 않는 가믄장 아내들은 남편이 자신에게 마치 먼 궨당(친척의 제주어)과도 같은 남편이랄지라도 큰 외로움에 빠지거나 남편 이외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여신 가믄장아기가 늠름하듯이 가믄장아기형 여성은 늠름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귀여운 여인의 역할을 하는 것을 우스꽝스럽다고 느낀다. 결혼생활도 가슴 뛰는 사랑의 느낌으로 산다기보다는 동반자와 같은 느낌으로 사는 게 쉽고 편하다. 뜻과 의지를 나누는 동지나 친구와 같은 결혼관계를 유지해나갈 가능성이 많다.


만약 남편이 가믄장 아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을 뿐 아니라 깎아내리거나 제지한다 해도 가믄장 아내들은 자신이 하려는 일을 중단 없이 추진한다. 그녀가 하는 일에 남편의 승인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현실적인 요구나 상황이 그녀의 의지를 잠시 막아둘 수는 있다 하더라도 그녀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펴 나간다. 그녀의 자립심과 자신감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나온다. 그녀가 일군 경제력의 획득과 같은 것들은 그런 그녀를 반대할 수 없도록 만든다. /김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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