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멍 보멍 들으멍](33) 유쾌한 장수 할망들의 이야기 소굴/ 정신지

▲ 홀로 사는 할망들은 퐁낭과도 같다. 커다랗게 홀로 서서 마을을 지키고, 시원한 그늘 밑으로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또다시 여름이 기다려진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가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소중한 만남을 가져다줄 때가 있다. 시골 길을 걷다가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졌을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계세요?” 하고 용기를 내어 올렛길 끝자락에 있는 놈의(남의) 집 현관문을 두드린다. 위급한 상황에 처한지라 부끄러울 것도 없다. 안에서 누군가가 “들어옵서(들어오세요).” 하길래 얼굴에 철판을 깔고 문을 열었다. 따스한 공기가 풍기는 안방에 할머니 네 분이 담요를 나누어 덮고 둘러앉아 이야기 중이시다.

“저기요, 할머니. 진짜 죄송한데, 저 너무 급해서 그런데 화장실 좀 써도 됩니까?”
그러자 주인 어르신은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손가락으로 화장실을 가리킨다. 잽싸게 신을 벗고 들어간 놈의(남의) 집 화장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다. 타인의 친절이란 늘 고마운 법이지만, 화장실이 급할 때 나타난 할망의 친절은 거의 구세주 격이다.

덕분에 위기를 모면하고, 감사의 말씀을 드리려 뻘쭘히 네 할망 앞에 섰다. 이제 좀 살 것 같으냐며 낄낄 웃으시는 할망들이 정겹다. 어디에 사는 누구냐, 직업이 무엇이냐, 몇 살이냐, 등등. 화장실을 빌린 대가로 나그네의 신상명세에 관한 할망들의 심문(?)이 이어진다. 그 바람에 나는 이미 보따리를 내려  놓고 그들 틈에 끼어 앉았다. 알고 보니 그곳은 동네 할망들의 유쾌한 이야기 소굴이 아니던가?

집주인이자 이 모임의 대장인 꽃순이 할망(가명)은 올해 91세이시다. 그 옆에 앉은 할망이 89세, 다른 두 분이 84세, 83세라니, 그녀들의 나이를 다 합치면 내 나이에 곱하기 10을 하고도 몇 년을 더해야 한다. 게다가 이 집에 들어서기 전에 화장실을 쓸 수 있냐 물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요강밖에 없다 하셨던 이웃집의 다른 할머니는 95세였었다. 두말할 것도 없는 장수마을, 게다가 이곳은 장수할망클럽임에 분명하다.

▲ 할망들이 안방 이불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계신다. 저녁 시간이 되도록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떠는 나를, 그녀들은 약장수라 했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 첨부사진 할망요강: 화장실이 너무 급해 할망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요강을 내 주시던 그녀. 사용방법을 몰라 패스했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게난, 할머니들은 다 이디(여기) 계시고, 할아버지들은 노인당에 계신 거마씨(거에요)?”
“하르방덜(들)은 진작에 하늘나라에 심어가 부렀쪄(데려가 버렸어). 야이들은 갈 데가 어시난 나신디 왔주(이 아이들은 갈 곳이 없으니까 나에게 왔지).”

싱글 할망 경력이 가장 길다는 꽃순이 대장 할망 말씀에 모두가 웃는다. 어떤 하르방은 몹쓸 4.3사건이 심어가(데려가)버리고, 또 어떤 하르방은 몹쓸 병이 심어갔다. 홀로 된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할망들의 모임.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싱글’일 필요가 있다는 부연설명을 해주시는 꽃순이 할망은, 입만 열면 농담이 술술 나오는 이야기꾼이다. 그 기운에 질세라 나도 신나게 떠들어 댄다. 그러다가 우연히 우리 마을에 줄줄이 들어서는 리조트며 주택단지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꽃순이 할망 : “게메, 이디도 저디도 어마져푸게 건물이영 길이영 막 생겸서이. 이녁 마을도 그추룩 햄서?(그러게, 여기도 저기도 넘치도록 커다란 건물과 길들이 많이 생기지. 너희 마을도 그래?)”
나그네 : “많이도 생견마씨(생겼어요). 신문에서 봐신디(봤는데), 우뜨르(중산간) 마을 땅들은 이제 도에서 개발허당 버쳥(개발을 하다못해), 중국인들신디  팔고 있댄마씨(중국인들에게 팔고 있다는데요).”
할망 1 : “게난 한라산 폴앙 어떵 해불젠 그 사름들.(그러니까 한라산을 팔아서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그 사람들)”
할망2 : “멍청한 하르방들, 거 뭐터레 폴아?(그거 뭐하러 팔아)”
할망 3 : “에이, 경해도 한라산은 아니 폴거우다게(그래도 한라산은 안 팔 겁니다).”
꽃순이 할망, 할망 1, 할망 2, 할망 3 (동시다발적으로) : “허이고….”

한숨의 침묵이 잠시 이어지자, 분위기 메이커인 꽃순이 할망께서 갑자기 나에게 화살을 쏘신다. 내가 늘 꺼리지만 한사코 피해 갈 수 없는 물음,  “게난, 시집은 가서(그나저나 시집은 갔느냐)?”. 서른이 넘어 시집을 안 갔다고 하면 가끔 어르신들은 나를 ‘이상한 여자’, 혹은 ‘가여운 여자’취급을 하신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꽃순이 할망이 정곡을 찌르며 하신 한 마디가 압권이다.  “옛날엔 스물만 나도(되어도) ‘버린 여자’랜(라고) 해서.”

▲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길이 들어서고, 이제는 한라산의 땅까지 팔아먹을 작정이라며 장수 할망들은 한숨을 쉬신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 동네 장수할망들이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러 오는 꽃순이 대장 할망의 집. 현관에서 부터 온기가 전해져온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이상한 여자, 가여운 여자까지는 들어봤으나, 버린 여자는 또 처음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녀들에게 요즘세대의 결혼실태에 관해 설명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뭐라고 말을 해도 변명이 될 분위기니 그녀들에게 다시 화제를 돌린다.

나그네 : “게난 할머니들은 언제 시집가션마씨(시집가셨나요)?”
할망1 : “난 열아홉.”
할망2 : “난 한 스물?”
할망 3 : “나도 경 갔주(그쯤에 갔지).”
꽃순이 할망 : “음….난 한 열셋?”

그 바람에 또 까르르. 못 말리는 꽃순이 할망은 늘 그렇게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농담을 하시기에 아흔이 넘었다는 사실이 갈수록 무의미하다.

할망 2 : “그땐 막 젊어나신디(젊었었는데), 4.3사태 넘어가부난(넘어가니) 나이가 쑥쑥 들어부렀주게(들어버렸지). 니는 낳지도 않은 때에(너는 태어나기도 전에), 더러운 사건이 일어나서 ‘탕’, ‘탕’ 사름들이 죽어부난 게(죽어버려서).”
할망3 : “북쪽은 폭도랜 허곡(폭도라고 하고), 알녁은 경찰이랜 허곡, 웃 사름은 아래를 죽이져(죽이고자), 아래는 웃 사름을 죽였주. 경해도 잡지 못허난(그래도 못 잡으니까) 계엄령을 내령이네(내려서) 봐진 사름 다 쏴불랜해서(보이는 사람을 다 쏘아버리라고 했지).”
할망1 : “게난 위알쪽 사름들이 ‘콕’ 갈라젼(그러니까 위아래 마을 사람들이 딱 나누어졌어). 그뿐이냐 게, 고튼(같은) 마을 살아도 서로가 못 믿엉이네(못 믿어서) ‘이 집이 영 햄수다(이렇게 했습니다)’, ‘저 집이 영 햄수다’, 몬딱 갈라젼(다 나누어진 거지).”
꽃순이 할망 : “허이고, 소삼(4.3), 소삼…. 그때가 참….”

그렇게 그녀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는 사이, 벌써 시계가 저녁 여섯 시를 가리킨다. 할망들도 원래 같았으면 벌써 집에 가서 밥을 짓고 뉴스를 보며 각자의 아랫목에 앉았을 시간인데, 내가 와서 약장수처럼 떠들어대는 바람에 귀가시간이 늦었다 하신다. 하지만 웃으면서 다음에도 또 약 팔러 오라시던 꽃순이 할망, 다음엔 아예 집에서 자고 가라 하신다. 그 말씀 한마디에 왜 갑자기 가슴이 찡했던가. 꼭 그리하리라는 즐거운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나는 큰 소리로 ‘고맙습니다’ 하고 그녀들과의 작별을 고했다.
 
처녀들과의 수다도 좋지만 할망들과의 수다는 배울 것이 많아 좋다. 짝꿍이 계신 할망과의 수다도 좋지만, 홀로 사는 할망과의 수다에는 굵게 홀로 뻗은 뿌리가 있어 더더욱 좋다. 홀로 사시니 어떠냐고 묻자, 할망이 그랬다. “때가 되면 혼자 살아도 좋지. 다 때가 있는 법.”

화장실을 빌려 쓰고, 할망들 이야기도 나누어 듣고, 올렛길을 굽이굽이 돌아 찾아간 할망의 집에는 늘 어딘가 보물이 숨겨져 있다. 길을 걷다 우연히 근사한 팽나무를 만나는 기쁨과도 같이, 걷는 자에게는 무언가 나타나도 꼭 나타난다. 하지만 언제나 말이 앞서고 행동이 뒷전인 것 같은 나. 약장수의 길은 아직 멀고도 멀다. 할망 말씀처럼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라니, 때를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말을 되뇌며 길을 걷는다.

그나저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꽃순이 할망의 ‘버린 여자’라는 말은 충격적이다. 이 또한 놓쳐서는 안 될 ‘때’일 터인데.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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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지는 ?

   

이 여자, 택시 기사들과 대화 나누길 즐기는 ‘수다쟁이’다. ‘역마살’도 단단히 타고났다. 거기에다 ‘촌스러움’까지 좋아하는 독특하고 야무진 여자다. 그녀의 이름은 정신지(32). 파주·부산 출신의 부모님 아래 서울서 태어나 여섯 살에 제주로 이민(?) 왔지만 스무살에 다시 서울로 나갔다가 일본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지역연구학’이라는 인문학을 전공했다. 그동안 세계 17개국의 섬·지방·대도시를 떠돌며 사람과 집단, 그 사회에 대한 이해를 넓혀왔다. 지난 봄, 일본의 국립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에서 문학박사 과정도 수료했다. 이제 12년간의 지구촌 유목 생활을 마치고, 태어난 곳은 아니되, 자신을 성숙하게 키워준 ‘진짜 고향’ 제주로 지난 봄 돌아와 부모님이 살고 있는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에 짐을 풀었다.  매주 한차례 <제주의소리>를 통해 제주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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