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훈의 제주담론] (21) 우치난츄의 섬, 오키나와 2

▲ 비세의 바다. 오키나와 북부 나고시 모토부초 비세의 앞바다 바로 코앞에 이에지마가 있다. ⓒ박경훈

오키나와의 바다는 온통 에메랄드빛이다. 이 비취색과 블루의 조화는 오키나와만의 빛깔일 것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얻은 정보 중 하나는 오키나와의 바다에서는 예의 그 비릿한 갯내음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안내자의 설명을 빌리자면, 산호섬인 오키나와는 섬 전체가 온통 석회질의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섬의 외연에는 두터운 산호층이 살아 있어 이 산호에 서식하는 각종 해조류와 어류 등이 해수의 플랑크톤을 잡아먹기 때문에 맑은 날엔 수심이 20m에 이를 정도로 수질이 깨끗하고, 또한 그로 인해 갯내음 또한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일행은 모두 콧구멍을 바다를 향해 한껏 열어 바다의 내음을 들이마셔 음미해 보았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갯내음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위의 사진처럼 파도의 포말은 멀리 난바다에 머물고 그 안쪽은 산호생태계에 의해 가로막혀 태풍 때나 아니면 큰 파도가 해변까지 이르지 못한다. 제주의 바다풍경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바다를 가진 오키나와의 눈부신 해변풍경은 오키나와의 내력을 아는 사람들에겐 왠지 비현실적이면서, 어쩌면 기형적이기도 한 슬픈 아름다움을 동시에 전한다. 진혼곡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산센((三線)’의 맹랑한 현음(絃音)에 실린 우치난츄의 목소리만큼 언밸런스하게 어우러지는 이 모순의 하모니는 또 무엇인가?

아물지 않는 상처, 오키나와 지상전

▲ 오키나와전 당시 부모를 잃은 두 형제. ⓒ박경훈

오키나와의 6월 23일은 지방정부인 현청이 지정한 지방공휴일인 ‘위령의 날’이다. 1962년부터 현의 법정공휴일로 정했다. 이날은 전 오키나와 주민들이 하나의 전쟁을 추념한다. 바로 태평양전쟁 당시 벌어진 오키나와전이 그것이다. 이날 오키나와 주민들은 마부니 언덕이 있는 오키나와 남부의 ‘오키나와현립평화공원’에 모여 기념식을 갖고, 곳곳에 있는 위령비에 헌화하고 통곡한다.

또한 학교에서는 6월 22일엔 학교별로도 이날을 기념해 전쟁의 비극과 평화를 되새기는 각종 행사가 열린다. 왜 6월 23일인가? 이날은 ‘위령의 날’이라 불리는데, 무엇을 위령한다는 말인가? 1945년 바로 이날, 오키나와 수비군 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牛島 満, 1887년~1945)’가 참모장 ‘죠 이사무’와 함께 자결했다. 그러나 오키나와 주민들은 우시지마 사령관이나 일본군을 위령하지 않는다.

그들이 위령하는 영령들은 오키나와전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민간인들이 중심이다. 이날 오키나와전을 경험했던 세대나 바로 다음 세대들은 복잡한 심정의 지난 시간들을 반추하면서 회한에 젖는다. 어쩌면 현재 오키나와가 처한 모든 상황이 바로 태평양전쟁 당시, 가장 비극적인 전장의 하나였던 오키나와전 때문이다.

 

▲ 오키나와 상륙전 당일의 오키나와 카데나 해변의 미상륙군과 해군함정들. ⓒ박경훈

1945년 7월 2일. 오키나와전의 본진이었던 제10군 사령관 스틸웰 대장은 류큐 전역의 전쟁 종식을 공식선언했다. 바로 6월 23일 우시지마 일본군사령관이 자결했기 때문인데, 그가 자결했다고 오키나와전이 종결된 것은 아니었으며, 그 후로도 전투는 계속되어 잔존 오키나와 수비군 대표와 미군이 정식으로 항복문서에 조인한 것은 9월 7일이었다. 실제로 6월 23일에서 30일 사이에 전사한 일본군이 8,975명, 포로가 3,809명(이 중에서 907명은 노동자)이나 된다.

이후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하고, 9월 2일에 도쿄만에서 일본군의 항복조인식이 있었다. 오키나와전의 최종정리는 9월 7일에 류큐 제도에 있던 일본군 지휘관들이 오키나와 섬에 출두하여 ‘15,000명이 넘는 류큐 주둔 일본육해군 장병들의 완전한 항복을 나타내는 무조건 항복문서’에 서명함으로서 끝을 맺는다. 항복조인식은 제10군의 후신인 류큐군 사령부에서 10분간 거행되었다.

하지만, 이 항복조인으로 전쟁이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길고도 험난한 전쟁을 위한 기지의 섬으로서의 오키나와의 전후현대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전쟁보다 결코 덜하지 않은 장기지속의 ‘일미양속시대(日美兩時屬代)’가 열린 것이다.

제1회 섬관광포럼에 참여해 우리 제주와도 인연이 있는, 오타 마사히데(大田昌秀) 전 지사는 전쟁 당시에 오키나와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철혈근황대(鐵血勤皇隊)’로 동원되어 오키나와 전투를 직접 치렀다. 동기생 125명 중 살아남은 학생은 불과 37명이었다. 그는 언론과의 한 인터뷰에서 “전후의 저의 인생은 위령의 인생, ‘행복해지면 안 된다’라는 마음이 늘 가슴 속에 있다.”라고 피력한 바 있다.

오키나와 전쟁은 오타 전 지사와 오키나와의 원점인 셈이다. 제주도민이 오늘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빠뜨릴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 4.3이듯이, 오키나와 주민들의 삶에 있어서 오키나와전의 역사적 경험과 기억은 모든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다.

오키나와전, 흔히 일본인들이 표현할 때,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국내 영토에서 유일하게 지상전(地上戰)이 이루어진 전장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일본적인, 소위 ‘야마톤츄’들의 사고방식에서 기인하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일본 본토를 빼고 당시 아시아에서 지상전이 벌어지지 않은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지극히 자의적인 표현일 수밖에 없다.

당시 전몰자는 200,656명으로 집계되고 있는데, 그중 오키나와 출신자가 122,228명이었다. 일반 현민(県民)이 94,000명, 군인 군속이 28,228명이었으며, 미군이 12,520명, 기타 65,908명이었다. 이 중 기타 인원에는 조선인 징용자 2만여 명이 포함되어 있다. 죽음에 대한 수치(數値)들은 때로 그 수치들이 의미하는 죽음과는 무관하게 또는 죽음을 여과시키거나 반감시키는 효과가 있다. 즉, 죽음의 피 냄새와 아비규환의 살육의 현장감은 거세되고, 심지어 그 죽음을 추체험하는 상상력마저 탈각시키는 냉정한 효과가 있는 것이다.

저 수치들이 의미하는 것은 오키나와전이 ‘철의 폭풍’이었으며, ‘피의 바다’였다는 것이다. 당시 40여만 명(1940년대에 류큐 제도의 전체의 인구는 약 80만이었으며, 절반 이상인 약 43만 5천 명이 오키나와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오키나와 주민 중 70% 정도인 30만 명 이상이 남부 오키나와에 몰려 있었다.)이던 오키나와 본섬 주민들 중 1/4이 희생당한 것이다. 그들은 아무런 죄 없이 전장의 한가운데서 죽어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타 전 지사의 고백처럼, 오키나와인의 삶은 전전과 전후로 나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경계의 미술관, 사키마 미술관

▲ 사키마 미술관의 위치도. 후텐마비행장 부지를 파고든 형국이다. ⓒ박경훈

사키마 미술관은 오키나와를 방문하는 이는 반드시 들러야 할 정도로 의미 있는 미술관이다. 미술관이 반드시 들러야 할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이 작은 도시의 작은 미술관(정말 작은 미술관이다.), 그것도 개인이 운영하는 사설미술관이라는 점에서 놀라울 따름이지만, 정작 이 미술관을 찾아가 보면, 왜 많은 사람들이 이 미술관을 찾게 되는지, 왜 이 미술관이 작은 미술관이 아니며, 왜 이 미술관이 단순히 개인의 사설미술관이 아닌지를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오키나와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미술관의 위치와 미술관의 가장 중요한 대표작으로서 바로 오키나와전을 연작으로 그린 ‘마루키 부부’의 <오키나와전쟁도>가 있기 때문이며, 이 미술관 건물 자체가 바로 오키나와전과 미군기지의 이중 모순 속에 오키나와인의 삶을 건축적으로 구현해냈기 때문이다.

이 미술관은 예사 미술관이 아닌, 사설이지만 가장 역사적이고 공적인 미술관의 역할을 하고 있는, 또한 현재의 오키나와의 모순을 관통하는 예술과 건축의 의미를 동시에 구현하는 오키나와의 살아 있는 미술관이기도 하다. 이 미술관의 전전과 전후의 이중 모순의 경계, 또는 바로 인접한 후텐마기지와 주변 주택가의 경계, 즉 점령지와 피점령지와의 경계에 걸쳐 있는, 실재하는 진정한 오키나와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미술관에는 ‘마루키 부부’의 <오키나와전쟁도>가 대형작품으로 걸려 있어 압권을 연출한다. 그 거대한 평면이 던져주는 이미지는 그 자체로 오키나와인들에게 오키나와전이 가지는 의미와 상흔의 크기를 웅변하는 듯해서 스스로 숙연해지게 한다. 그리고 처음에는 자세히 눈에 들어오지 않던, 늙은 노부부 화가의 손길을 하나하나 거친 그림의 세부, 장면 장면들은 말로서 다 표현할 수 없는 사건의 내력과 슬픔의 여백까지 담아내고 있어, 오키나와 민중이 처했던 참상을 공감하게 한다.

더욱이 방문객을 더 숙연하게 하는 것은 여느 일반적인 미술관과 달리, 관장인 사키마 씨와 그의 부인, 따님까지 나서서, 각자 역할을 분담해가며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에게서 마음으로 열려 있는 미술관의 모습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감명을 받는다. 흔히 우리가 접하는, 직원들이 운영하는 미술관들과는 기본적인 태도부터 다른 미술관이었다. 아직까지 국내에 어느 곳에서도 이런 미술관을 본 적이 없는데, 이곳 오키나와는 물량과 재원의 크기에 관계없이 아담하지만 엄청난 역사적 무게와 정신적 부피를 지닌 미술관을 가장 비극적인 장소에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개인의 힘으로.

 

▲ 사키마 미술관의 여러 모습(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사키마 미술관 전경. 미술관 로비에 걸린 작품으로 미국과 미군 그리고 일본 속의 오키나와를 표현한 대형작품이다. 사키마 미술관의 대표작으로 마루키 화가 부부가 그린 ‘오키나와전쟁도’ 앞에서 미술관 관계자가 작품을 설명하는 모습. 미술관의 옥상 공간.(이곳은 오키나와전과 후텐마기지와의 공간적 긴장관계를 건축적으로 표현한 공간이다. 앞의 계단은 6개이며 멀리 보이는 것은 23계단으로, 오키나와 종전기념일이자 위령의 날인 6월 23일을 상징한다.) 계단 최상층부 전망대의 렌즈구멍은 6월 23일 일몰시간에 맞추어져 있어 오키나와전의 비극을 추모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구멍을 통해 보이는 후텐마기지의 활주로. ⓒ박경훈

주민에게 강요된 ‘전진훈(戰陣訓)’의 실행파일, ‘옥쇄(玉碎)’

일본은 이오지마(硫黃島)가 무너진 후 본토결전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 끌기 작전을 이 섬에서 벌이기로 한다. 이른바 사석작전(捨石作戰)이 그것이다. “큰 것(일본본토)을 위해 작은 것(오키나와)은 버려라.”라는, 바둑에서 따온 작전의 이름이었다. 이 작전은 일본본토의 최후결전을 준비하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지연작전이었다. 이 작전에 일본은 오키나와 주민의 1/4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총력전을 펼친다.

1945년 3월 26일 미군의 케라마(慶良間) 열도 상륙으로부터 시작된 전투는 4월 1일 오키나와 본섬 상륙, 6월 23일 남부전선에서 우시지마 사령관의 자결로 공식 전투가 종료된다. 이 총력전에, 수십 년간 ‘강요된 자발성’과 본토인과의 차별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인 동화의 노력을 해온 오키나와인들은 애국적 자세로 헌신하나, 전 주민의 1/4이 죽음을 맞는 대참사로 귀결된다.

또한 그 죽음은 적 앞에서 장렬히 전사하는 소위 ‘국가주의’적 죽음도 아니었다. 많은 오키나와인들은 오키나와 방언을 쓴다는 이유만으로 스파이로 내몰려 죽음을 당해야 했고(이 중에는 특히 조선인 징용자들도 다수 포함된다.), 최후에는 천황과 일본제국을 위해, 집단자결을 강요당했다. 그 전란의 와중에서 오키나와인들은 오키나와사범학교 학생들의 ‘철혈근황대’가 되었건 히메유리여학교의 ‘학도간호대’가 되었든지 간에 결국 소모품에 불과했다.

▲ 히메유리 기념관 전시실 벽에 걸린 히메유리학도간호대의 희생자 사진. 당시 히메유리여학교의 학도간호대원 총 240명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박경훈

전쟁이란 피아가 승부를 가르기 위한 전투를 치르는 것을 말한다. 그것도 고전적으로는 정규병끼리의 전투를 치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국민국가시대 이후, 전쟁은 전후방 군인과 민간인의 구별을 두지 않는 총력전의 양상으로 변모해왔다. 그러나 오키나와전은 이러한 전쟁사의 기본적인 지식으로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다른 전쟁이었다.

그리고 오키나와섬은 슬픈 내력을 담은 전장이기도 했다. 그러한 슬픈 내력의 이면에 감춰진 오키나와인들과 일본제국과의 인연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기억만으로도 여전히 강력한 전율을 전하기에 충분하다.

‘집단자결(集團自決)’, 오키나와전의 10만 민간인 희생을 관통하는, 오키나와에서만 벌어진 현대사의 사실이다. 오키나와전 당시, 일본군의 총알받이로 숨진 이들 이외에 주민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들이 발생한다. 오키나와에서는 주로 게라마제도(慶良間諸島)의 도카시키섬(渡嘉敷島), 자마미섬(座間見島), 게루마섬(慶留間島) 순으로 그리고 오키나와 본도요미탄촌(讀谷村)의 동굴과 남부의 동굴과 참호, 문중묘 등지에서, 이에섬(伊江島)과 구메섬(久米島)을 비롯한 본도 주변의 여러 섬들에서 집단자결이 발생했다.

또한 이러한 집단자결에는 주로 수류탄이 동원되었고, 쥐약, 청산가리, 농기구, 면도칼, 식칼 등 생명을 끊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동원되어 아비규환을 만들어 냈다. 그것도 친부와 친자 간에.

이는 전적으로 일본제국의 황국신민화 교육의 결과이기도 하며, 당시 미군에 점령당했을 때 벌어질 만약의 사태에 대해, 거의 세뇌공작에 가깝게 선정선동을 편 일본군의 책동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남양군도에 징용, 징병 갔다 살아온 생존자들의 증언에 자주 등장하는 말로 ‘와전옥쇄(瓦全玉碎)’란 말이 있다. ‘하찮은 기와로 온전하게 남기보다는,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 말인데, 당시 일본은 이 와전옥쇄를 전 군에 강요했고, 심지어 민간인들에도 강요했다.

 

▲ 전쟁 중 병사들에게 지급된 전진훈의 하나. ⓒ박경훈

‘전진훈(戰陣訓)’이란 것이 있다. 1941년 1월 8일 태평양전쟁의 개전을 앞두고 육군대신이었던 ‘도죠히테기(東條英機)’가 일본군인이 전장에서 지켜야 할 ‘도덕과 마음의 자세’를 전군에 내린 훈령이다. 전진훈의 체계는 서(序)와 본훈(本訓) 1, 2, 3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본훈 제2의 8조 ‘이름을 아낀다’조에는 “창피함을 아는 자는 강하다. 항상 고향이나 가문의 체면을 생각하고 열심히 분발하여 그 기대에 보답해야 한다. 살아서 포로로서의 창피를 당하지 말고, 죽어서 죄과의 오명을 남기지 말라.”라는 부분이 있다.

바로 이 본훈이 태평양전쟁의 말기, 패배에 임하여 그토록 많은 옥쇄와 자살공격을 만든 기원이다. 즉, 절대적인 포로의 절대부정논리는 결국 전투에서 패한 병사에게 ‘옥쇄’ 이외의 다른 길을 인정하지 않아 전장의 수많은 목숨을 헛된 죽음으로 몰고 갔다.

‘아투 섬(Attu Island)’은 북극과 연결된 ‘베링 해’를 싸고 있는 알류샨 열도의 ‘니어 제도’ 최서단에 위치한 섬이다. 1942년 일본이 점령했을 때는 ‘아쓰타 섬(熱田島)’이라고 불렸는데, 일본은 이곳에 2500명의 수비대를 주둔시켰다. 미국은 이듬해 5월 이 섬을 탈환하기 위하여 상륙작전을 감행한다. 수비대는 보름 이상을 끈질기게 항전하다 거의 궤멸당하고, 5월 29일 수비대장 ‘야마자키’ 대좌가 이끄는 최후병력이 자살돌격을 감행해 전원 옥쇄한다.

▲ 옥쇄 후의 아투 섬의 일본군 시신들. 당시 일본신문들은 “옥쇄 1호 아츠섬에서”, “황군의 정화! 야마자끼부대 전원 옥쇄”라고 보도했다. ⓒ박경훈

미군들은 이를 ‘반자이 어택(banzai attack)’이라고 불렀다. 이 ‘옥쇄’가 태평양전쟁 최초의 자살돌격이었다. 이후 동남아시아의 섬을 지키다 미군에 패한 일본군들의 옥쇄가 줄을 잇기 시작한다. 사이판, 타라와, 이오지마 등 끝도 없는 옥쇄의 행진이었다. 통상적으로 전상자가 부대정원의 30% 정도만 되어도 항복하여 포로가 되는 것이 대부분의 군대이나, 일본군의 경우에는 사령관 이하 수천 명의 부대원 중에 단 한 사람의 생존자도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전진훈’을 몸소 실행한 결과이기도 하다.

▲ 오키나와전에서 한 가족이 집단자결한 모습. ⓒ박경훈

오키나와전 당시 집단자결의 비극도 바로 이 ‘전진훈’을 근간으로 하는 일본군의 전장에서의 태도에 기인한 바 크다. 그들이 패전을 앞두고 이러한 군인들의 준칙을, 황국신민관에 비추어 오키나와 주민들에게도 강요했던 데서 10만 주민의 희생과 수천 명의 집단자결의 비극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에게 ‘존 웨인’의 <유황도의 모래>라는 전쟁영화와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라는 영화로 유명한 ‘이오지마(硫黃島)’는 세계전쟁사상 유례없을 정도의 치열하고도 처절한 전장이었다. 남태평양의 작은 점 같은 이 섬에서의 전투는 1945년 3월 26일까지 최장 36일 동안 전개되었다. 11만 명의 병력이 투입된 이 전투에서 미군의 사상자는 19,189명으로 사망자는 무려 6,821명, 일본군은 사망자만 해도 21,000여 명. 최후로 남은 300여 명의 일본군도 옥쇄로 마감한다. 일본군 수비대 총사령관 '구리바야시 다다미치(栗林 忠道)'는 끝내 그 시체조차 찾지 못하고 말았다.

이러한 이오지마의 패배는 일본군들에게는 충격적인 것이었고, 거의 전멸하다시피한 일본군의 죽음은 뒤이은 전투를 앞둔 오키나와 주둔 일본군들에게는 공포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결과 오키나와의 일본군은 이오지마에서의 미군점령의 결과를 대폭 악용한다. 즉, 미군이 이오지마를 점령했을 때, 항복한다고 해도 남자들은 사지를 잘라 다 죽이고, 여자들은 집단 강간을 한 후 다 태워 죽여 버렸다며, 항복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낫다고 광범위하게 유포시킨다.

▲ 한 감독의 두 영화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두 영화는 동시에 촬영된 일란성 쌍둥이 영화다. 한 전장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적과 적의 시선으로 바라본 하나의 전장에 관한 진혼곡. ⓒ박경훈

이러한 일본군의 선전선동에 오키나와 주민들은 “어차피 죽는다. 죽더라도 짐승 같은 미군들에게 능욕을 당하고, 결국엔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느니 스스로 죽는 게 차라리 낫다.”라는 ‘전진훈’의 예에 따른 판단을 내리게 된다. 결국, 미군에 대한 제한된 정보와 함께 집단자결의 순수성을 독려하고 급기야 옥쇄를 강제했던 일본군의 정책에 의해 대규모 집단자결이라는 전대미문의 비극이 일어나게 된다. 말이 자결이지 이는 일본제국과 일본군이 오키나와인들을 집단학살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전후에 많은 오키나와인들은 그들의 이 허망하고 비인간적인 죽음 앞에서 뼈를 깎고 살을 태우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결국 그 비극적인 죽음이 일본의 의도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간파한 그들은 이를 ‘집단학살’로 규정한다. 일본군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장악당한 상태에서 그들의 의도에 의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오키나와인들에게 전쟁의 기억은 도착적이면서 분열증적인 것이기도 했다. 

▲ 사키마미술관에 전시된 마루키부부의 <오키나와전쟁도>의 부분. 왼쪽 상단부에 서로 노끈으로 목을 졸라 죽이는 처참한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박경훈


“동굴 안에서 일본군은 아기가 울면, 그 울음소리 때문에 미군에게 들키니까 찔러 죽이겠다고 했어요. 또한 미군에게 항복하면, 여자는 강간당하고 남자는 탱크에 깔려 죽는다고 일본군에게 들었지요.”(당시 20세의 생존자 증언)

“사이판에서 남자를 줄지어 세워 놓고 탱크로 밀어 죽였다고 일본군이 발표했습니다. 미군이 여자는 모두 강간한다는 말을 듣고 스무 살이었던 누나도 죽겠다고 했죠.”(당시 12세 생존자 증언)

당시에 이런 식의 집단 자살로 죽은 오키나와인들은 무려 1000여 명이 넘는다 한다. 일본군 수비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우지시마 중장은 그 자신이 자결하면서도 끝내 유언으로 “최후의 일인까지 천황을 위해 옥쇄할 것”을 명령했다.

그 결과 최후의 소탕전 와중에서 대부분 집단자결이 일어나게 된다. 본토 출신의 일본군 장교들과 군인들은 오키나와 주민들을 끝까지 본토진공을 늦추는 총알받이로 ‘사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목숨은 동족의 생명이 아닌 식민지의 ‘자산’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의문이 남는다. 아무리 정보가 제한되고 강제되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광범위하게 일어난 집단자결의 토대가 무엇인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의 배경에는 일본의 오키나와 지배전략과 강제병합과정과 오키나와인의 전장체험 속에 해답이 있다.

메이지 이후 류큐처분으로 오키나와를 제국에 편입시킨 일본은 군사력을 동반한 강제적 병합의 다른 면에서 소위 ‘구관온존(舊慣溫存) 정책’을 펼친다. 류큐왕국 멸망 당시, 류큐지배층의 저항이 거세게 일었다. 이에 메이지정부는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는 정책을 펼치는데, 이를 이르는 말이다.

이 정책의 결과 오키나와현은 일본본토보다는 뒤늦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징병령, 헌정 및 선거를 시행하는 등 법제도적 통합을 추진한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오키나와인의 생활문화 전반을 일본문화로 통합하는 정책을 전개하는데, 소위 ‘황민화교육’을 강화한다. 이를 위해, ‘오키나와 방언’을 폐지하고 ‘표준어(일본어)’ 사용을 강제하였고, 소위 황국의 신민으로서의 ‘국민정신’을 주입하기 시작한다. 또한 ‘생활개선운동’이라 하여 오키나와 고유의 문화를 미개한 풍습이라고 열등시하는 등 오키나와문화와 일본문화와의 차별정책을 시행한다.

돼지 인분사육문화로서 제주도와 유사한 오키나와 통시가 비위생적이며 미개한 문화라고 사용하지 못하게 금하였던 것도 이 시기다. 오키나와의 이러한 일본화과정은 새롭게 커가는 학생층을 중심으로 한 젊은 세대들에게는 새로운 근대국가 일본의 정상적인 국민이 되고자 하는 일본화에 대한 강력한 열망을 지니게 했다.

즉, 이 그룹은 일제가 시행한 황민화교육의 최대 수혜자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전진훈은 곧 이들이 일본인과의 동일시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행동준칙이 되었고, 이들에게서 자발적인 옥쇄의 실천을 끌어내게 된다.

역사학자인 ‘하야시 히로후미(林博史, 간토가쿠인대학 교수)’는 집단자결의 사례를 분석하여 집단자결의 다층적 측면을 밝혀낸다. 일본군에 의한 직접적인 강제나 학살이 아닌, 주민들끼리의 집단자결을 주도한 세력은 1그룹이 촌장, 구장, 순사, 학교장 등 각 촌의 지도층들이었다. 2그룹은 17세~45세 사이의 재향군인이나 방위대원 등 군대 경험자들, 3그룹은 17세 미만의 학생이나 조직된 소년들로 구분할 수 있는데, 주로 1, 2그룹이 집단자결을 주도하고, 3그룹은 이를 지지하며 실행에 옮겼다. 나머지 일반주민(주로 여성들), 노인과 아이들은 의사결정을 하지 못했다.

1그룹인 지도층은 일본군의 정책을 적극 지지할 수밖에 없었고, 2그룹은 소위 일본군으로 징병되어 중국과 동남아 등지의 전장을 체험한 그룹으로, 이들은 실제 참전하여 일본군의 만행을 자행했거나 목격한 그룹이었기에 일본군이 행했던 잔학한 행위가 미군에 의해서도 똑같이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에 방위대나 호향대 등을 조직해 끝까지 싸웠고, 더 나아가 자결을 유도하는 주도세력이 되었다.

▲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제주의소리

3그룹인 17세 미만의 소년들은 오키나와 일본화과정의 가장 큰 수혜자 그룹으로 황민화교육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그룹이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집단자결을 실행한다. 이들이 주도한 결과 일반주민들 다수, 특히 여성들과 노인들 그리고 아이들은 의사결정도 없이 가장 큰 피해를 당하는 집단이 된다. 

오키나와전 당시 85명의 주민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극적인 집단자결의 장소, 치비치리동굴(이번 여행코스에는 빠져 있다.)을 발견하고 이곳의 가이드임을 자처하는 쇼이치 씨는 “그들(일본제국)은 살아있으면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라는 군국주의 교육을 시킵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동물적 충섬심’이라고 불릴 정도로 철저한 군국주의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그로 인해 이 동굴에 있던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적에게 건네줄 수 없으니 자기 손으로 죽이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라 생각하고 어머니들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칼과 낫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그렇게 85명이 여기서 죽은 것입니다.”(치바나 쇼이치, 요미탄촌 시민)

죽음에도 여러 종류가 있으리라. 죽음을 비교한다는 것은 코미디 같은 이야기지만, 죽음 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것이 이 오키나와 주민들의 집단자결이 아니었을까? 숱하게 많은 주민들이 죽음을 맞지 않아도 될 상황, 그 피해갈 수 있었던 수많은 선택지들을 남겨놓고 남편이 아내를, 부모가 자식을 서로 죽일 수밖에 없던 상황은 거의 정신분열증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도 오늘 오키나와의 거리를 걸으면서, 제주도의 4.3 이후 모든 어머니들의 언어였던 “살암시믄 살아진다.”라는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래도 모진 것이 생명이라고.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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