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훈의 제주담론] (21)  우치난츄의 섬, 오키나와 2 下 

▲ 오키나와전 당시 생존 어린이의 모습. 다큐동영상에서 캡처한 이 어린이는 미군에 의해 구출된 상황에서도 다른 화면으로 바뀔 때까지 내내 떨고 있었다. 이 아이가 혼자 성장할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질 뿐이다. 지금 살았다면, 80이 넘었을 나이다. ⓒ박경훈

1968년 11월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오키나와의 정신장애인은 23,140명으로 추산되는데, 그중 분열증 같은 이른바 정신병은 본토보다 2.5배나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그중에서 71,2%는 전혀 치료받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었다.

또한 장애인 가운데는 남성 비율이 높고, 연령은 30~40대가 많았는데, 이 연령대의 남자들은 오키나와 전투가 일어났을 때, 소년시절이 끝나고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절망적인 전투에 참가를 강요당했던 사람들이다. “밭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여성이, 방치된 정신이상자가 휘두른 낫에 머리와 어깨에 중상을 입고 입원 중이며, 동네를 돌아다니며 함부로 폭력을 휘두르거나 소리를 질러대는 광인들이 부지기수였다.(오에 겐자부로, 2005)”라고 한다.

필자의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으면, 제주도에도 이런 광인들이 많았다. 동네마다 소위 ‘미친년’이라 불리는 광인들이 다수 있었고, 제주시만 해도 ‘로타리 울보’ 등 ‘미친놈’, ‘미친년’으로 표현되었던 광인들이 제법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실 이들은 모두 4.3이 낳은 시대의 자식들이었듯, 오키나와의 그 지옥 같은 전장을 겪은 주민들은 정신분열증의 후유증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결7호 작전(決7號 作戰)과 제주의 지상전에 대한 상상

‘결7호 작전’이라는 게 있다. ‘결(決)호 작전’은 전황이 기울기 시작한 1945년 2월 9일 일본방위군총사령관이 미군과의 본토결전에 대비하여, 미군이 본토로 진공해올 가능성이 있는 침공루트를 7개의 코스로 예상한 본토방어계획을 말한다. 일본 본토에 6개 루트, 일본 외 지역(제주도) 등 총 7개 지역에서 결호 작전을 준비하는데, 이 중 ‘결1호’인 홋카이도방면루트와 ‘결7호’인 조선과 제주도방면의 진공루트 중 최종 제주도 진공을 낙점하고(미군이 이오지마를 점령하고 오키나와에 상륙하는 등 북상해옴에 따라, 큐슈방면 침공을 예상, 만일 큐슈 방면에 상륙할 경우 미군은 전략상 제주도를 점령한 후 공·해군 기지를 건설, 일본 본토를 공격하는 전진 거점으로 삼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되었다.

미군이 일본 북큐슈로 상륙할 경우, 동시에 중국 대륙과 조선반도에 있는 일본군 최정예 부대인 관동군의 일본 본토 합류를 차단할 것을 우려했다.) 제주도 전역에 방어진지를 구축, 미군의 침공작전을 방어하는 작전이었다.

일본군 대본영은 조선총사령부인 ‘제17방면군’ 전투서열에 독자적인 군사령부를 편성하는데, 1945년 4월 15일 신설된 제58군(사령관 중장 나가쓰 사비주, 永津佐比重)이 그것이다. 제58군사령부는 제주도가 고립되어도 독자적으로 작전을 지휘할 수 있는 사령부로 4월 21일 제주에 도착해 제주농업학교에 본부를 둔다. 그리고 예하에 제96사단, 독립혼성 제108여단 등의 부대를 편성하고, 일본군의 최강전력이었던 관동군 제111사단, 121사단도 예하부대로 편제하여 만주로부터 불러들인다. 인구 23만의 작은 섬에 갑자기 들이닥친 중무장한 일본군 7만 5천여 명.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일본군 1만 병력의 ‘120사단’이 예정대로 도착했다면, 제주섬에는 8만 5천의 군대가 결전을 치르는 곳이 될 뻔했다. 이제 이들 군대는 제주도민 총동원체제를 발령하여 제주도민들 중 16세 이상 남자 주민들을 강제 징집하여 노역에 동원하면서 제주섬에 강력한 저항진지를 구축한다.

▲ 제주도 주둔 일본군 배비개견도. 당시 일본군의 진지구축 상황이 상세히 표시되어 있다. ⓒ박경훈

방어진지 구축은 총 3단계로 이루어지는데, 1단계에서는 제주전역의 방어진지구축의 대강을 완성하는 것으로, 남방에서 북상해오는 미군이 제주시 서부해안지역으로 먼저 상륙할 것으로 상정하고 애월에서 안덕에 이르는 해안지역과 내지평원지대에 주진지대를 구축했다. 또한 주진지대의 방어선이 고착되었을 경우, 적을 공격하기 위한 공격 준비진지대를 제주시와 서귀포시에 구축했고, 동부지역의 경우 3차 방어구역으로 앞의 두 구역이 모두 저지에 실패할 경우 유격전을 펼치기 위해 유격 진지대를 구축하는 것으로 작전을 수립하고 진지 구축에 들어간다.

2단계는 1945년 5월 하순에서 6월 중순까지의 기간으로 오키나와전이 치열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이다. 만주에서 관동군 제121사단이 추가로 제주도에 배치됨에 따라, 미군의 상륙 예상지점을 남북으로 잡아 주력부대를 배치했다. 3단계는 우시지마 오키나와 방어군 사령관이 자결한 6월 23일 이후의 시기로 오키나와의 다음 목표인 제주도로 미군의 상륙작전이 임박했다고 판단하던 시기인데, 역시 상륙예상지였던 서부지역 중 서남부지역에 대대적인 포병화력을 집중 배치한다. (강순원, 2004)

이 전략전술은 해안선을 방어하지 않고 미군을 섬의 내륙으로 유인하며, 주민을 전쟁에 총알받이로 동원하면서 유격전을 통해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겠다는 옥쇄작전(玉碎作戰)이었다. 오키나와전과 같은 방식이다. 하지만, 오키나와전이 패배로 끝나면서 3개 구역으로 나누어 내륙결전을 준비했던 작전계획은 변경되어 서남부의 상륙 즉시 섬멸시키는 해안결전작전으로 급선회되면서 제주도 주둔 일본군을 크게 연안구속병단과 기동결전병단으로 재편하게 된다. 즉, 적의 상륙과 동시에 대대적인 공세를 해안에서 펼치고, 여기에 필요에 따라 기동전단을 운용해 연안병단을 지원한다는 작전으로 바뀐 것이다. (황석규. 2004)

이제, 적의 상륙만 기다리는 상태다. 그러나 적은 오지 않았다. 대신 1945년 8월 15일, 소위 천황의 ‘옥음방송’이 먼저 라디오를 타고 들려왔다. ‘무조건 항복선언’이었다. 오키나와보다 더 강력하게 구축되었다는 제주도 방어진지들, 그리고 무자비한 관동군까지 포함된 강력한 방어군과 본토를 코앞에 둔 결전의 전장. 오키나와의 사례에 비추어 충분히 황국신민화 교육도 이루어졌고, 오키나와의 야트막한 산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1950m의 주봉을 낀 높고 광활한 한라산 밀림지대, 그리고 오키나와 못지않은 수많은 용암동굴지대들, 그리고 당연히 진행되었을 옥쇄작전 등을 감안하면, 오키나와보다 더욱 치열했고, 장기적인 싸움이었을 것이다.

미군의 입장에서도 큐슈로 상륙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를 등 뒤에 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제주도의 3개의 비행장(정뜨르, 알뜨르, 진드르)은 그들의 공중폭격에도 위협적인 것이었으며, 특히 본토에 대기 중이던 제17방면군과 만주의 관동군 본대가 합류한다면 결국 제주도를 평정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초 일본은 연합군의 제주 상륙시점을 9월로 예상하고 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두 발의 핵폭탄은 미군의 제주침공작전과 일본군의 결7호 방어작전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제주도민들에게는 하늘이 내린 축복이었다. 물론, 이 핵폭탄 두 발은 인류에게 핵전쟁의 시대를 연 판도라의 상자이기도 했고, 중국본토에 있던 임시정부가 공을 들이며 광복군의 본토진공을 준비하던 모든 노력을 허사로 만들어, 이후 아시아의 냉전의 초입, 한반도를 또 다시 전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궁극의 계기가 되기도 했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장의 제2의 오키나와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제주도민들은 오키나와전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일제시기 군사기지 및 진지갱도 연구자인 ‘츠카사키 마사유키’ 씨는 전투가 일어났을 때 민간인의 피해를 예상하는 대목에서 “… 만일 적기의 폭격에 임하면 민심 일반의 동요는 상당히 심각한 부분이 있을 수 있고, 태업상태적 현상의 발생을 볼 가능성이 크다. 적군이 상륙하면 이에 호의를 갖는 자가 비교적 많으므로 주민에게 큰 기대를 걸 수 없다.”라는 당시의 일본군의 정세판단 문건을 검토한 후 “만일 제주도에 정말 미군이 상륙하게 되면, 일본군에게 살해되는 제주도민의 수는 오키나와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라고 그의 논문에서 말한다.

즉, 오키나와전보다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인데, 오키나와전의 경우, 인구의 1/4인 10만여 명이 절멸했다. 당시 제주 인구 23만여 명 중 1/4이면 최소 6만여 명이 절멸했을 것이며, 여기에 그보다 더 했다면, 적어도 섬 주민의 50%가 절멸당했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 된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허나, 그로부터 3년 후 제주는 제주대로 오키나와의 비극에 버금가는 현대사의 질곡의 역사가 기다리고 있었으니, 바로 4.3이었다.

만약에 제주에 미군이 상륙했다면, 오키나와와 마찬가지로 제주도도 미군의 아시아전략상의 요충지로서 또 다른 ‘기지의 섬’으로 전락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 특히 당시 종전과 동시에 이어진 국제정세의 변화는 소련의 남하와 중국의 공산화라는 전대미문의 냉전 블럭이 형성됨에 따라, 두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해 동북아시아 전체를 관할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제주는 기왕의 항공기지가 만들어졌다면, 한반도의 오산공군기지가 아니라 알뜨르비행장이나 진드르비행장이 후텐마나 카네다의 제주판이 되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그러므로 미군의 제주상륙이 예정대로 진행되었다면, 미군은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두 개의 기지의 섬을 가지지 않았을까? 최근 강정기지는 어쩌면 오래전 미군이 탐냈을 불침항모였지 않을까? 일본이 ‘결7호 작전’을 준비한 것은 제주도가 지닌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 때문이며,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는 현재에도 유효하다.


오키나와 현립 평화공원과 기억투쟁

아래의 이미지는 오키나와 현립 평화공원 평화자료관의 전시설치물이다. 오키나와전 당시, 동굴에서의 피신상황을 재현한 모형물인데, 이 모형전시물 하나가 오키나와 주민들의 공분을 사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 오키나와 현립 평화박물관 기념자료실 안의 전시모형. 2000년 11월 오키나와파인 오타 지사가 3선에 패하면서 동경파인 이나미네 지사체제가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어 일본군국주의의 반격이 가해진다. 그때 문제가 되었던 것이 이 전시물이다. 왼쪽의 착검한 일본병사의 인물모형의 칼끝이 피난주민들을 향하느냐, 밖을 향하느냐에 따라 전달하는 메시지와 이미지가 완전히 달라진다. 즉, 주민보호냐 주민위협이냐로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이 배치를 놓고 주민대표 및 지식인들과 행정과의 마찰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주민들을 향했던 칼끝은 동굴 안쪽을 향하되 위를 향하는 것으로 설치되어 어정쩡한 모습이 연출되고 말았다. ⓒ박경훈

이 하나의 착검된 군도의 방향, 그것이 오키나와전을 바라보는 일본과 오키나와주민들의 시각과 이해를 완전히 가르는 칼끝이기 때문이다. 즉, 이 군도의 방향에 따라, 당시 오키나와 주둔 일본군의 실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병사가 동굴 내부를 향해 총을 겨눈다면, 바로 오키나와주민들을 강제 위협하고 집단자결의 비극적 결과를 만든 장본인이 되고 만다. 그리고 오키나와의 모든 일본군은 오키나와주민을 총알받이와 소모품으로 이용하고, 끝내는 적에게 방어군의 군사기밀을 발설하지 못하도록 소위 ‘옥쇄’시킨 장본인이 되며, 이른바 천황을 정점에 둔 일본의 실체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반대로 동굴 밖을 향해 총구를 겨눈다면, 이는 동굴 안의 주민들을 지키기 위한 일본군으로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군대로 바뀌며, 일본은 오키나와를 본토의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보호하려 했다는 국민군대가 된다. 그러므로 이 병사모형의 총과 칼끝의 방향 하나는 오키나와전의 주민과 일본군, 일본과 오키나와를 가르는 가장 절묘한 상징일 수밖에 없다.

원래의 평화기념자료관은 1975년 6월에 개관하여 오키나와 주민들 스스로 전시를 조직하였으며, 2000년 4월에 신관으로 이전하였다. 오키나와전의 역사적 교훈을 올바르게 다음 세대에 전하고 전 세계에 오키나와 사람들의 마음을 호소하며 항구평화에 기여하기 위해 개개인의 전쟁 체험을 담아 설립되었다.

신관 건설과정에서 이러한 오키나와 현민들의 그동안의 노력과 오키나와전을 체험한 세대들의 현장체험에 기반한 생생한 육성들과 전쟁에 대한 관점은 해체되고, 오키나와현청은 전후 유골 수습 때 모아 둔 군대관계자료관을 만들고자 했다. 본토 중심의 전쟁을 보는 시각에 따른 전쟁에 대한 해석, 오키나와 주민들의 무고한 죽음을 마치 천황의 신민으로 일본제국을 위해 산화해 간 전몰자로 처리하고자 했다. 이에 오키나와의 지식인들과 주민들은 분개했고, 강력하게 항의하며 전시변경을 요구했다.

그 결과 평화자료관은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었으나, 그 후에도 크고 작은 전시변경 및 조작사건들이 잇따른다. 특히, 전몰자묘원이나, 자료관 앞의 자살공격용 무기의 야외전시, 평화관음당을 평화공원의 영역 안으로 포함시킨 문제 등이 그렇다. 본토의 입장에서 보면, 이 평화자료관은 일본제국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기에 그들은 어떻게든 이를 감추려 하고, 오키나와전 당시의 실체를 은폐하고 왜곡하려고 노력한다. 여전히 오키나와전을 둘러싼 일본의 보수세력과 오키나와 현민들은 기억의 공간을 놓고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 오키나와 본섬의 최남단, 오키나와전 마지막 격전지인 마부니언덕에 자리 잡은 오키나와 현립 평화공원의 위성사진(구글) . ⓒ박경훈

사실, 4.3평화공원 기념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008년 개관을 앞두고, 공식적인 전시기획팀이 기획했던 전시는 부분적으로 훼손당했다. 당시 오라리 방화사건을 다룬 부분과 전시 말미의 이승만을 표현한 부분의 아트워크작품이 민주당의 선거패배로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4.3에 대한 수구보수세력의 대대적인 반격과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직면하여, 가려지거나 내려지면서 절름발이 전시로 시작되어 오늘까지도 제대로 된 전시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또한 언제부턴가 4.3과는 아무 인연도 없고, 재임기간에도 4.3위령제에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던 대통령의 사진이 슬그머니 거기에 걸려 있는 것이다.

 

▲ 오키나와 전몰자 묘원의 맨 끝에 있는 <여명의 탑>.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 일본의 군국주의의 전통은 오키나와전 당시 32군 총사령관이었던 우시지마 중장의 위령탑인 여명의 탑을 공원부지 전몰자 묘원의 가장 깊숙이 이처럼 비장하고 웅장하게 조성해 놓았다. 본토의 일본인 관광객이 공원의 시설물 중 가장 많이 찾는 곳이며, 가이드가 전하는 장렬한 최후의 장면을 감격적으로 들으며 꽃과 향을 사르는 참배장소이기도 하다. 오키나와 전몰자 묘원은 일본 본토의 각 현에서 보내 온 위령비를 설치한 묘역으로 그 면적은 평화공원 전체 면적의 1/3을 차지한다. ⓒ박경훈

이 문제는 하찮은 문제 같지만, 이는 한 점이 사진이 내걸린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즉, 오랜 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투쟁의 성과이며, 학자와 유족들, 전문가들이 오랜 시간 도출해 낸 4.3에 대한 전시를 담은 4.3기념관이 아무런 공적 논의 없이 정치적 논리와 입김에 휘둘리게 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한국인 위령탑의 배면과 체제대결의 우상(愚像)

오키나와 현립평화공원 정문 건너편에 위치한 ‘한국인위령탑’. 이 탑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묘한 감정이 일렁인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한국인위령탑 바로 옆에 거대하게 솟아 있는 ‘평화관음당’이라는 이름으로 조성되어 있는 추모공간이 바로 오키나와전 일본군 전몰자 위령비이기 때문이다. 이 위령탑은 일본제국을 위해 충성을 다하다 죽어간 천황의 군대를 위한 추모공간이다. 그런데 바로 그 옆에 일제시대 오키나와로 끌려가 죽음을 당한 한국인 위령탑이 같은 공간에 있으니, 얼핏 보면 마치 일본 천황을 위해 죽어간 한국인 위령탑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이 탑이 순수한 의미의 위령탑이 아니라는 조성배경에 그 답이 있다. 이 탑은 1975년 4월 9일부터 8월 14일까지 3개월에 걸쳐 조성된다. 당시 정부의 지시에 의해 주일대사관에서 작성한 보고서에는 “…북괴보다 먼저 위령탑을 건립함으로써 우리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유일합법정부임을 과시하려는 데 동 위령탑의 건립목적이 있음”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탑의 조성목적이 순수한 의미의 억울한 영혼들을 위령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과시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1975년에 급박하게 오키나와에서의 조총련의 활동에 주목하게 된다. 이는 재인민단과 주일한국대사관을 통해 보고된다. 조총련은 1972년 5월부터 오키나와에 활동가를 파견하여 <제2차대전오키나와조선인강제연행학살진상조사단>의 이름으로 활동하며, 한국인 거주현황조사와 2차대전 당시 오키나와 조선인 피해실태를 조사한 보고서를 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 ‘오키나와현립평화공원’ 정문 건너편의 ‘한국인위령탑’. 전몰자를 위한 관음당 앞의 한국인 위령비는 평화공원에 대비하여 마치 천황의 군대와 함께하는 듯한 공간적 위계를 이룬다. ⓒ박경훈

이후 조총련은 한국인위령탑 건설 모금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이에 한국정부에서는 1974년 박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10만 달러를 제공해 위령탑 조성을 서둘러, 1974년 11월 ‘마부니’지역의 현 위치에 603평의 토지를 매입하고, 토지 매입 5개월 만인 1975년 4월 9일부터 8월 14일까지 3개월에 걸쳐 위령탑을 조성한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탑을 조성한 것이다.

당시 한국정부는 오키나와의 희생자가 몇 명인지 조사도 하지 않은 채 단순히 1만여 명이라는 희생자 수를 위령비에 새겨 넣는다. 즉, 보고서에 명시된 “…북괴보다 먼저” 세우다 보니, 당시 오키나와의 조선인 희생자가 몇인지 어떤 상태였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이곳에 한국정부가 먼저 위령탑을 세우는 것이 중요했을 뿐이다. 식민 치하에서 제국의 전쟁에 소모품으로 이용되어 끝내는 스파이로 내몰리고, 총알받이가 되어 이국의 땅에서 시신마저 건사하지 못한 채 스러져간 이들을 추념하는 위령탑 조성을 남북이데올로기 체제대결의 문제로 접근한 결과, 이 탑은 기이한 정서를 자아낸다.

체제대결의 속도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조성공간의 상징성도 살피지 못하다 보니, 전몰자를 위령하는 제국추념의 공간에 입지해 버렸던 것이다. 또한 이들의 오키나와행을 강제한 일본제국에 친일한 혐의가 짙은 시인이 위령문을 쓰고, 제국에 봉사한 일본군장교 출신의 대통령이 친필 휘호를 남긴 조형물이 되어, 참으로 기묘하고 어색한 모뉴멘트가 되어 버렸다.

 

▲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제주의소리

결국, 이 위령탑은 이역만리에서 희생된 억울한 영혼을 위무하는 동포애의 감동도, 추념의 진정성도 훼손된 채 체제대결의 산물로서 남북한의 체제경쟁 속에서 상대를 배제하려는 전략에서 급조된 돌무더기일 뿐이다. 또한 지난 시대의 대결이라는 것이 얼마나 유치하고 소모적인 것이었는지, 그런 대결이 남긴 풍경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진정성 없는 것인지, 그리고 그 진정성 없음 때문에 ‘국가주의’의 정체란 것이 얼마나 얄팍하고 경박할 수 있는 것인지를 이 탑 앞에서 느끼게 된다. 그래서 얻은 것이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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