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훈의 제주담론] (21) 우치난츄의 섬을 가다 3

기지의 섬 오키나와

‘카데나 공군기지’는 말로만 듣던 것보다 훨씬 방대한 규모다. 그것은 마치 공포영화 포스터에 자주 등장하는 홍보문구처럼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것인 공군기지였다. 또한 필자가 전망대에 있는 동안에도 수시로 뜨고 내리는 군용항공기들의 소음과 비주얼 역시 생경하고 놀라운 것이었다. ‘기지의 섬’이란 말이 허사가 아니었구나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래도 가이드에게 물으니 우리가 온 시간은 마침 전투기의 이착륙이 없는 시간대라서 덜 시끄러운 편이라고 한다. 특히 전략폭격기나 전투기들이 편대비행을 위해 동시에 뜨고 내릴 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소위 요즘 말로 “헐”이다.

▲ 카데나 공군기지 활주로와 이륙하는 공중조기경보기. ⓒ박경훈


후텐마 비행장 주변에는 기지 철조망 바로 옆에 주택지가 밀집해 있다. 9만 명 시민이 거주하며, 121개 이상의 공공시설이 있는 시가지 상공을 미군 항공기와 헬기가 계속 비행훈련을 한다. 또한 후텐마 기지의 92%가 사유지이며, 미군 통치 기간인 27년 동안 계속 사용되었고, 1972년 5월 15일 일본 복귀 후 현재까지 36년 동안, 강제 사용이 계속 되었다. 다른 기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미국 본토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이곳에서는 일상이 된다. 또한 1972년 반환 이후 지금까지 평균 2년 6개월마다 한번 꼴로 추락사고가 일어난다고 한다. 정말 “헐!”하고 놀랄 일이다.

수치상의 오키나와는 일본 전 국토의 0.6%의 면적, 일본 전 인구의 1% 인구수를 보인다. 하지만 오키나와 면적 대비 20%가 군사기지구역이고, 오키나와 주민의 3%가 미군기지로 경제생활을 영위하며, 미군의 전 세계 해외주둔군 중 70%가 오키나와에 주둔, 75%의 주일미군기지가 집중되어 있다. 해병대 육군 해군 공군의 다양한 용도의 38개 군사기지가 밀집되어 있다. 카데나 시의 경우는 미공군기지가 시 전체면적의 82.8%를 차지한다. 이 모든 수치들은 한 마디로 이 섬이 ‘기지(基地)의 섬’ 임을 말해주는 지표들이다.

▲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분포현황. ⓒ박경훈

오타 전 지사는 재임시절인 1996년 “미군기지 속에 오키나와가 있다고들 한다. 기지가 필요하다면 전 국민이 분담해야 한다.”라고 일갈한 적이 있다. 즉, 오키나와라는 섬에 미군의 기지가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라, 기지의 섬 안에서 오키나와 주민들이 끼어들어 살아가는 형국인 것이다. 이즈음에서 드는 의문은 왜 오키나와가 기지의 섬이 될 수밖에 없던 것일까 하는 문제다.

이 ‘기지의 섬’의 기원은 미국이 오키나와를 ‘키스톤’으로 인정한 군사전략적 가치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인식의 최초의 경험은 바로 오키나와전에 뿌리를 두고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원래 오키나와전은 어쩌면 비켜갈 수도 있었던 전투였다. 왜냐하면 전쟁 당시 태평양전쟁의 총 지휘권을 쥐고 있던 미 해군 사령관인 킹(Ernest Joseph King) 제독의 지론이 ‘대만침공론’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전략적 차질로 인해 이는 결국 수정되고, 일본본토진공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전장으로서, 얄궂은 운명은 오키나와를 선택했다. 그 배경에는 바로 오키나와의 ‘공간과 위치’라는 전략적 가치가 있었다. 즉, 폭격기를 띄울 만한 비행장을 만들 충분한 공간과 해군기지를 만들 수 있는 훌륭한 만을 두 개나 가진 것이다. 따라서 오키나와는 동아시아의 제공권과 제해권을 동시에 거머쥘 요충지였다.

▲ 오키나와는 아시아의 대륙과 섬나라들 그리고 바다의 한가운데 있는 불침항모다. ⓒ박경훈


오키나와에서 반경 2,000km 내에 동아시아의 모든 도시와 국가가 걸쳐 있다. 반경 1,000km 이내에 중국의 동문 연안과 난징과 상하이, 한국의 남부권 전역, 일본 규슈 전역과 혼슈의 남부전역, 대만에까지 이르며, 1500km 이내에 필리핀, 중국의 광저우와 동부연안 전역, 산동에 이른다. 또한 한반도의 평양과 동경까지를 포함한다. 반경 2,000km를 날아가면 중국의 베이징을 포함한 발해만 전역과 만주, 한반도 전역,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른다.

한마디로 오키나와는 태평양을 건너온 미군에겐 아시아의 키스톤일 수밖에 없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태평양전쟁 당시의 전략적 가치는 이후 냉전 시기에도 크게 달라진 바 없었다. 미국이 아시아를 중시하는 한 오키나와의 장소성은 태평양을 안마당으로 하고 싶은 미국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요충지인 것이다. ‘오키나와’의 어원처럼 난바다의 한가운데 떠있는 한마디로 거대한 불침항모(不沈航母)인 것이다.
 
오키나와 항공기지의 기원은 1945년 ‘오키나와전’에 있다. 당시 일본군수뇌부인 동경의 대본영은 오키나와 섬 곳곳에 비행장 건설을 종용했는데, 1945년까지 모두 16개의 비행장을 건설하였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상에서의 일본 연합함대의 대패는 일본의 태평양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하는 크나큰 패배였다.

특히 제공권(制空權)을 상실한 이후의 전쟁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하게 한다. 일본군 대본영은 그에 대한 대책으로 국가총동원태세로 항공기의 증산을 독촉하는 한편, 항공모함의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소위 ‘불침공모(不沈空母)’ 구상을 내놓는다. 이는 서태평양의 여러 섬들에 비행장을 건설하여 지상기지로부터 항공작전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를 위해 난사이(南西) 제도에 중계기지를 건설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 중심에 오키나와를 배치한 것이다. 그 결과 오키나와에는 전역에 걸쳐 다수의 항공기지가 건설된다. 특히 오키나와의 본격적인 기지화는 1944년에서 1945년 초에 이르는 비교적 단시간 내에 이루어진다.

 

▲ 1945년 4월 20일의 카데나공군기지. 오키나와전투는 이제 곧 시작인데, 미군은 이곳을 사용할 수 있는 공군기지로 운용하기 시작했다.(위키페디아 사진). ⓒ박경훈

하지만 일본군이 오키나와에 건설한 항공기지들은 제대로 활용도 못해보고, 이곳을 점령한 미군에게 미군의 본토 진공을 위한 준비된 선물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미군의 오키나와 공략의 중핵적인 목표는 일본본토공략을 위한 전방기지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미군은 치열한 전투의 초반부터 오키나와 본섬 상륙과 함께, 상륙지점인 ‘요미탄촌’과 ‘야탄촌’에 건설된 일본군의 북비행장(요미탄촌)과 중비행장(카데나)을 접수한 지 3일 만에 미군 항공기 운항을 개시하였고, 카데나 비행장의 경우는 미군의 정비확장공사가 계속되어 그해 6월 이내에 길이 2,250km의 활주로를 완성, B-29 등 대형폭격기의 발진기지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후텐마 해병공군기지 역시 이때에 새로 건설된다.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한 태평양지구총사령관인 니미츠(C. W. Nimitz) 제독은 ‘니미츠 포고’를 발포하고, 류큐제도와 그 주변해역을 점령지역으로 선포, 오키나와 주민들을 모두 강제수용소에 수용시킨다. 이 정책의 결과로 오키나와는 소위 주민들이 사라진 빈 섬이 되어 버렸다. 미군이 어떤 장소를 선택한다 하더라도 이에 대해 항의하거나 반대할 주체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미군은 이 시기 17세 이상의 젊은 남자들은 어린이와 노약자 그리고 여자들과 떼어내 따로 수용했다. 만약에 있을 주민들의 저항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주민들의 토지는 점령군인 미군의 필요에 따라 어떤 곳이든 강제 수용당할 수밖에 없었다.

오키나와는 전례 없는 대대적인 ‘공간의 재배치’가 이루어진다. 즉, 전통적인 마을과 농경지의 경관이 미군의 군사기지를 중심으로 달라져 버린다. 전후의 시대를 기지와 공존할 수밖에 없는 공간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런 다음, 미군에게 불필요한 땅부터 주민들에게 반환시켰다. 그 결과 기지부지로 강제수용당한 지역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마을에 가장 가까운 기지 주변의 개방지에 집단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후텐마와 카데나공군기지를 에워싼 주변의 도시들은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 구글 위성으로 본 후텐마기지와 카데나공군기지. 기지의 울타리를 따라 빼곡히 발달한 도시공간. ⓒ박경훈

 

▲ 오키나와현립평화공원 전시실의 키스톤 전시물와 건축에서의 키스톤 개념도. ⓒ박경훈

‘태평양의 요석(Keystone. 太平洋의 要石)’, 오키나와를 이르는 미국의 전략적 표현이다. 활처럼 구부러진 아치의 맨 중앙부 꼭대기에 박아 넣는 ‘쐐기돌’ 또는 바둑에서 상대방의 돌을 끊는 등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는 바둑돌이라는 의미의 표현인데, 전후 미국은 중국대륙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군사전략적 의미에서 오키나와가 핵심적인 ‘키스톤’인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는 냉전 시기 내내 유지된 전략기조로서 변화가 없었다. 이러한 전략적 인식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2012년 6월 오바마 대통령은 ‘아시아로의 귀환(Pivot Back to Asia)’을 선언하였다.

이는 키스톤으로서의 오키나와의 군사전략적 가치가 다시 증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오키나와 주민들에게는 다시 기지의 섬으로서의 가치가 증대하는 것이다. 제주도의 강정해군기지 역시 이러한 미군의 군사전략에서 비롯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시아의 큰 형님이 귀환하면서 이미 가지고 있던 불침항모와 더 많은 불침항모들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즉, 미군의 전략적 필요에 의해, 다시 아시아가 국제적 긴장관계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강력한 군사적 긴장감을 동반하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그 섬에 사는 주민들이 떠안아야 하는 고통으로 돌아올 것이다.


‘뫼비우스 띠’의 양면, 오카나와의 미군과 주민들

오키나와의 산업구조는 3차 산업이 70%로 그 비중이 압도적이다. 그것은 기지의 섬으로서의 오키나와의 특수성 때문이다. 류큐왕국시절에는 벼가 기간 작물로 재배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신숙주의 해동제국기) 사쓰마번의 침공 이후, 사쓰마번의 요구에 따라, 점차 사탕수수 경작 중심으로 바뀌면서 벼농사는 쇠퇴하기 시작했으나, 농업도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고구마는 식량작물로도 널리 재배(오키나와전 당시 7만 5천의 일본군은 주식을 고구마로 대체해 부족한 식량문제를 해결했다.)해 왔는데, 이제는 돼지사육을 위한 사료로 사용되는 데 그치고, 벼농사는 값싼 미국 쌀이 넘쳐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결국, 오키나와에서 생산적인 제조업이나 농업은 더 이상 의미 있는 산업으로서의 위치를 점유하지 못한다. 결국, 천혜의 자연환경에 기반을 둔 본토인을 대상으로 한 관광산업이 급격히 발달하였으며, 또한 오키나와 주둔 미군기지와 관련된 종사자가 3만여 명을 넘는데, 이들은 대부분 미군기지 덕에 먹고사는 형편이다. 관광업은 오키나와의 절대적 비율을 차지하는 산업이다. 또한 오키나와는 독자적 산업이 없어 중앙 정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가기 어렵다. 그래서 가끔 ‘오키나와의 분리독립’ 얘기가 나오지만 오키나와인들은 독립투쟁을 벌일 정도로 강하지 않다. 이러한 현상의 배후에는 바로 일본과 미국에 경제적인 양속체제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 카데나 공군기지 전망대의 전시장. 카데나시에서 조성한 카데나 공군기지 전망대의 2층에 만들어진 공군기지 관련 전시장의 내부 전경. ⓒ박경훈

 

오키나와에서 ‘경제진흥’이란 의미는 기지를 새로 짓는다거나 확장 또는 첨단시설로 재정비하는 등 대부분 기지건설과 관계된 사업을 뜻한다.(정유진, 2001.) 즉, 오키나와에서는 관광을 제외한 경제진흥은 결국 미군기지가 존재했을 때만 지속 가능한 산업이 되고 있는 셈이다.

오키나와사람들은 종종 ‘똑똑한 인재들은 모두 본토에서 데려가 버리고, 오키나와 사람들은 미군기지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한다. 또한 반환되는 미군기지 부지들도 대부분 본토의 대자본이 들어와 개발하는데, 대부분 유흥소비구역으로 개발되어 오키나와 주민들을 대상으로 소비하는 공간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결국 반환된 토지마저 본토인들에게 다시 종속당하는 구조가 고착되고 있다. 

또한 사유지를 미군기지로 강제수용한 토지점유비용은 현재 일본정부가 연간 600억 엔 정도를 부담하고 있는데, 군용지 주민은 약 3만 여 명이며, 평균적으로 한 가호당 매년 한화 1억 원 정도가 들어온다고 한다. 버블경제가 20년째 이어지는 일본의 경제상황에서 이는 작은 수입이 아니다. 별다른 산업이나 딱히 이를 넘어서는 고소득의 작물을 경작할 수도 없는 토지주들에게는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하는 황금알 낳는 거위이기도 하다.

반환되는 미군기지의 토지주의 경우도 위와 같은 상황에서 농사를 지어 농경지로 활용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별 도움이 되지 않으니, 본토의 대자본가들의 개발부지로 팔아넘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결국 미군기지의 사건과 소음이 싫긴 하지만, 또한 현실적으로는 그 기지 덕에 먹고살 수 있는 것이기에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즉, 미군기지와 오키나와 주민들의 삶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여 있거나 엮여 있다. 두 개의 현실, 경제적 수익의 안정성과 사고와 소음으로 얼룩진 생활의 불편, 둘 중 어느 하나도 선택이 쉽지 않은 셈이다.

일본정부는 오키나와의 대표적인 농업작물인 사탕수수를 사들이는데, 이 사탕수수의 매수가격과 평균적인 군용지 사용료를 비교했을 때, 후자가 1.6배나 높다. 같은 면적의 농지에 농사를 지어 정부에 파는 가격보다 군용지의 임대료가 더 높다는 것은 농업노동이 가만히 앉아서 돈을 받는 일보다 경제적으로 가치가 없는 일로 변질된다. 일본 정부는 기지가 있는 시 ․ 정 ․ 촌에 기지주변정리 사업비 명목으로 이러한 방식의 비교우위적인 재정투자를 지속하고 있다.

그 결과 큰 기지가 있을수록 재정수입 면에서 기지임대료 수입의 비중이 커지게 되고, 점차 그 의존도 역시 심화되어 종국에는 기지반대의 주장이 잦아질 수밖에 없는 구조화가 심화되고 있다. 일본정부의 기지관련 예산은 이러한 기지반대에 대한 당근전략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즉, ‘죽이지도 살리지도 않는 전략’이다. 돈으로 저항을 조절하며, 스스로 자립할 수는 없게 만드는 구조를 유지하는 것이 일본의 기지와 관련한 오키나와 현민들에 대한 정책인 것이다.


평화의 섬에 평화가 없다

 

▲ 영화 ‘이카이호’의 한 장면. 미군에게 성폭행 당한 여자는 끝내 미군기지 철책에 목을 매고 만다. ⓒ박경훈

2010년 요미우리TV가 제작, 쿠니모토 마사히루가 연출한 TV 드라마 <가짜 의사(또는 돌팔이 의사)라 불리며-오키나와 마지막 이카이호 / ニセ医者と呼ばれて 沖縄・最後の医介輔>는 1945년 미군에 점령당해 1972년까지 27년간 미군정이 행해졌던 오키나와의 특수한 의료제도로 만들어진 ‘이카이호’에 관한 드라마다. ‘이카이호(醫介輔)’란 태평양전쟁 당시 참전했던 위생병 등을 중심으로 미군정기 오키나와의 부족한 의료진을 대신할 임시의료행위자를 말하는데, 미군정은 총 126명의 ‘이카이호’를 선발하여, 오키나와의 외딴 마을들과 외도(外島)에 배치하여 활용한다.

이 드라마는 2008년 11월, 87세를 끝으로 은퇴한 마지막 이카이호인 ‘미야자토 젠쇼’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다. 이 드라마의 미덕은 미군정기의 오키나와의 다양한 풍경과 오키나와 주민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소위 의사 아닌 의사로서 살아야 했던 이카이호들의 애환을 다룬 드라마로서 이카이호의 의료행위 과정의 다양한 이야기와 접맥된 주민들의 생생한 모습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스토리 전개의 중요한 맥락이기도 하고, 또한 드라마적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테마가 당시 빈번하게 발생했던 미군병사들의 오키나와 여자들에 대한 강간사건이다. 이 드라마에서는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 잠을 자다가 흑인미군병사에게 추행을 당한 피해자 여인이 이카이호인 주인공 ‘미야마에 요시아키상’에게 임신한 아이를 낙태할 것인가 낳을 것인가를 어렵게 의논한다.

주인공에게 설득되어 망설임 끝에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고 출산하지만, 피부가 까만 아이가 태어나 결국 남편에게 내쫓기고, 그 자신은 끝내 핏덩이 어린애를 놔두고 미군기지 철책에 목을 매 자살하고 마는 비극적인 오키나와 사람들의 삶의 단면이 절절하게 그려진다. 

▲ 2004년 후테마기지의 해병헬기가 추락하며 남긴 ‘오키나와 국제대학’ 건물 외벽의 흔적. 지금은 자취를 감추었으나, 당시 이 사건으로 오키나와 주택가의 미군지기의 존재가 최고의 이슈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박경훈

이 드라마에서처럼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실시된 미군정기부터 시작된 오키나와의 미주둔군과의 불편한 인연은 늘 오키나와인들의 삶을 옥죄는 또 다른 시련의 배경이기도 했다. 툭하면 터지는 미군병사의 어린이 집단성폭행, 주부와 여학생에 이르는 각종 성폭행사건, 그리고 헬기 추락, 전투기 추락 등 작전 중 사건사고, 거대 공군기지의 항공기 소음으로 인한 일상생활의 장애 등은 20만의 희생을 낸 오키나와전의 비극이 멈춘 것도 잠시, 또 다시 시작된 새로운 전쟁의 현상들이기도 했다.

일명 과부제조기라 불리는 ‘오스프리(Osprey)’는 고정익기(固定翼機)와 헬기의 장점을 고루 갖춘 다목적 쌍발 수직이착륙기로,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미래형 공격헬기의 원조 쯤으로 보이는 항공기다. 오스프리의 오키나와 배치는 최근까지 오키나와 미군기지와 관련된 중요한 이슈였다. 2004년 오키나와 국제대학의 건물에 추락한 후텐마기지의 해병헬기사고의 끔찍한 경험은 과부제조기라 불리는 불안정한 기술의 결과물인 오스프리를 주택가가 밀집한 후텐마기지에 배치하는 것을 용인할 수 없게 만들었다.

당연히 오키나와 주민들은 격렬하게 반대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하지만, 미군은 이에 아랑곳없이 2011년 오스프리 8대를 최초로 후텐마기지에 배치했으며, 향후 현재의 치누크 헬기를 전량 오스프리로 대치하는 계획을 진행 중이다. 또한 오스프리 도입 당시 오키나와현과 약속한 안전비행을 위한 조항들도 지키지 않고 있다. 결국, 미군은 점령군일 뿐이다. 사키마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 사키마 관장의 부인이 거칠게 내뱉은 말이 인상적이었다. “이제 떨어질 때가 되었어!” 

▲ 과부제조기라는 별명의 수직이착륙기인 ‘오스프리’. ⓒ박경훈

오키나와에서는 미군의 본질이 더 정확히 그리고 쉽게 읽힌다. 이곳에서의 미군은 한국에서의 미군의 모습과도 다르다. 물론 한국의 미군기지 주변 기지촌에서의 의견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한반도에서의 미군의 존재는 오키나와에서처럼 점령군으로서의 이미지보다는 북한의 남침을 막아주는 6.25전쟁의 ‘우방’이라는 강력한 역사적 이미지와 세계 최고의 군사력으로 휴전선을 지켜주는 전쟁억지력이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외국의 군대’ 세계 제국으로서의 미국, 그 미국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극동주둔군이라는 본질이 은폐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키나와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이해관계의 변수는 사라지고 상수로서의 미군의 모습이 더욱 적나라하게 가시권에 들어오는 것이다. 특히 주민들의 삶을 폭력적으로 찢고 들어오는 음속을 나는 전투기의 굉음, 오스프리의 공중 곡예 같은 위험한 비행, 하루에도 수십 대가 뜨고 내리는 전후의 오키나와의 기지의 섬의 풍경은 외국의 군대가 어떤 것인지, 아시아에서 미군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 오키나와 주민들의 일상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어떤 것인지, 기지가 들어선 섬의 풍경이 어떤 것인지를 마치 4D영화를 보듯이 더욱 실감나게 피부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흐릿했던 뷰파인더 속 풍경이 오키나와라는 섬의 시공간이라는 꽉 조여진 조리개를 통해 명징해진다.

몇 년 전 보았던 TV다큐멘터리에서 동경시민들에게 미군기지가 필요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남녀노소를 떠나 “네, 필요합니다.”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전형적인 ‘후쿠시마의 논리’다. 그리고 도마뱀 꼬리 자르기의 논리이다. 생활이 빠진 군대에 대한 인식, 그것은 서울시민의 인식이기도 하며, 온갖 해군기지 발언에 댓글을 다는 소위 ‘빠’들의 논리이기도 하다. 제주도민들의 강정기지 반대운동을 님비현상으로 몰아붙이거나, 너희(반대하는 측)는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니냐는 논리들이 이곳에서는 훨씬 명징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사키마 미술관의 후원을 가르는 후텐마기지의 철조망이 보여주는 미묘한 풍경은 마치 군대가 주민들 생활의 옆구리를 찌르고 들어온 듯한 형국으로 보이는데, 그 자체로 오키나와에서의 기지와 주민의 삶을 보여주는 상징감까지 겹쳐 미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 눈으로 볼 수 있는 생활 속의 기지.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과부제조기라는 별칭의 ‘오스프리’가 주택가 상공을 수시로 오가며, 너무 낮게 뜬 수송기들은 후텐마기지 주변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박경훈

헤노코에서 강정을 생각하다

우리가 헤노코를 찾았을 때 헤노코의 포구는 비어 있었다. 날씨는 흐릿하고, 이곳도 겨울임을 알게 해주는 듯 오키나와의 날씨치고는 꽤 쌀쌀한 날씨 속에 해변이 펼쳐져 있었다. 마침 이날이 오키나와 법원에서 기지 관련 판결이 있는 날이라서 이곳의 활동가들도 모두 법원으로 달려간 터라 마을의 농성천막에는 촌로 한 분과 활동가 여성 두 분만 지키고 있었다. 견고한 철조망 울타리가 잘 갖추어진 미 해병대의 또 다른 기지인 ‘캠프 슈와브’가 코앞이다. 그리고 철책에는 예전 사진에서 보았던 많은 설치물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지 않아서 그런지 해변은 평화로워 보였다.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강정의 상황들만 보아온 강정에서와는 달리 이곳은 참 평화롭게 싸우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곳에도 격렬한 투쟁은 그동안 여러 차례 있었다. 2004년 4월 천막농성이 시작되었고, 현장사무소 건설 실력저지, 천막노상농성, 카누해상시위, 해상망루점거투쟁 등 쉼 없이 진행되어 왔다.

해변을 빠져 나오면서 방문한 농성천막 앞에는 3230일이라는 안내현판이 세워져 있었다. 8년 하고도 310일째 날에 우리가 방문한 셈이다. 1997년 후텐마기지 대체지로 검토가 시작된 이래 기록된 자판이다. 그 숫자판을 보는 순간, 울컥 저미는 마음이 일었다. 저 많은 날 동안 그치지 않고 투쟁해 온 이 사람들, 운명은 이렇듯 약자에게만 잔혹한 것인가라는 생각에 울컥했다. 마을 사람에게 들은 바로는 이곳도 이미 군기지 내의 지상에서의 구조물 제작 작업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얼마 안 있으면, 이곳에도 강정과 비슷한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우리가 본 이 수평선과 평화로운 해변에도 엄청난 물량의 콘크리트가 퍼부어질 것이며, 기지의 마을로서 오스프리의 굉음과 추락위험 속에 살아야 하는 또 다른 운명을 맞을 것이다. 

 

▲ 후텐마기지가 이전해 오면 콘크리트로 메워져 미해병대의 활주로가 들어설 아름다운 헤노코의 바다와 미해병대 캠프 슈와브와 마을 간의 철책. 우리가 방문한 날은 기지반대운동 3230일이 되는 날이었다.  ⓒ박경훈

오키나와에서는 제주의 미래가 보인다. 그러나 그 미래는 낙관적이거나 평화로운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제2의 오키나와의 모습이다. ‘기지의 섬’ 제주라는 슬픈 미래를 이곳에서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기지의 섬 속의 제주도 주민들의 생활상도 이곳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도. 그리고 향후, 지역신문의 단골메뉴가 해군기지 등 기지와 주둔군과 관련된 사안으로 부쩍 늘어날 것이란 점 등 말이다.

2012년 3월 국방부 김민석 대변인은 “강정마을이 마군기지가 된다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했다. 하지만, 강정에 대해 대부분의 외국 활동가들은 미군기지로 인식한다. 우리는 해군기지라고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미군기지라고 한다. 불길한 것은 이 완강한 부인이 결국, 오에 겐자부로가 말하는 소위 ‘말의 위장망’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 오에 겐자부로 지음, 이애숙 옮김, 삼천리. 반전·평화와 사회적 불복종을 실천하는 실존주의자요 일본의 ‘양심’으로 불리는 노벨 문학상 수상(1994년) 작가 오에 겐자부로(77)가 30대 초반에 쓴, 수난의 땅 히로시마와 오키나와 르포. <히로시마 노트>는 1963년 8월 월간 <세카이>(세계)의 의뢰로 9회 ‘원수폭금지 세계대회’를 취재하기 위해 처음 방문한 뒤 1965년 5월까지 여러 차례 찾아간 히로시마 현장 취재기다. 잡지에 연재된 뒤 이와나미 신서로 출간돼 고발문학의 진수를 보여준다는 평가와 함께 100만 부가 팔렸다. ⓒ박경훈

‘오에 겐자부로’는 미군기지와 관련한 말과 실재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오키나와에서 막연한 말과 모호한 표현은 색을 덧씌우고, 나뭇잎을 꽂아 감추는 위장망 역할을 하고, 위장망은 항상 그곳에 이상하고 엄청난 실체를 숨기고 있다.”라고, “B-52전략폭격기도 처음에는 말의 위장망 속에 가려져 있었다. 태풍을 피해 임시로 괌에서 오키나와에 온 것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B-52전략폭격기는 오키나와에 상주하면서 베트남으로 바로 폭격비행을 갈 수 있도록 점점 강화될 것이라고 누군가 막연한 표현으로 웅성거렸다. 그리고 1968년 11월 1일 ‘린든 존슨’ 미 대통령이 베트남 북폭 전면중지 명령을 내렸을 때, 오키나와에서는 이미 위장망을 벗겨낸 B-52전략폭격기가 수시로 발진하는 모습을 누구나 눈으로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라고.(《오키나와 노트》)

그리고 얼마 후 ‘류큐신보’는 50대의 B-52전략폭격기가 카데나공군기지에서 남베트남 폭격비행을 계속하고 있다는 보도를 내보낸다. 그리고 3주도 지나지 않아 막연하게 회자되던 불안이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현실화된다. 바로 B-52전략폭격기 한 대가 이륙에 실패하여 비행장 활주로에서 추락한 것이다. 추락과 동시에 십여 차례의 대폭발이 일어나고 활주로 인근의 16호선 도로와 탄약 창고 일대는 불바다가 되어 버린다. 비로소 막연하던 추측과 우려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이처럼 군 기지의 소문들은 대부분 무서운 진실을 ‘말의 위장망’으로 감추고 있는 것이다.

70년대, 베트남 전쟁 당시 수시로 뜨고 내렸던 B52 전략폭격기의 모습. 오키나와는 미군의 아시아 전장의 가장 핵심적인 기지였다. 이 폭격기가 당도한 곳은 캄보디아 국경과 북베트남의 상공이었다. 그 하늘 아래 어린아이들의 머리 위에 이 살인기계는 거대한 융단폭격을 일상적으로 감행했다.

강정은 지금은 두꺼운 말의 위장망으로 가려져 있다. 표면에는 한국 해군기지라는 말의 위장망으로 말이다. 그렇게 위장막이 걷힌 최후의 모습은 핵잠수함이 오가고, 평택의 미군 전략기동군과 이들을 호위 또는 지원하기 위한 한국군의 이지스함이 기항하고, 이와 함께 독도함이 들어오고,

▲ 70년대, 베트남 전쟁 당시 수시로 뜨고 내렸던 B52 전략폭격기의 모습. 오키나와는 미군의 아시아 전장의 가장 핵심적인 기지였다. 이 폭격기가 당도한 곳은 캄보디아 국경과 북베트남의 상공이었다. 그 하늘 아래 어린아이들의 머리 위에 이 살인기계는 거대한 융단폭격을 일상적으로 감행했다. ⓒ박경훈

여기에 미군의 핵잠수함이나 이지스함이 어느 날 태풍을 피해 잠시 오고, 그리고 어느 순간 강정엔 잠시 오고, 그리고 어느 순간 강정엔 미군함정이 들락날락거린다고 소문이 나다가, 나중에는 한미일전략해군의 전초기지라는 기사로 언론에 도배되고, 그리고 오키나와처럼 제주도 어딘가에 미군의 핵무기가 저장되어 있다는 풍문이 돌고 그러는 건 아닌지.

국방부 대변인이 완강하게 부정한 이 말과 실재 사이에 한미일동맹의 시나리오가 존재하고, 미국이 귀환한 아시아에서의 대중국봉쇄전략과 관련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미국이 한미일 3각 군사동맹을 추진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1947년 이래 미국 정책의 중요한 목적은 남한을 미일 군사동맹에 편입하는 것이었다.”라는 부르스 커밍스 교수(시카고대교수, 역사학)의 지적처럼, ‘한미일군사동맹’에 있어 제주도는 중국과 북한을 묶는 완벽한 키스톤이다.

특히 이명박 정부 당시 은밀히 추진되다 들통 난 <한일군사정보포괄보안협정(GSOMIA)의 사례에서 보듯, 현 정권하에 한미일동맹의 구축과 MD체제의 완성은 훨씬 실현 가능한 모습으로 위장망을 벗어 던지고 있다. 그리고 공간적으로 평택 대추리의 미군기지와 제주의 해군기지는 오키나와의 미공군기지와 해병대에 대응한다. 아시아의 두 번째 ‘키스톤’으로 자리매김된 강정의 미래가 아닐까?


▲ 4.3 당시 토벌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미군사고문관. ⓒ박경훈

‘그들끼리 싸우게 하라’는 저강도 전략은 4.3 당시 미국의 제주도 전략이었다. 미군은 군사고문관으로 존재하고, 전투는 한국군이 치렀다. 모든 작전회의는 미국무성의 사진처럼 미군들이 주도했다. 3만의 희생자를 낸 ‘초토화 작전’ 역시 미군의 플랜이었다. 제주에서의 미국과 미군의 존재는 당시가 미군정 치하라는 점에서 너무나 명백한 일이지만, 4.3 당시 제주도 주민들의 참혹한 초토화 작전의 기억 속에 그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4.3의 대토벌은 분명히 미군정의 정책이었고, 정부수립 이후에도 제주도 토벌의 모든 지휘권은 실제적으로 미군의 주도였지만, 말의 위장망으로 인해 미군은 아직까지도 직접적 책임자의 입장에서 비켜 서 있다.

이처럼 저강도 전략에 의한 미군의 대외전략은 오랫동안 영향을 끼치는 것이어서 미군과 4.3의 비극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제주도민들은 쉬이 연결시키지 못한다. 강정해군기지의 두꺼운 말의 위장망을 다 벗겨낸 후의 모습은 적어도 국방부 대변인의 강력한 부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 공산이 크다.

제주도는 지난 30년간 감귤산업을 핵심으로 하는 농업중심의 산업구조를 관광산업을 전략산업으로 하는 산업구조조정을 강력하게 추진해왔다.(오키나와처럼 서비스산업의 비중이 70%에 육박할 정도의 전환) 그 결과 수많은 호텔과 대규모 위락시설, 골프장이 들어섰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 산업구조조정의 성과가 제주도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거나, 제주도의 경제를 살찌우는 효과가 없음이 드러났다.

전국 자치단체 중 재정자립도 꼴찌그룹에 속하며, 최근 한국은행 통계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10조에 달하는 금융수입 중 5조가 즉각 육지부로 유출되는 자본의 역외유출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은, 제주가 경제적으로 엄청난 성장세를 가져왔음에도 내부식민지처럼 경제적 수탈구조가 고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위 알짜배기 노른자위 땅들은 모두 본토의 대기업 대자본들이 독식하고, 지하수니 풍력이니 제주만의 미래자원들 역시 대부분 본토의 대기업에 팔아넘기거나 독식의 기회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알뜨르 공군기지 부지는 여전히 주민들에게 반환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바로 옆 동네인 화순에는 최대 규모의 해양경찰기지가 만들어지고 있으며, 또한 그 동쪽 지근거리인 강정에 해군기지가 건설되고 있는 것이다. 기지의 섬, 그 풍경이 만들어지고 있다.

딱 오키나와의 모습이다. 산남지역 대부분이 기지구역으로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높은 고도의 한라산 주봉 뒤에 숨겨진 천혜의 기지지대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생적 산업구조 역시 키우지 못해, 점차 남부지역의 산업은 기지 확장에 따라 기지산업주도로 갈 것이며, 중앙의 공공보조금 없이는 주체적으로 설 수 없는 경제구조가 고착될 수도 있다는 것. 미래의 제주도가 오키나와의 재판이 될 것이라는 예상은 필자만의 상상일까?(제발 상상이길 기대한다.) 하지만 현실은 미래 제주의 모습이 평화나 행복과는 거리가 먼, 본토의 내부식민지이면서 항상적인 군사적 위험과 기지가 운용되면서 벌어지는 각종 사회문제 등에 휘둘리는 불행한 모습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가보고 싶지 않은 미래를 우리는 착실히 가고 있는 느낌이다.

후텐마 미군기지 폭음소송단 사무국장 ‘다카하시 도시오’는 “원전처럼 미군기지도 도쿄로 가져가라는 것입니다. 미군이 평화를 지켜준다면 오키나와가 아니라 도쿄로 기지를 옮겨가서 한번 겪어보면 알 것입니다. 전쟁도, 그로 인한 상처도.” 강정에 기지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에필로그 : 파초일엽

▲ 오키나와에서는 가장 흔한 식물에 속하는 ‘파초일엽’. ⓒ박경훈

객지에서 만나는 건 결국 ‘나’다. 타자의 공간과 타지의 시간에서, 타자의 역사에서, 타인의 시선에서, 결국 나를 향해 있는 성찰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제주를 떠나 여행지를 걷고 있노라면, 평소에 제주에서 빠트리고 다닌 것들, 특히 좀 더 깊은 곳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나의 공간에서 내가 지배하는 시간에서는 그것이 너무 흔하거나 가까운 것이어서 잘 보이지 않거나 잘 들리지 않는 것들이, 이렇게 다른 곳에서 더욱 명징해지는 것을 보면서 언제나 생경함을 느낀다.

‘파초일엽(芭蕉一葉)’, 서귀포 섶섬에 자생하는 남방식물로 쿠로시오 난류의 선물인 제주의 대표적인 아열대식물 중 하나이다. 천연기념물 제18호인 이 잎이 넓은 식물이, 이곳 오키나와에는 지천으로 깔려있다. 이곳에서는 특별한 눈길을 얻지 못하는 흔한 식물이다.

그런 것인가? 내게 귀한 것이 반드시 남에게도 귀한 것은 아니다. 또한 남들에게 흔한 것도 나에게는 귀중한 것일 수 있음을 알게 해준다. 어떤 장소에 어떤 시간에 있느냐에 따라, 귀하고 중한 의미들은 충분히 변이가 가능한 것인가 보다. 파초일엽은 북방한계를 갖고 있는 식물이어서 제주도에만 자생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는데, 이제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 때문에 앞으로 몇 십 년 뒤면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될 정도로 흔한 것이 될 식물이다.

제주나 오키나와나 다 지정학적 천연기념물인 덕에 당해야 하는 지난한 역사적 부침은 언제쯤 해제될 수 있을 것인가?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장장 4만8000자에 달하는 '오키나와 기행문'은 여기서 마칩니다. 관심 갖고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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