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마라톤 D-194] 서귀포마라톤클럽과 함께한 서울국제마라톤 (2)
17일 대회 당일 아침. 서옥선(52)씨에게 갑자기 불청객이 찾아왔다.
전날부터 감기기운이 살짝 있었는데 그게 어느새 몸살이 됐다. 온 몸에 근육통이 찾아오니 당장 일어나기가 힘들다. 평소 마라톤뿐만 아니라 자전거로 단련돼 군살 하나 없는 건강한 몸이지만 하필 중요한 날 탈이 났다.
예기치 않은 소식에 회장 고익보(55)씨의 표정도 좋지 않다. 일단 고씨는 급한대로 서씨의 몸을 풀어준다. 팔을 당기고 어깨를 좀 풀어주니 절로 ‘악’ 소리가 난다.
서씨가 애써웃으며 “전 실전에 강한 여자니까요...걱정없어요”라고 답한다. 그리고는 곧바로 옷과 신발을 챙기고 밖으로 나섰다.
달리는 것이 기쁨이 되다
차 안에서 서귀포중앙동 우체국장 김문원(59)씨의 얘기를 듣게됐다. 마라톤에 입문한 지 7년째, 풀코스도 19번 완주했다. 그가 처음 마라톤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금연 때문이었다.
“담배 끊을 결심을 하고 동네공원을 산책하다보니 뭔가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뛰기 시작했죠. 우정청의 마라톤클럽에서 단체로 마라톤대회에 출전하는데 50대에 뛸 사람이 없다고 뛰라고 해서 대회에 출전한 게 처음이었습니다”
그렇게 마라톤을 시작한 뒤 15kg이 빠졌단다.
“처음 담배 끊고 나서 마라톤을 시작한 뒤 1년 동안은 가래가 계속 나왔어요. 새까만 가래가. 마라톤 시작하기 전에 방사선과에서 검강검진을 받아보면 폐가 뿌옇게 나왔어요, 갈비뼈가 안 보일만큼. 그런데 마라톤을 몇 년 한뒤 얼마 전 다시 가서 방사선을 찍어보니 검은 색 필름위에 뿌연 게 사라지고 갈비뼈가 선명하게 나오는 거에요. 거기 의사가 물었죠 “무슨 운동하십니까? 이거 건강한 사람 견본으로 제가 걸어놓고 싶네요”라고 말을 하더라구요”
대화를 계속하던 중 그가 환갑을 코 앞에 뒀다는 것을 알게 됐다. 분명 누가봐도 40대로 보이는 외모였다. 동안이라는 말을 건네자 그가 웃으며 “머리가 좀 벗겨져서 그렇지 모자를 쓰면 젊어보이긴 할 거에요”라고 답한다.
몸이 달라지고, 동안이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니 그의 경험 자체가 훌륭한 마라톤 예찬론이다.
“마라톤은 성질...아니 아니 성격을 차분하게 만드는데도 도움을 줘요. 바둑이 사람을 차분하게 해준다고 하잖아요? 그것처럼 괴롭거나 우울할 때 뛰면서 생각을 해요. 잘못했던 것, 과거를 돌아보고 생각을 하다보면 해소가 되더라구요. 자신을 돌아보게 될 기회가 됐어요”
17일 오전 7시. 대회장에 도착한 뒤 김 국장의 표정이 더 밝아진다. 기분이 어떠냐고 묻자 설렌다고 답했다.
대회시작 30분전. 짐을 맡기고 몸을 풀기 시작한다. 이제는 각자 스스로의 싸움을 할 시간이다. 기록별로 A그룹부터 E그룹까지 나눠 2만 여명이 줄지어 출발선에 섰다.
오전 8시. 땅 소리가 나고 출발하기 시작했다. 차량을 모두 막은 채 광화문 앞 왕복 10차선 도로를 달리는 기분은 모든 러너에게도 남다르다. 드디어 오전 8시.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가 들리고 모두가 앞으로 쏟아져나갔다.
오늘도 달리고, 내일도 달린다
해가 하늘로 높게 떠오르자 자신과의 긴 싸움을 버틴 이들이 하나 둘 씩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케냐의 프랭클린 쳅크워니(28)가 2시간6분59초로 골인점을 통과했다. 그 뒤로 하나 둘 씩 엘리트선수들이 들어섰다. 2시간 40분대가 넘어서자 일반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서브 3(3시간 이내에 골인지점에 들어오는 것)는 마라톤 매니아들에게는 ‘로망’이자 ‘훈장’이다. 이 서브3를 달성했다는 자체만으로 일반인 마라토너 중에서는 상당한 실력자라는 증거가 된다.
서브 3를 통과하는 사람들의 환호가 이어진 지 몇 분 후 오혜선(44)씨가 결승선에 들어섰다. 오 씨를 시작으로 서귀포마라톤클럽 회원들이 하나 둘 씩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침에 몸살로 뛸 수 있을까 걱정을 하던 서옥선 씨 역시 무사히 완주를 했다.
전원이 완주하고 이제 남은 것은 첫 도전을 한 문미정(51)씨.
5시간이 다 되도록 모습이 보이지 않자 사람들이 걱정하기 시작한다. 5시간 하고도 15분 정도가 지나가자 문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반 쯤은 기쁘면서도 반 쯤은 얼이 빠진 듯한 표정. 그리고 몹시 지쳐보였다. 회원들이 모여 그녀를 향해 박수를 치며 포옹을 나눴다.
이 날 가장 표정이 좋았던 사람은 박광표(50)씨. 그는 본인의 최고기록을 9분이나 앞당겨 약 3시간 17분대에 들어왔다. 기록증을 제출하지 않아 본래 기록이면 B코스 정도에서 뛰었을텐데, 맨 뒤 E코스에서부터 수백명을 제치며 거슬러 올라오니 힘이 많이 부쳤다고 말했다.
그는 “기쁘고, 감동도 느껴진다”며 “사실 연습을 많이 하지는 못했는데 이상하게 욕심이 났다. 그래서 욕심을 조금 부렸는데 그게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명상’은 이 날 코스에서도 찾아왔다. 박씨는 “한 10분간은 나만의 세계 속에 빠져서 생각을 했다며 그 때만큼은 완전히 내 시간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모두가 골인지점에 들어오자 지쳐서 드러누울줄로만 알았지만 금새 일어나 수다를 나눴다. 후련한 모습이다. 회장 고익보씨가 트레이닝복을 걸친 채 운동장에서 계속 빠져나오는 사람들 틈 사이에서 말한다.
“마라톤에는 늘 고통이 따르고, 누구에게나 힘들지만 그것을 행복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오늘 뛰고나서 ‘죽었다 깨나도 다시 안 뛴다’ 이런 생각을 할 거에요. 하지만 며칠만 지나면 다시 뛰고싶어 안달이 날 겁니다. 누구도 맛 볼 수 없는 기쁨이죠.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은 남들보다 한 가지 행복을 더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다시 버스로 돌아가는 길. 지칠법도 한 데 모두가 발걸음이 가볍다. 큰 대회를 치루고나니 아쉽거나 허무하지는 않냐고 물었다.
김영민(43)씨가 웃으며 답했다. “앞으로도 대회는 계속 있으니까요. 어떻게보면 이번 대회는 봄 첫 대회이니만큼 자신이 겨울동안 얼마나 훈련을 열심히 했는지 확인해보는 시험이에요. 앞으로도 계속 뛰어야죠”
“그럼 훈련도 계속되나요?”
“그럼요, 다음 주 수요일과 토요일에도 변함없이 계속 훈련합니다”
그들에게 마라톤은 특별한 대회나 기록달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늘 이어지는 일상이기 때문이다. 내일이면 각자 밭으로, 가게로, 직장으로 돌아가지만 어김없이 새벽이 되면 다시 거리로 나가는 그들에게 허무하지 않냐는 물음은 우문이었다.
작별인사를 하고 헤어지는 길. 9월 29일 아름다운제주국제마라톤대회에서 꼭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건넸다. 그리고 이 스포츠 매니아들에게 별 염려는 안되지만 ‘건강하라’고 손을 흔들었다. <제주의소리>
<문준영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